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실로 엮은 대전의 기억…시오타 치하루, 헤레디움서 신작 공개

유선준 2026. 8. 30.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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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문과 주인 잃은 신발 사이로 수없이 많은 붉은 실이 뻗어나간다.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가 대전 원도심을 직접 둘러본 뒤 이곳에 축적된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을 자신의 대표적인 조형 언어인 '실'로 옮긴 신작이다.

함선재 헤레디움 관장은 "시오타 치하루는 붉은 실을 통해 개인의 기억과 사람 사이의 관계, 나아가 세계를 연결해 온 작가"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대전이라는 도시와 헤레디움이 품고 있는 시간 위에 새롭게 엮인 작품을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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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ight of Memory. 헤레디움 제공

Connected to the Universe. 헤레디움 제공

Endless Line. 헤레디움 제공

[파이낸셜뉴스] 낡은 문과 주인 잃은 신발 사이로 수없이 많은 붉은 실이 뻗어나간다. 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교차하고 뒤엉키며 공간 전체를 거대한 그물처럼 뒤덮는다.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가 대전 원도심을 직접 둘러본 뒤 이곳에 축적된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을 자신의 대표적인 조형 언어인 '실'로 옮긴 신작이다.
대전 복합문화예술공간 헤레디움은 30일 개막한 '시오타 치하루: 기억의 빛 속으로'을 내년 2월 21일까지 헤레디움과 아트사이트 소제 두 공간에서 개최한다. 설치와 영상, 실과 유리로 구성한 조형 작품, 드로잉과 자수 연작 등을 통해 작가가 오랫동안 다뤄온 기억과 존재, 부재와 관계의 문제를 살펴보는 전시다.

전시의 중심에는 대전에서 출발한 대형 설치 신작이 놓인다. 시오타는 대전과 소제동 일대를 직접 돌아본 뒤 지역에 남은 시간과 사람들의 흔적을 작품으로 끌어들였다. 설치에 사용된 문은 소제동 옛 철도관사에서 실제 쓰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출입을 허용하거나 가로막았던 문은 작품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경계로 바뀐다.

문 사이에 남겨진 신발도 중요한 소재다. 신발의 주인은 보이지 않지만 사용했던 사람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다. 시오타는 문과 신발을 촘촘한 붉은 실로 연결한다. 서로 다른 장소와 시대에 속했던 사물들은 실을 따라 하나의 구조 안으로 들어온다. 과거를 완결된 시간으로 두기보다 현재의 사람과 사물이 관계를 맺으면서 계속 변하는 기억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문' 역시 시오타의 작업에서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물리적 장치인 동시에 기억 속 장소와 지금 서 있는 장소 사이의 심리적 경계를 나타낸다. 이번에는 대전에서 실제 사용된 문을 가져오면서 개인의 기억을 넘어 한 도시가 품은 역사와 장소의 기억으로 범위를 넓혔다.

한국전쟁에 얽힌 가족의 기억도 작품으로 이어진다. 'Memories Resurface'와 연결되는 설치 작품은 한국전쟁을 경험한 작가의 시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길게 늘어뜨린 흰 실의 장막 위로 과거의 기억을 재해석한 이미지와 영상이 투사된다. 한 개인의 증언이 작가의 시각을 거쳐 현재의 전시장에 다시 나타나는 방식이다. 여기서 기억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자료라기보다 전쟁을 통과한 한 사람의 삶과 상실을 담은 흔적으로 다뤄진다.

종이와 캔버스로 옮겨간 실의 변화도 볼 수 있다. 수용성 왁스 파스텔과 잉크로 작은 인간의 실루엣과 우주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그린 연작에는 실제 실이 더해진다. 화면 안에 머물던 선이 종이 위의 물질로 이어지면서 인간과 외부 세계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드러낸다. 번지고 겹쳐지는 색과 유기적인 형상은 세포와 신경망, 우주처럼 미시적이면서 동시에 광대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자수 연작에서는 대형 설치의 공간적 구조가 캔버스 안으로 압축된다. 가느다란 실이 다른 실과 끊임없이 교차하고 겹치면서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려운 연결망을 만든다. 평면 위에 여러 층으로 쌓인 실은 깊이와 입체감을 형성하고, 설치에서 다뤄온 시간과 관계의 구조를 작은 화면 안으로 옮긴다.

시오타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해왔다. 붉거나 검은 실을 수없이 연결해 공간 전체를 뒤덮는 설치 작업으로 알려졌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기억과 부재처럼 형태를 갖기 어려운 경험을 실과 사물을 통해 물리적인 공간으로 옮기는 작업을 이어왔다. 2015년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일본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러한 작업 방식이 '대전'이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만났다는 점이다. 전시가 열리는 헤레디움 역시 도시의 근현대사를 품고 있다. 1922년 건립된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을 복원한 곳으로,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을 전시·공연 공간으로 바꿔 2023년 공식 개관했다. 또 다른 전시장인 아트사이트 소제가 자리한 소제동 역시 옛 철도관사와 원도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작품 속 문과 신발, 실이 품은 기억이 전시장 바깥의 도시 풍경과 맞닿는 이유다.

함선재 헤레디움 관장은 "시오타 치하루는 붉은 실을 통해 개인의 기억과 사람 사이의 관계, 나아가 세계를 연결해 온 작가"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대전이라는 도시와 헤레디움이 품고 있는 시간 위에 새롭게 엮인 작품을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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