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훈 더봄] "지키자 1만원!"

이진훈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전 영동고 교사 2026. 8. 3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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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훈의 미니픽션]
하루 1만원씩만 들고
탑골공원에서 만나자구
AI로 생성한 이미지 /제미나이 나노바나나

탑골공원에서 4명 짝을 맞춘 노인들은 종로3가역에서 소요산행 전철에 올랐다. 타자마자 자리다툼이 시작되었다. 소요산역까지는 한 시간도 넘는 눈치싸움을 해야 했다. 앞칸 뒤칸 할 것 없이 칠순을 훨씬 넘긴 노인들이 열에 여덟아홉은 됨직했다.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은 아예 자리를 포기하거나 잠든 척하는 것이 상책인 상황이다. 다행히 넷은 상노인 축에 들어 쉽게 자리를 얻어 앉았다. 

자리를 잡자 셋은 오래전부터 안면을 튼 사이라 얘니 쟤니 하며 수다 삼매경인데 오늘 합류한 듯이 보이는 노인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다소곳이 앉아 귀만 쫑긋 세 노인 쪽으로 기울인 채 졸며 깨며 흔들거리며 갔다. 몇 안 되는 젊은이들을 양주역과 동두천중앙역에 내려놓은 전철은 종착역인 소요산역에 지공도사들을 와르르 내려놓았다.

역사 밖 광장은 노인들로 가득했다. 호떡 리어카도 할아버지, 군밤 땅콩 리어카도 할아버지, 식당 주인 역시 호호백발 노인. 노인 천국이 따로 없었다. 자재암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헐벗은 나뭇가지들은 늦가을 하늬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네 노인은 호호백발 노인이 주방장 겸 주인인 곰탕집 안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감, 우리도 주안상 한 상 주소."

강 노인이 소리치자 최 노인은 국물 좀 넉넉히 담으라며 뒤를 받았다. 질세라 권 노인은 '빨간 두꺼비 네 병'이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 한 접시에 뜨끈한 곰탕 뚝배기 넷, 그리고 빨간 뚜껑 소주 네 병이 차려졌다.

비단 네 노인의 상만이 아니었다. 식당을 꽉 채운 노인들의 상마다 메뉴는 똑같이 수육 한 접시에 국물 네 그릇이다. 다만 몇몇 자리에는 화장이 짙은 할머니가 한둘 섞여 앉기도 했다.

"자 우선 한 잔들 합시다. 나는 강길수요. 박 영감이라고 했지요. 임오생 말띠라고 하셨지? 우리 넷은 모두 갑장입니다. 갑장끼리가 말 트기 좋고 제일 편해요."

"예 박두식입니다. 1942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여든다섯이나 먹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에이 갑장! 그냥 트구 지내자구. 나 최영식일세 환영하네. 동두천이나 온양온천이나 넷씩 짝지어 와야 식당에서 1인당 1만원, 총 4만원 내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고. 우리 팀 영감 하나가 얼마 전에 저세상으로 갔어. 그 좋은 데 가려거든 우리 넷이 함께 손잡고 같이나 갈 것이지 혼자 도망을 가. 우린 언제 저세상 가서 세끼 밥걱정 않고 편히 살꼬? 아무튼 그래서 오늘 박 영감이 말띠라고 해서 탑골공원에서 포섭한 것이니 자주 보자고. 주머니에 1만원만 얻어 가지고 나오라고. 좋잖아!"

"최 영감 자네는 선친께서 오래오래 잘 살라고 '길 영(永)자 영식'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면서. 그런데 어쩌자고 '제로 영(零)자 밥 식(食) 자' 집에서 밥 한 끼 못 얻어먹는 영식 씨 신세가 되었나."

"예끼 영감탱이야. 못 얻어먹는 게 아니고 내가 안 먹는 거야, 안 먹는 거! 아들놈도 아침 한 끼 제대로 못 얻어먹고 출근하는데 다 늙은 며느리한테 꼬박꼬박 아침밥 챙겨 달라기가 뭣해서 눈 뜨자마자 빠져나오는 거라구. 아, 메누리 사랑은 시아부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 자네는 영식이님 아닌감? 이 영감 지 꼬라지를 모르네."

권 영감이 박 영감에게 술잔을 건넸다.

"박 영감 당신은 아침 제대로 얻어먹고 나왔어. 우리 셋은 이 점심이 하루 식사야. 탑골공원에서 만나 지하철 공짜로 타고 동두천으로 갔다 온양으로 갔다 하며 노닥거리다가 해질녘 지나 집에 들어가면 돼. 이름하여 지하철 공짜 타고 길 위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지공도사들이란 말이오. 그런데 탑골공원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그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셨소?"

"아침이야 먹고 나왔시다. 얼마 전에 우리 할범 먼저 갔어요. 할멈이 없으니까 영 허전하더만요. 어디 딱히 갈 데도 없고 나 혼자 먹자고 밥하기도 귀찮고. 할멈과 살던 집 한 채 팔아 실버타운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한사코 아이들이 반대합디다. 그래서 애들 뜻대로 집 팔아서 절반은 나를 받아준다는 큰아들을 주고 나머지 절반은 고루 나누어 주었지요. 그리고 나는 큰아들네로 들어갔습니다."

박 영감의 말이 끝나자 세 노인은 모두 입을 맞춘 듯이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아들 집에서 몇 달이나 버틸 수 있을까? 수중에 돈은 좀 챙겨 놓았소?"

세 노인의 말을 귀담아들었는지 말았는지 박 영감은 소주를 한 잔 벌컥 들이켜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박 영감, 눈치로 한평생을 살아왔는데 말 안 해도 우리는 척이지. 일렀거나 늦었을 뿐이지 우리도 다 비슷비슷한 길을 걸어왔다오. 아무튼 하루 1만원씩만 들고 탑골공원으로 나올 수 있는 액수만큼만은 꼭 챙기슈. 하루 1만원이면 지하철 공짜겠다 사방팔방 유람 댕기며 이렇게 노는 것이지. 그것마저 떨어지면 그땐 긴 줄 끝에 서서 덜덜 떨며 무료 급식이나 얻어먹어야 된다구."

한동안 멍하니 바람 드센 소요산 정상을 응시하던 네 노인은 박 영감의 제안으로 술잔을 부딪쳤다.
"지키자 1만원!"

지공도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을 도사에 빗대어 이르는 신조어다. 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주어지는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이용해 온종일 수도권 전철을 타고 소요산·온양온천 등으로 나들이를 다니는 어르신들을 자조적이며 해학적으로 부르는 말이다.

여성경제신문 이진훈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전 영동고 교사
mokleeyd@nate.com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이진훈 작가·교육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EBS와 고등학교에서 오랜 시간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으로 <베이비 부머의 반타작 인생>을 펴냈으며,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사)K문화독립군 부회장 등 다양한 문화 단체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한양도성의 역사와 철학을 담은 저술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양도성 文史哲  순성놀이>를 발간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위원 경험을 바탕으로 <명절 차례와 기제사>를 발간하는 등 전통문화 계승에도 힘쓰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