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성폭력 피해자 몰래 후보 검증 제보? 지방선거 때 민주당에서 무슨 일이

2026. 8. 31.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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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 끝나고 피해자는 일상 복귀 노력 중인데 ‘특정 후보 관련돼’ 돌연 익명 제보
알고보니 출처는 김민석 지역사무실…후보 검증이라지만 공천 영향 미치려 했나 의심도
서울 여의도의 한 고층빌딩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정지윤 선임기자

지난 6·3 지방선거의 더불어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당내 성폭력 피해자가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가 특정 구청장 후보를 원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제보가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일은 당시 국무총리이자 민주당 차기 당대표로 유력했던 김민석 대표의 지역사무실에서 발생했다. 김민석 의원실 측은 후보 검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사전에 피해자와는 논의가 없었다. 피해자 A씨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민주당 지방선거 과정에서 자신의 동의 없이 이뤄진 공론화 시도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8월 27일 주간경향 취재를 종합하면, 지방선거 후보자 선출을 앞둔 지난 4월 ‘김인수’라는 이름으로 채현일 민주당 의원실에 e메일 1통이 왔다. e메일에는 “영등포구청장 후보로 B씨가 등록했다는 소문을 듣고 제보하려고 한다”며 “지난 2021년 박완주 전 의원이 보좌진을 성추행한 사건이 있는데 당시 B후보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한 일이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e메일에는 “자세한 사항은 공소장을 살펴주시길 바라며, 피해자를 통한 취재도 부탁드린다”라고 돼 있었다. 이어 “피해자: OOO 전 보좌관”이라는 문구와 함께 피해자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고, 박 전 의원의 검찰 공소장이 파일로 첨부돼 있었다. OOO는 박 전 의원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인 A씨가 수사·재판 단계에서 썼던 가명이었다.

피해자와 충분히 소통할 수 없었나

박 전 의원은 2021년 서울 영등포구 한 노래주점과 인근 주차장에서 보좌진이던 A씨를 강제추행하고, 지역구 관계자들에게 A씨가 합의를 시도했다고 알려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강제추행과 명예훼손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지난해 12월 최종 확정됐다. 박 전 의원이 A씨에게 5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도 확정됐다. 고위 당직을 맡고 있던 B씨는 피해사실을 상담하던 A씨에게 ‘보상을 받고 합의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등 회유·중재한 의혹을 받았다.

김민석 신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8월 17일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회 민주당 정기 전국당원대회에서 당기를 흔들고 있다. 권도현 기자

문제는 영등포구청장 후보 B씨에 대한 제보 e메일이 피해자인 A씨 의사와 무관하게 전달됐다는 점이다. A씨는 우연히 ‘네가 쓴 것으로 보이는 e메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해당 제보의 존재를 알게 됐다. 지방선거 후보는 중앙당과 시도당의 공천관리위원회, 예비후보자 자격심사위원회 등 당내 정식 기구에서 도덕성을 포함해 부적격 여부를 심사하는 공식 절차가 있다. 이 같은 당의 정식 기구가 A씨에게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지, 공천에 대한 의견이 어떤지 등을 물어온 것도 아니었다. 4년여간의 수사·재판이 끝나고 피해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복귀하던 중 갑작스럽게 자신과 관련한 제보 e메일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안 A씨는 무척 당황스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A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B씨가 구청장 후보에 부적절하다고 생각은 했고, 당내 정식 기구에서 물었다면 당당히 제 의견을 말했을 것”이라며 “그런데 피해자 동의도 없이 제3의 관계인들이 피해자가 공천을 원하지 않는다고 무차별적 e메일을 뿌린 것에 몹시 불쾌했고, 민주당에 실망을 하게 됐다”고 했다. A씨는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e메일을 제가 뿌렸다고 오해하게 만든 것과 피해 내용이 담긴 공소장을 첨부한 것”이라며 “사건이 일어나고 지난 4년 동안 굉장히 힘들었고, 이제서야 조금씩 극복하며 평범하게 살고자 노력 중인데 아무리 당내 경선이 치열해도 성폭력 피해자의 아픔을 이용한 저열함에 절망했다”고 했다.

