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청춘들의 지적 성장…60여년 우정의 일대기

한겨레 2026. 8. 3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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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조직이 아니었다. 1902년 무렵, 당시 무명이었던 23살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두명의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철학, 과학, 문학을 자유롭게 토론하던 비공식 모임에 스스로 붙였던 이름이다.

격이 다르지만, 대학 시절 나와 두명의 같은 학과 친구가 어울려 물리학을 비롯해 철학, 인문학 등 세상사를 자유롭게 토론하던 비공식 모임을 이어 간 일이 있다.

그 무렵 명강의로 소문난 김순경 교수의 양자화학은 "닥치고 외워!" 형태의 강의여서 모두 벌벌 떠는 수업이었으나, 물리학과 3학년 학생 임원규가 부동자세로 그 교실에 앉아 강의를 듣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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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물리학자 장회익 경계를 넘어]
8화 우리들의 ‘올림피아 아카데미’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것은 뭐 그리 대단한 조직이 아니었다. 1902년 무렵, 당시 무명이었던 23살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두명의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철학, 과학, 문학을 자유롭게 토론하던 비공식 모임에 스스로 붙였던 이름이다. 그리고 불과 2~3년 뒤 저절로 해체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인 1905년,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논문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이 모임이 그 배경의 하나로 지목되어 관심을 끈다.

격이 다르지만, 대학 시절 나와 두명의 같은 학과 친구가 어울려 물리학을 비롯해 철학, 인문학 등 세상사를 자유롭게 토론하던 비공식 모임을 이어 간 일이 있다. 이 무렵의 우리는 오래전 아인슈타인이 비슷한 모임을 만들었던 일은 전혀 몰랐고, 여기에 그 무슨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올림피아 아카데미’였던 셈이다.

내가 임원규(1937~2019)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57년 당시 서울 동숭동에 있었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함께 입학하면서부터다. 입학 후 몇달 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강제 삭발을 당했던 우리 모두는 다투어 머리를 기르는 판국이었는데, 또다시 삭발을 하다니! 본인으로서는 공부를 좀 더 진지하게 해보겠다는 결의의 표현인지 몰라도 우리에겐 그저 남의 눈 정도는 개의치 않겠다는 약간의 오만으로 비쳤다. 나는 이런 그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에게는 높고 낮음에 무관하게 경멸할 것은 경멸하면서도 좋은 것은 흔쾌히 받아들이는 화끈함이 있었다. 강의에 대한 평가가 그랬고, 함께 나누는 대화에 대한 반응이 그랬다.

나로 말하면, 그때까지 ‘촌티’를 벗지 못한 상태였다. 지방에서만 성장했던데다 아직 대인 경험이 적었던 원인도 있었다. 이런 나에 비해 그는 자못 어른스러웠다. 사실 그는 서울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나이도 한살 위이다.(중학교 시절 그는 폐결핵으로 1년 쉬었고, 그 여파로 병역도 면제받았다.) 서울에 집이 있던 그는 다분히 안정된 상태에서 공부했지만, 나는 집안 여건상 입주 가정교사를 하거나 친척 집 신세를 져야 했다. 단지 학업 취향에는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기회를 만들어 나갔다.

나는 당시 신설동에 있던 그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게 되어 그의 형제들과도 모두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갔지만 대개는 교수나 강의에 대한 평가와 불만을 토로하는 게 다반사였고, 그러다가는 세상사에 대한 잡담으로 빠지곤 했다. 혹 늦어지기라도 하면 아예 그곳에서 먹고 자는 일도 적지 않아서 그 집에서도 친척이나 다름없이 대해 주었다.

성격만 보자면 우리 둘은 대조적인 점이 많았다. 그 후에도 그랬지만 그때부터 나는 다소 조심스러운 진보 쪽이었는데, 그는 합리적 보수 쪽에 가까웠다. 나는 학업에서나 사회사상에서 호기심이 많아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성향이었고, 그는 내 제안들에 상당한 공감과 포용을 하면서도 적절히 견제하며 중심을 지키려는 면이 강했다. 어느 토론 과정에서 내 집요한 질문에 보인 그의 반응이 한 사례이다. “야, 너는 머리가 한쪽으로만 좋아.”

