60년간 10만컷… 한국에 빠진 일본인이 담은 현대史
다큐멘터리 ‘사진의 얼굴’ 개봉

그는 한국에 빠진 사진기자였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돼 있던 1964년 8월 처음 한국에 왔다. 60년간 100여 차례 한국을 찾아 현대사 현장을 카메라로 기록했다. 이방인의 차분한 시선으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민주화 데모, 판잣집이 늘어섰던 청계천을 10만컷에 담았다.
일본 포토 저널리스트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90)의 사진 인생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얼굴’이 2일 개봉했다. 영화에는 그의 사진 1000여 장이 들어있다. 그는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제가 본 1960년대 한국은 꺾이지 않는 열망이 폭발하던 나라였다”며 “한국의 역사를 목격하고 기록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1936년 일본 시마네현에서 태어나 1960년 도쿄농업대학을 졸업했다.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해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한쪽만 보였으나 중학생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일본에서 포토 저널리스트로 데뷔하려면 하나의 테마를 취재해 전시회를 열어야 했다. 고심하던 그는 우연히 ‘주간 아사히’에 게재된 미나마타 지방의 수은 중독 기사를 봤다. 그해 5월 미나마타를 찾아간 그는 주민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다니며 마음을 얻었다. 뒤틀린 신체가 아니라 말없는 비극을 담았다. 병으로 시력을 잃은 소녀가 천장에 매달린 종이학을 응시하는 사진 등이 큰 주목을 받으며 1963년 일본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을 받았다.
또 다른 주제를 찾던 그의 시선은 한국에 꽂혔다. “동서 냉전 틈바구니에서 고투하는 분단국가의 역사가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개XX’와 ‘쪽바리’였다. 생선가게 주인이 구정물을 끼얹은 적도 있다. 그는 “그런 말을 들어도 화나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게 취재는 전투고, 저는 전투에 나간 전사이기 때문에 욕을 먹는다고 그만두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1960년대 후반 청계천을 많이 찍었다. “이른 아침 아이들이 개천에서 노는 모습에서 생명력을 느꼈다”고 했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사진을 찍느냐”고 말리면 “건물이 가난하다고 사는 사람의 표정까지 가난한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계속 찍었다.

아내는 한국인 최화자(82)씨다. 한국외대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기업에서 일본어 통역을 하던 그녀를 1969년 취재하다 만났다. 1년5개월간 편지를 주고받다 1970년 결혼했다. 청혼 편지의 마지막줄에 ‘저는 빚이 있습니다’라고 썼다. 이날 인터뷰에서 통역을 맡은 최씨는 “빚이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며 “성실한 기자로 보여 믿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 가져간 것은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최씨는 “일본에 살면서 외롭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구와바라가 한국인과 결혼하더니 사진이 나빠졌다’는 말이 나올까봐 어떻게든 버텼다”며 “다큐를 보니 제가 잘못 산 건 아닌 것 같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구와바라는 “저는 가족 구성원으로는 실격”이라며 “아내 덕분에 역사를 남겼다”고 말했다.
이번 다큐는 그가 찍은 경북 문경 도자기 사진에서 출발한다. 한국에서 분청사기라고 하면 개밥그릇 정도로 여겨지던 시절, 그는 “희귀한 역사”라며 취재를 나와 ‘환상의 찻사발을 굽는 도공’ 기사로 한국 도자기를 일본에 소개했다. 당시 사진을 2019년 다큐 ‘불숨’을 찍던 고희영 감독이 보고 그를 직접 만나러 가면서 ‘사진의 얼굴’이 시작됐다.
제작 중 애로도 있었다. 포토샵도 없던 시절 사진기자로 일했던 그는 이번 다큐 촬영 때도 ‘있는 그대로’를 고집했다. “좀 더 나은 컷이 필요하니 같은 동작으로 한 번만 더 찍자”고 부탁하면 “그러면 다큐가 아니지 않으냐”며 거절해 제작진이 진땀을 뺐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매년 5월 열리는 미나마타 희생자 위령제를 찾아간다. 마지막 주제로 통일된 남북을 찍고 싶다. 그는 “설혹 통일이 되더라도 제가 이 세상을 떠난 뒤일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다큐 ‘사진의 얼굴’은 ‘백만 컷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5일 개봉한다. 13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특별기획전 ‘바람의 길목 DMZ’에서도 그가 기록한 DMZ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는 “제가 본 한국의 현대사는 피, 땀, 눈물의 역사”라며 “젊은 분들이 제 다큐를 보시고 한국의 역사를 좀 더 이해해 주신다면 제가 더 감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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