성희롱·성추행 사건 처리에 대한 각종 매뉴얼을 살펴보면 사건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 입장을 고려할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두고 있다. 피해자가 신고하기 어려울 수 있음을 감안해 제3자도 신고할 수 있게 제도를 열어두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피해자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해당 사건이 피해자 의사에 반해 처리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피해자 의사에 반해 사건이 처리되거나 공론화, 제보될 경우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아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피해자를 위해 선의로 무엇인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이 사건과 관련해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인지하거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남 활동가는 “피해자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한발 앞으로 나가는 게 힘들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타의에 의해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면 심리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들고, 또 다른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가해자에게) 유죄가 나와서 사건이 어느 정도 종결이 됐다고 하더라도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 소환되고, 이야기되고, 이용되는 것이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2018년 11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A씨는 고민 끝에 영등포경찰서에 진정서를 냈고, 지난 5월 성폭력특별법과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e메일 발신자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러면서 e메일을 보낸 곳이 김민석 민주당 대표의 지역사무실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김 대표의 지역구는 서울 영등포구을 선거구이고, 채현일 의원은 영등포구갑 지역구다.

기자는 지난 8월 24일 김민석 의원실에 해당 e메일을 어떤 경위에서 어떤 취지로 보낸 것인지, e메일 발송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를 위해 어떤 방법을 강구했는지 등을 질의했으나 의원실은 8월 27일 현재까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의원실 관계자는 B씨가 구청장 후보로 적임자인지 검증한다는 차원에서 제보 e메일을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해자가 B씨 공천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피해자 지인을 통해 확인했고 피해자를 돕기 위해, 또 선거 과정에서 논란이 커지기 전에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후보 검증 차원이 아니라 지방선거 공천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영등포가 지역구인 김 의원 측이 원하는 다른 후보를 위해 B씨를 밀어내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공익적 차원에서 ‘B씨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었으면, 애초부터 당 예비후보자 자격심사위원회나 공천관리위원회 등 정식기구에 문제를 제기하면 될 일이었다. B씨는 당내 경선에서 탈락했다.

이번 일은 성폭력 사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민주당 내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성폭력 피해를) 공동체가 용인하지 않겠다는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내부 규칙과 절차가 있어야 한다. 이는 피해자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공동체가 이 문제를 같이 책임지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며 “또 피해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지에 대해서는 피해자와의 충분한 소통과 합의를 통해 섬세하게 해나가야 할 일인데 그런 부분이 미진했던 것 같다”고 했다.

국회 의원회관의 김민석 의원 사무실 앞에 “정치는 약자의 눈으로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 있다. 정용인 기자
의원실 “문제되기 전에 검증 차원”

경찰 수사는 미적지근한 상황이다. 영등포경찰서는 A씨가 진정서를 접수한 지 두 달여 만인 지난 6월 16일 ‘수사 중지’를 결정했다고 통지했다. 경찰은 “성명 불상 피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다각도로 수사했음에도 현재로서는 사건 해결에 필요한 단서가 부족해 단기간 안에 사건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A씨가 어떤 수사가 진행됐는지 문의하자 경찰 측은 ‘IP 추적을 통해 e메일을 보낸 건물을 특정했지만, 관련자들이 내용을 부인하고 실제 발신 주체가 특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에 A씨는 지난 6월 29일 수사 중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경찰 관계자는 “공정성에 대한 의심을 받을 사정은 전혀 없다. 현재 수사 진행 중”이라고 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후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쉽지 않다. 특히 말 많은 정치권에서 피해자가 받는 압박은 더욱 크다. 국회 보좌진이었던 A씨는 성추행 피해사실을 고발한 뒤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져 고립당했고, 2차 가해성 모욕을 겪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입었고,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했다. 지난했던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났고 한동안 평온하게 지냈지만, A씨는 이번 사건으로 다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A씨는 “경찰과 검찰에서 받은 조사만 10여차례였고 신고부터 사건 송치까지 6개월, 검찰 기소까지 다시 6개월, 1심 재판만 1년 6개월이 걸릴 정도로 길었다”며 “그런 세월을 겪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고, 정치권에서 완전히 잊힌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아직도 이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저를 괴롭게 한다”고 했다. A씨는 “아무리 선거 때 온갖 음모와 투서가 난무한다고 하더라도 성폭력 피해자가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버텨왔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 피해를 오로지 자기들이 미는 후보를 위해서, 상대방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이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최악의 정치이고, 김민석 대표가 책임 있는 답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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