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권향의 컬처판타지아] 뮤지컬 ‘엘리자벳’, 100년 넘게 이어진 치명적 질문…자유를 비춘 ‘또 다른 거울’

표권향 2026. 8. 31.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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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날 때 바다로 향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이 말하는 '자유' 역시 어쩌면 이 항해와 닮았다.

제국과 국민을 위해 복종과 의무를 강요받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인다.

엘리자벳은 황후가 되기 전부터 자유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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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벳의 손을 놓지 않은 ‘죽음’의 정체
화려함에 가려진 ‘죽음과 삶’의 깊은 이야기
11월15일까지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 공연
4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엘리자벳’은 이야기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질문을 다시 꺼내놓는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향해 떠날 때 바다로 향한다. 돛단배든 여객선이든 화물선이든 목적지를 정하고 항해한다. 순풍을 만나면 희망을 노래한다. 하지만 폭풍을 만나면 온몸으로 맞서야 한다. 그럼에도 항해를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닿기 위해서다. 뮤지컬 ‘엘리자벳’이 말하는 ‘자유’ 역시 어쩌면 이 항해와 닮았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나는 ‘죽음’은 단순한 종착지가 아닌 삶과 사랑, 자유를 비추는 또 하나의 얼굴이다.

전 세계 1270만 명의 관객이 선택한 뮤지컬 ‘엘리자벳’ 한국 공연이 4년 만에 여섯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죽음을 둘러싼 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작품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번 시즌은 3년 전 10주년 기념 공연 직후 약속했던 변화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스토리와 넘버, 전체적인 무대 연출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부분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익숙함 속에서 발견되는 디테일이 오히려 작품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곳곳에 배치된 리프라이즈(Reprise)와 배우들의 달라진 해석, 더욱 압도적으로 확장된 무대 스케일은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배우들의 변화다. 초연부터 함께해온 박은태와 민영기를 제외하고 주요 인물을 한국 최고의 ‘히트메이커’ 뉴 페이스로 재구성했다. ‘엘리자벳’ 역 린아·이지혜·이지수, ‘죽음’ 역 카이·서경수·고은성이 책임진다. ‘루케니’ 역 박은태·강홍석·노윤, ‘프란츠 요제프’ 역 민영기·박민성, ‘황태자 루돌프’ 역 장윤석·김우성이 맡는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화려한 제국의 무대 뒤에서 한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사랑과 죽음은 정말 서로 다른 것인가,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달콤한 사랑이 지옥의 불길로…칼군무부터 특수효과까지 ‘숨멎’

EMK뮤지컬컴퍼니 특유의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는 여전히 강력하다. 이번 시즌에서는 무빙 스테이지가 공간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장면의 밀도를 높인다. 배우들의 움직임과 조명, 영상, 오브제(Objet)가 한순간에 맞물리며 거대한 제국의 화려함과 그 안에서 억눌린 개인의 삶을 동시에 보여준다.

가장 화제의 중심은 역시 배우들이다. 이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다양한 감동을 선사하는 악기가 되고, 사람의 움직임이 짜릿한 전율을 전파하는 박자가 됨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칼군무는 단순한 퍼포먼스를 넘어 작품의 정서를 끌어올리는 장치로 작용한다. 배우들은 무대 한가운데로 몰려들며 빠르고 기괴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시각화한다.

특수효과까지 인간의 감정이 다루는 장치로 활약한다. 달콤한 순간에는 무대를 감싸는 드라이아이스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지만, 갈등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마치 지옥의 화염처럼 돌변한다. 용같이 보이는 거대한 독수리는 위선자들을 노려보는 죽음의 천사들이 보내는 날카로운 경고로 느껴진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무대는 여전히 웅장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그 화려함을 걷어내고 바라보면 결국 남는 것은 한 사람의 삶과 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가장 위험한 사랑…자유를 갈망할수록 가까워진 ‘그’

‘엘리자벳’에서 죽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신과 다르다. 누군가의 생명을 거두러 오는 존재라기보다 ‘죽음 그 자체’에 가깝다. 그래서 죽음은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반대편에서 삶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랑하고 싶고, 자유로워지고 싶고, 자신의 선택대로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결국 죽음이라는 존재를 통해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존재다. 황후라는 운명에 갇힌 그녀가 자유를 갈망할수록 죽음은 가까이 다가온다. 제국과 국민을 위해 복종과 의무를 강요받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엘리자벳에게 죽음은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인다. 두 인물의 관계가 단순한 유혹과 파멸의 관계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엘리자벳의 곁에는 언제나 ‘죽음’이 서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을 가장 뜨겁게 바라보게 만드는 존재로서.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복종이 의무였던 시대…살아 있다는 건 기회, 죽음은 선택

엘리자벳은 황후가 되기 전부터 자유를 꿈꿨다. 공주가 아니었다면 서커스단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틀에 갇힌 삶을 거부했다. 하지만 황후가 된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제국과 국민을 위해 ‘복종’도 ‘의무’라는 억압이 그녀를 옥죈다.

