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으로 읽는 음식 이야기] 아사즈케 X 파오차이 X… 짝퉁 김치 막아낸 ‘발효’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2025년 한국 김치 수출액은 1억 6,400만 달러(약 2,273억 원)를 기록했다.
한국 정부는 1996년 3월 CODEX 아시아지역위원회에 김치 규격화를 제안했다. '김치는 소금에 절인 배추를 주원료로 양념류를 혼합, 저온에서 젖산 생성을 통해 발효된 제품으로 한다.' 일본 정부도 이 안에 찬성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언론에 '아사즈케가 김치로 공인받으면 종주국인 한국의 자존심은 물론 해외시장에서 한국 김치의 입지도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규격명
김치 국제규격 (CODEX STAN 223-2001)
제정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 2001년 채택 / 한국 제안(1996.3)
비교1
일본 '아사즈케' 김치 포함 시도 / 1996~2001년 한일 협상, 최종 배제
비교2
'파오차이' 국제표준 ISO 24220 / 2020년 제정 / 중국 제안, 김치는 적용 제외 명시
국내
김치산업 진흥법 제17조 제2항(국제규격화 추진 의무), 제20조의2(김치의 날) /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 지침(문화체육관광부훈령) 제10조

규격서에 적힌 김치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는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보건기구가 함께 만든 기구다. 여기서 정한 규격은 나라 사이 식품 교역의 기준이 된다. 한국 정부는 1996년 3월 CODEX 아시아지역위원회에 김치 규격화를 제안했다. 3년여 논의 끝에 나온 규격안은 이랬다. '김치는 소금에 절인 배추를 주원료로 양념류를 혼합, 저온에서 젖산 생성을 통해 발효된 제품으로 한다.' 일본 정부도 이 안에 찬성했다.
문제는 정부가 아니라 업계에서 나왔다. 일본의 절임 식품업체들이 자사의 '아사즈케(浅漬け)' 상품도 김치 규격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아사즈케는 김치가 아니다
아사즈케는 발효 과정 없이 몇 십 분에서 몇 시간 절이는 일본식 즉석 겉절이다. 신맛을 내려고 자연 발효 대신 구연산을 넣고, 당시 규격안이 김치에 쓰지 못하도록 정해 둔 파프리카 천연색소와 간장을 쓰는 제품도 있었다. 1999년 10월 18일 농림부는 '아사즈케는 김치가 될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농림부 관계자는 언론에 '아사즈케가 김치로 공인받으면 종주국인 한국의 자존심은 물론 해외시장에서 한국 김치의 입지도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오차이는 김치가 아니다
2020년 11월 24일 파오차이(泡菜) 국제표준 ISO 24220이 제정되자, 중국시장감독보(中国市场监管报)가 위챗 계정에 "중국 파오차이(中国泡菜)가 국제시장에서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됐다"는 글을 올렸다. '泡菜'라는 한자가 한국어로 옮겨지며 '중국 김치'가 됐고, 연합뉴스 등 국내 언론은 11월 29일 "중국 쓰촨김치 국제표준 인가"라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다. 다음 날인 11월 30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설명자료를 냈다. 해당 표준의 적용 범위에 '이 표준은 김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다는 것이었다. 두 문서는 대상부터 다르다. 김치는 배추에 고춧가루 양념을 버무려 발효시킨 것이고, 파오차이는 배추류와 겨자줄기, 줄콩, 당근 등을 소금물에 절인 것이다. 발효를 요구하지 않는다. 24년 전 아사즈케를 걸러낸 바로 그 기준이, 이번에는 파오차이를 걸러냈다.
번역어를 정한 훈령
세 번째 다툼은 이름이었다. 중국에서 김치는 오랫동안 '파오차이(泡菜)'로 사용되었다. 파오차이가 별개 음식이라면 김치를 그 이름으로 부를 이유가 없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1년 훈령을 고쳐 김치의 중국어 표기를 '신치(辛奇)'로 정했다. 발음이 김치에 가깝고, '신(辛)' 자가 매운 맛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다만 훈령은 국가와 지자체가 쓰는 공공 용어의 기준일 뿐, 중국 안에서 무엇이라 부를지를 정할 힘은 없다.
규격을 만들라는 법
규격을 만들라는 의무는 국내법에도 적혀 있다. 김치산업 진흥법 제17조 제2항은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이 김치의 국제규격화를 추진하여야 한다고 정한다. 권고가 아니라 의무다. 같은 법 제20조의2는 매년 11월 22일을 김치의 날로 정했다. 배추와 무 같은 재료 하나하나(11)가 모여 스물두 가지(22) 효능을 낸다는 뜻이다.
김치는 왜 지리적 표시가 아닌가
음식의 이름을 지키는 또 하나의 길은 지리적 표시다. 다만 신청 자격이 '특정지역'에서 생산·가공하는 자로 좁혀져 있어, 전국 집집마다 담그는 김치는 해당이 안된다. 대신 여수 돌산갓김치처럼 지역이 분명한 것들만 등록됐다(2010년). 지역을 근거로 지켜지는 것들과, 발효라는 방식을 근거로 지켜지는 김치 그 자체로 길이 갈린 셈이다.
규격이 하는 일
김치를 둘러싼 다툼은 모두 법정 밖에서 벌어졌다. 국제규격이나 훈령도, 위반하면 처벌받는 규정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문서들이 중요한 이유는, 분쟁이 벌어졌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1996년의 협상도, 2020년의 소동도 누군가 목소리가 커서 정리된 게 아니다. 1996년 한국 정부가 밀어붙여 규격에 박아 넣은 '발효'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 정의를 적어 둔 덕분에 두 번 싸움에서 모두 김치의 국적을 지킬 수 있었다.
박정배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