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100] “개발 기간 한 달로”⋯ ‘AI 1세대 석학' 맹성현, 60년 효성에 던진 승부수

천원기 기자 2026. 9. 1.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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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초대석]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 이철준 PD.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효성그룹 본사에서 만난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부사장)은 인공지능(AI)의 미래를 논하면서도 쉬이 들뜨지 않았다. 30여 년간 자연어처리와 언어모델링을 연구해 온 국내 ‘AI 1세대‘ 석학이지만, 그의 입에서는 장밋빛 찬사 대신 서늘한 경고가 먼저였다.

“제가 컴퓨터공학자이고 AI 개발에도 많이 참여했지만, 지금 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졌습니다. 통제 불능 상태가 곧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최근 저서를 통해 AI 과의존이 부를 ‘자기 가축화‘와 비판적 사고의 붕괴를 경고하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AI 경계론’ 학자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 그가 대학 상아탑을 떠나 1966년 동양나이론 설립 이래 60년간 섬유·화학·중공업을 일궈온 제조기업 효성의 AI 사령탑으로 합류했다. 밖에서 훈수를 두던 고문에서 그룹의 전사 AI 전환(AX)을 총괄하는 지휘봉을 잡은 것이다.

언뜻 역설적이다. AI의 위험을 누구보다 깊이 들여다본 학자가 가장 공격적으로 AI를 수혈해야 할 전통 제조업의 심장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1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 역설은 명확한 해답으로 바뀌었다. 맹 원장이 효성에서 착수한 일은 화려한 AI 모델을 뽐내는 것이 아니었다. 60년간 축적된 현장의 기술과 숙련공의 ‘암묵지’를 AI와 결합해 연구개발(R&D)과 생산, 기업 문화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작업이었다.

그가 지목한 승부처는 단연 ‘시간’이다. 새로운 촉매나 산업용 섬유 하나를 개발하는 데 1~2년씩 걸리던 R&D 과정을 가상공간 AI 시뮬레이션을 통해 한 달 안팎으로 대폭 단축하겠다는 전략이다. 거센 파상공세를 펴는 중국 등 경쟁업체보다 먼저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겠다는 구상이다.

맹 원장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10개라면 AI는 몇만 가지를 탐색할 수 있다”면서 “그중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 몇 개를 추려 실제 실험을 하면 개발 기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60년 제조 효성의 시계가 AI를 만나 유례없이 가파르게 돌기 시작한 셈이다.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 이철준 PD.

맹 원장이 처음부터 ‘효성맨’을 자처했던 건 아니다. 지난해부터 AI 고문으로 디지털 전환 방향을 자문하며 현장을 둘러보던 중 결정적인 심경 변화를 겪었다.

“계열사들의 상황을 보니까 신제품이나 신사업 개발 등에 AI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죠. 연구원을 만들어 제대로 된 AX를 하고, 효성이 잘하는 제조업과 AI를 제대로 한번 융합해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맹 원장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회장, 부회장 등 최고경영진이 AI 기술 적용의 필요성과 가치,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읽고 있고, AI 도입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마주한 제조업 전장도 치열했다. “제가 여기 와서 기업을 직접 보니까 참 대단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업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투를 벌이는지 보이더라고요.”

특히 섬유와 화학 분야에서 중국의 가격 공세는 거셌다. “중국 기업들은 모든 걸 싸게 만들잖아요. 대규모로 만들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효성 같은 기업은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중국의 가격경쟁력을 AI로 넘어설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좀 늦었습니다. 그들도 워낙 빨라서요.”

그러나 그는 해법도 있었다. 중국과 똑같은 링에서 안 싸우면 된다는 것이다. “그쪽도 AI를 쓸 겁니다. 결국 새로운 아이디어가 중요해요. AI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도울 수는 있지만, 결국 결정은 인간이 하는 거잖아요. 우리는 우리한테 맞는 전략, 우리한테 맞는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중국이 전 세계 시장을 다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요.” 다품종 특화 생산에 최적화된 AI 기반 제품 설계로 독자적인 시장을 뚫겠다는 복안이다.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대량 생산 경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게 맹 원장의 판단이다.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 이철준 PD.

맹 원장의 현실주의는 취임 직후의 냉정한 잣대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맹목적인 AI 도입을 경계하며 철저한 ‘투자 대비 효과(ROI)’을 내세웠다.

“효성이 AI를 전혀 안 했던 것은 아니에요. 공장 자동화도 그렇고 설계 도면도 그렇고 나름대로 계속 써 왔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확실하게 분석해 봐야 합니다. 잘한 것은 그대로 가고, 부족한 것은 새로 해야죠.”

그는 기술만 앞세우는 세태를 직격했다. “‘이런 AI가 있는데 이거 굉장한 거야. 한번 잘 써봐’라고 한 뒤에 쓸 곳을 찾아다니는 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출발점은 현장의 결핍이어야 하지만 가장 큰 장벽은 ‘데이터‘였다. “공장에 AI를 넣고 싶은데 학습시킬 데이터가 없는 겁니다. 그동안에는 그 능력을 사람이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소위 말하는 ‘암묵지’입니다.”