2학년 어느 시기라 기억되는데, 우리는 동대문 시장을 떠돌다가 최저가의 노동복 한벌씩을 샀다. 색깔이며 모양이 올데갈데없는 죄수복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입고 나서자, 가끔 우리와 어울리던 같은 학년의 우대식(1936~)이 어디서 샀는지 비슷한 것을 구해 입고 나타났다. 사실 우리 셋은 빈 강의실 등에서 ‘세미나’라 하여 함께 학업에 관해 토론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제 복장까지 맞추었으니 완전 ‘죄수복 3인조’가 되었다.

어느 날은 대학의 한 남자 직원이 내게 조용히 물었다. “무슨 조직에 속하십니까?” 물론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우리들의 ‘올림피아 아카데미’였다. 아인슈타인의 모임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3인조 또한 주제에 무관하게 자유로운 토론을 이어 갔고, 이것이 이후 우리의 지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상대성 이론’은 4학년 과목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3학년이 되면서 이 두 사람을 부추겨 함께 상대성 이론을 앞당겨 이수했다. 우리 3인조는 한해 위 선배들과도 낯설지 않게 되었다. 후에 원규와 결혼한 노재량이 바로 위 학년 학생이었는데, 이것이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대성 이론과 그 철학적 바탕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원규는 양자역학과 그 실용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이 4학년 과목이었는데, 원규는 화학과 과목인 ‘양자화학’ 강의를 먼저 들었다. 그 무렵 명강의로 소문난 김순경 교수의 양자화학은 “닥치고 외워!” 형태의 강의여서 모두 벌벌 떠는 수업이었으나, 물리학과 3학년 학생 임원규가 부동자세로 그 교실에 앉아 강의를 듣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1961년 졸업 후, 기왕에 병역을 마쳤던 우대식은 미국 뉴욕의 렌슬리어 공과대학(RPI)으로 바로 떠나고, 임원규는 서울대 대학원으로, 그리고 나는 병역의무 수행 겸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각각 흩어졌다. 그리고 2년 후에 원규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UNC)으로, 그리고 다시 2년 후에 나는 캘리포니아 대학 리버사이드(UC-Riverside)로 가게 되어 우리는 모두 미국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하지만 서로 멀리 있어서 더 이상 의미 있는 학문적 교류는 하지 못했다.

1969년 이른 봄,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물리학회에 가는 길에 채플힐의 원규 집에 들렀다. 이때는 둘 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박사 후 연구원 자리를 구하던 참이었는데, 그 무렵 나는 분자생물학에 심취해 생명 연구 분야로 나가 볼 생각도 지니고 있었다. 내가 그 생각을 원규에게 비치자, 그는 “물리학 안에도 할 일이 많아”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 후 우연히도 우리 둘 다 분야는 다르지만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연구원 자리를 제의받았고, 원규는 그리로 갔다. 그러나 나는 그 이전에 이미 텍사스 대학(UT-Austin) 연구원 자리를 수락한 형편이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원규는 무척 아쉬워했고, 그 점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때 가장 생산적 학문 논의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 자리 잡았고, 원규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칼텍) 소속의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에서 오랜 연구 생활을 하다가 만년에는 칼텍의 재료공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도 서로 간의 방문이 있었고, 간간이 학문적 논의도 했다. 그는 이 무렵 미세중력장(micro-gravity) 내에 나타나는 물질의 구조와 성격을 연구한다고 했는데, 지구 중력의 영향이 극도로 약해지는 외계의 로켓 속이나 성간 물질들의 성격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한번은 내가 “생명이란 걸 한마디로 하자면, 바로 .…인 것을 말하는 거야” 했더니, 그는 다소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나는 네가 그 많은 것을 하나로 꽉 줄여서 말하는 그 대담함에 항상 놀란다”고 했다. 또 언젠가는 “네가 옆에 없는 것이 많이 아쉽다”면서 격의 없는 토론이 이어지던 지난날의 지적 교감을 떠올렸다.

한번은 원규와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우리 전통학문의 대표적 학자가 퇴계라고 말하자, 원규는 그분이 학문에 기여한 바가 무엇이냐고 콕 찔러 물었다. 그때 나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우물쭈물했는데, 언젠가 내가 이것에 대해 글을 쓰면 꼭 보여주리라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내 최근의 책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추수밭, 2019) 첫 장과 마지막 장에 퇴계의 업적을 충분히 서술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책이 나오자마자 한권을 미국의 원규 주소로 보냈다.

그 무렵, 장기간 그와의 연락이 안 되어 이상하게 여긴 지인들이 그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고 세상을 떠난 후였다.(그의 부인 노재량은 그보다 수개월 전 먼저 작고했다.) 그리고 그의 현관 앞에는 한 작은 소포가 개봉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고 한다.

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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