그녀가 괴로워할 때마다 죽음은 끊임없이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 손은 단순히 ‘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유를 원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 손에 가깝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회이고, 죽음은 하나의 선택지처럼 존재한다. 결국 죽음은 엘리자벳의 삶을 집어삼키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엘리자벳은 정신병원에서 정신이상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고 말하는 대목 역시 같은 맥락이다. 모두가 정상이라고 믿는 세계에서 오히려 정상으로 살아가는 일이 더 힘들어진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누가 진짜 정상인지 묻는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 역시 흔들린다.

그래서 ‘엘리자벳’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시선이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상실이 있고,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억압이 존재하며,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결국 작품은 죽음과 삶이 언제나 공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라고 이야기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오는 11월 15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펼쳐진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죽음은 왜 루돌프를 인형처럼 조종했나…소름 돋는 역설

루돌프의 이야기는 엘리자벳과 죽음의 관계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성인이 된 루돌프에게 죽음이 찾아와 ‘그림자는 길어지고’를 부르는 장면에서 죽음은 (저승길로 향하는) 다리 위에서 그를 내려다본다. 손짓 하나로 루돌프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형극 하듯 그의 선택을 조종한다. 이어 ‘죽음의 춤’에서는 죽음의 천사들까지 루돌프를 가지고 노는 듯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엘리자벳이 꿈꿨던 자유는 아들 루돌프에게도 이어진다. 하지만 자유를 외치던 루돌프는 결국 죽음 앞에서 마치 서커스의 곡예사처럼 날아다니고 던져진다. 음악마저 질서 없이 무너진다.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던 인간이 끝내 죽음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는 절대악은 아니다. 작품 속 죽음은 삶을 부정하기보다 삶의 가치를 되묻는다. ‘살려달라’는 외침조차 구경거리가 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작은 관심과 손길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삶을 바꿀 수 있지만, 시선이 두려워 외면하는 순간 결국 자신 역시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고 경고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엘리자벳’ 역 린아·이지혜·이지수, ‘죽음’ 역 카이·서경수·고은성, ‘루케니’ 역 박은태·강홍석·노윤이 여섯 번째 시즌의 항해사로 나서고 있다. 사진 | EMK뮤지컬컴퍼니

◇ 회전문 부르는 ‘9人 9色’…무대 찢은 카리스마에 ‘기절’

‘엘리자벳’ 여섯 번째 시즌은 각 캐릭터 해석으로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한 넘버 속에서도 감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목소리를 갈아 끼우는 배우들의 명창은 단연 돋보인다. 같은 배역이라도 배우마다 매력이 서로 너무도 달라, 새로움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페어별 회전문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엘리자벳의 초상화와 완벽한 싱크로율로 감탄을 자아내는 ‘엘리자벳’ 역 린아는 우아하면서도 강단 있는 카리스마를 뽐낸다. 이지혜는 섬세한 감정선과 깊은 울림, 이지수는 청초한 아름다움과 단단한 내면으로 각기 다른 인물을 완성한다. 특히 1막 마지막 장면 ‘나는 나만의 것’에서는 빛과 함께 꽃단장한 세 배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죽음’ 역 카이는 보컬과 연기력으로 초월적인 존재를 절제된 카리스마로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 ‘젊잖은 섹시’라는 수식어까지 만들어냈다. 서경수는 강렬한 무대 장악력으로 긴장감을 더하면서 특유의 단정함으로 치명적인 로맨티시스트로 변신한다. 은발로 헤어스타일에 힘을 준 고은성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가창력으로 무대를 장악하며 ‘아티스트 실버스타’의 면모를 시각적·청각적으로 구현한다.

극의 시작과 끝을 책임자이자 ‘맑은 눈의 광인’으로 불리는 ‘루케니’ 3인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경력자’ 박은태의 날카로운 연기와 탄탄한 가창력은 오랜 경험과 함께 무대에 완전히 스며들어 인물들을 향한 조롱이 극에 달했다. 강홍석은 독특한 개성과 폭발적인 에너지, 노윤은 젊음과 패기로 다져진 헐벗은 망나니의 광기 등 감각적인 캐릭터 해석으로 관객들과 밀당하며 극에 활력을 더한다.

4년 만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 아네모이아(Anemoia)를 자극하는 ‘엘리자벳’은 오는 11월 15일까지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공연된다.


gio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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