맹 원장은 “숙련자의 암묵지를 추출해 AI 쪽으로 가져오든지, 데이터를 충분히 축적해서 오랜 경험에서 나온 판단을 데이터로 만들어야 한다”며 “데이터가 없는데 AI부터 적용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냥 하는 흉내만 내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개념검증(PoC)만 거듭하다 주저앉는 오류를 버리고 철저한 사업성과 중심으로 효성을 재편하겠다는 결의다.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 이철준 PD.

맹 원장은 연구원을 ‘2센터 1실’ 체제로 꾸렸다. 당장의 원가 절감과 공정 개선을 맡는 ‘AX 추진센터’와 신제품을 창출하는 ‘AI 드림센터’가 두 축이다.

“AX 추진센터는 각 회사가 가진 여러 문제를 AI로 개선해서 원가도 줄이고 효율과 생산성을 높이는 쪽입니다. 그런데 AI 드림센터의 목표는 좀 다릅니다. 쉽게 말하면 신제품 개발입니다.”

스마트팩토리나 불량 검출 등 단순 효율화는 다른 기업도 할 수 있다. 장기적 초격차는 가상공간 시뮬레이션으로 고부가 신소재를 얼마나 빠르게 개발하느냐에 달렸다. 맹 원장은 “새로운 촉매제 하나를 만들거나 새로운 섬유 하나를 만들려 해도 어떤 것은 1년, 2년이 걸린다”며 “결국 AI가 할 수 있는 건 1년, 2년 걸릴 프로세스를 한 달 정도까지 줄여보자는 것"이라고 짚었다.

해법은 막대한 시간이 드는 실험실 검증을 컴퓨터 안으로 먼저 끌어들이는 데 있다. 신소재 물성과 복잡한 공정 조건을 가상공간에 입력한 뒤,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알파폴드’(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3차원 입체 구조 예측 AI) 처럼 수만 가지 후보군을 선제적으로 탐색하는 메커니즘이다. 맹 원장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10개 정도지만, AI는 몇만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면서 “사람은 그 몇만 가지를 다 실험할 수 없기에 AI로 굉장히 많은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중 가장 괜찮은 것을 추려 검증하면 개발 기간이 훨씬 짤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 이철준 PD.

유행처럼 번지는 자체 대규모 언어 모델(LLM) 구축에도 선을 그었다. “대규모 파운데이션 모델들이 계속 좋아지고 있잖아요. 그러면 산업 특화 모델이 꼭 필요한지부터 면밀하게 봐야 합니다. 소형 언어 모델(sLLM)을 직접 개발하고 운영하는 데도 비용이 만만치 않거든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챗봇 간판 대신 고분자 구조 생성, 촉매 역설계 등 실제 사업 수익과 직결되는 전문 알고리즘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인재 전략의 핵심은 ‘AI+X’가 아닌 ‘X+AI’다. 도메인 지식(X)이 AI 기술보다 우선이라는 철학이다. “저는 AI+X보다 X+AI를 항상 주장합니다. 융합에서는 도메인 지식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효성 같은 기업은 더 그렇죠. AI 전공자가 각 도메인을 배우는 것보다 도메인 전문가가 AI를 배워 활용하는 게 훨씬 쉽습니다.” 이에 따라 현장과 AI 개발자를 연결할 ‘전방배치 엔지니어(FDE)’를 사내에서 적극 육성하고 있다.

맹 원장이 강조한 X+AI는 AI 코딩만 할 줄 아는 비전공자에게 복잡한 섬유·화학 공학을 처음부터 가르치기보다, 이미 현장 도메인 지식을 완벽히 꿰뚫고 있는 사내 엔지니어에게 AI 툴을 학습시켜 실무 문제에 즉각 적용하는 게 훨씬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취지다.

60년 하드웨어 조직의 문화도 뜯어고친다. “효성은 제조업 위주의 회사입니다. 하드웨어 기업이죠. 그런데 AI는 소프트웨어입니다. 뭔가 만들어보고 실험하고 수정하는 루프(수정·보완의 순환 과정)가 필요해요. 사고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소프트웨어적 마인드가 접목돼야 합니다.”

맹성현 효성 AI융합연구원장. 이철준 PD.

그는 인터뷰 말미, AI 경쟁의 위험성을 환기했다. “AI 때문에 버스에 불이 붙었어요. 그런데 그 버스가 막 달리고 있는 겁니다. 안에 탄 사람이 보니까 속도도 너무 빠르고 불도 타고 있어요. 뛰어내리고 싶은데 달리고 있으니까 뛰어내릴 수가 없는 거죠. 완전히 그런 형태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주도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AI는 몸이 없잖아요. AI는 소설도 읽고 별걸 다 읽었으니까 인간의 감정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애인과 헤어졌다고 하면 어떤 감정을 가질 것인지도 지식적으로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맞는 위로도 굉장히 따뜻하게 해주죠. 그런데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입니다. 흉내를 내는 거죠.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맹 원장이 효성에서 지휘하는 실험은 결국 인간과 기계의 주도권 싸움에서 비롯된다. 60년간 축적된 현장의 손끝 경험을 AI라는 도구와 융합해 제조업의 시간표를 혁신하는 일이다. 빅테크와의 허황된 모델 경쟁을 거부하고 제조의 본질 위에 AI를 결합하겠다는 ‘맹성현의 현실주의’다. 1966년 나일론 실타래에서 시작된 효성의 제조 신화가 이제 AI 위에서 다시 쓰여지고 있다. “AI 강자가 되는 것보다 ‘AI융합 강자’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원기 기자 1000@viva100.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