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은퇴하기엔 너무 젊은데”…67만 ‘쉬었음 중년’의 그늘 [남인숙의 신중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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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세 영철씨는 전자부품 중견기업에서 24년 동안 일했다. 생산직으로 입사해 현장 관리자가 되었고, 퇴직 전에는 협력업체 관리와 납기 조정을 맡았다.
현재 가족은 영철씨의 퇴직금 일부와 급식실 보조 업무를 하고 있는 아내의 급여로 생활하고 있다.
근로 상태에서 바로 은퇴 생활로 들어가는 그들과 달리 우리 사회의 중년들은 주된 경력을 쌓아온 첫 번째 일자리에서 밀려난 후 은퇴하기 전까지 중간 단계의 일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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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취업 문 두드리다 결국 포기…그 이면엔 노동시장의 구조적 이탈
(시사저널=남인숙 작가)
52세 영철씨는 전자부품 중견기업에서 24년 동안 일했다. 생산직으로 입사해 현장 관리자가 되었고, 퇴직 전에는 협력업체 관리와 납기 조정을 맡았다. 그는 회사가 공장을 통폐합하면서 희망퇴직 대상자가 됐다. 사실상 나가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고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그것을 은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경제활동을 접기에는 너무 젊고 대학생인 자식들도 아직 지원이 필요한 시기였다.
퇴직 후 9개월 동안 영철씨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재취업을 알아봤다. 처음에는 비슷한 규모의 제조업체에서 생산관리나 협력업체 관리 업무를 찾았다. 그러나 지원한 회사 대부분은 답이 없었다. 어렵게 면접을 본 곳은 경력에 비해 훨씬 낮은 직급, 열악한 환경에 급여도 이전의 절반이 채 못 되었다.
눈높이를 낮춰 물류센터와 아파트 시설관리직도 알아봤지만 새로 자격증을 따야 하는 조건, 야간 교대근무가 장벽이었다. 경비직 면접에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지원자들과 경쟁했다. 몇 차례 탈락하고 나자 영철씨가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는 횟수는 줄었다. 그사이 실업급여도 끝났고, 따라서 부질없어 보이는 구직활동을 계속할 동기도 사라졌다.
생산직과 물류 쪽으로 단기 아르바이트도 몇 번 해보았지만 원래 있던 허리 통증이 심해져 병원비만 더 들었다. 그렇다고 최저임금 수준의 일을 하면서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면 경력을 살릴 일자리를 찾을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두어 달만 더 찾아보자 생각했지만 이제 그 시간도 반년을 넘어서고 있다. 현재 가족은 영철씨의 퇴직금 일부와 급식실 보조 업무를 하고 있는 아내의 급여로 생활하고 있다. 영철씨는 통계상 '쉬었음 중년'이다.

日·유럽 등은 한국보다 정년 지원 정책 강력
8월19일 국회미래연구원이 발간한 인구통계 브리프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52만9000명이었던 40~59세 쉬었음 인구가 지난해 67만4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동안 정책적으로 관심의 대상이었던 '쉬었음 청년'(60만9000명)에서 눈길을 돌려 '쉬었음 중년'에 초점을 맞춰 데이터를 분석한 보고서라 눈길을 끈다.
한국에서 법적 정년은 60세지만 상당수 근로자가 생애 주된 일자리에서 50대 초중반에 퇴직한다. 사례 속 영철씨의 경우 연금은 65세부터 받는다. 일자리를 잃은 후 10년이 훌쩍 넘는 소득 공백기가 생기는 것이다.
의학의 발달과 생활 수준 향상으로 우리는 전에 없는 '나이 인플레'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의 중년은 30년 전의 중년보다 수십 년은 젊어 보이고 건강하며 생애주기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 20세기 고전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이 40대에 이미 틀니를 끼고 유서를 쓰며 인생의 황혼기를 준비하는 장면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에서는 40대 배우들도 설레는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위화감 없이 묘사된다. 다 같이 젊어진 세상에서 각자가 체감하는 효용감은 줄어들지 않았음에도 직업의 유통기한만 줄어들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사회가 유독 더 크게 떠안고 있는 문제로 보인다. 한국에서 구조조정 대상인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은 다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에선 아직 핵심적인 인력이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60세까지 정년을 채우고 이후 개인의 선택에 따라 65세까지 계약직으로 일할 수 있으며, 독일과 북유럽 선진국들도 한국보다 정년 지원 정책이 강력하다. 고용 유연성이 높은 미국은 일자리가 불안하기는 하지만 정년 개념이 뚜렷하지 않아 중년의 재취업이 특별히 더 어려운 구조는 아니다.
근로 상태에서 바로 은퇴 생활로 들어가는 그들과 달리 우리 사회의 중년들은 주된 경력을 쌓아온 첫 번째 일자리에서 밀려난 후 은퇴하기 전까지 중간 단계의 일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 이전엔 흥하든 망하든 '퇴직금으로 치킨집이라도 차린다'는 공식이라도 있었지만 자영업 붕괴 시대가 오면서 이마저 어려워졌다. 희망 연봉을 낮춰 새 일자리에 도전해 보아도 이미 모수가 커진 시장에서 이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의 정체성 다각화하는 유연성 필요
'그냥 쉬고 있다'는 항목에 응답했다는 이유로 게으름이나 우유부단함이라는 오해를 쉽게 사지만, 통계 안에서 '쉬고 있다'고 분류되는 사람들은 제법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소득이 없더라도 전업주부나 학생이어서는 안 된다. 구직활동을 하지 않아 실업자로 분류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해도 탈락이다. 이 수많은 조건의 이면에는 '좌절'도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상당수는 여러 번 각기 다른 문을 두드려 보다 거절당한 후 문 앞에 서기를 그만둔 사람들이다. 경력이 열리는 시점과 닫히는 시점 양극단에서 수가 늘고 있는 '쉬었음' 인구는 세상이 바뀌는 교차점에서 사회가 앓는 몸살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오늘날 '쉬었음 중년'의 특징은 96.4%가 취업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과거 '무직'으로 통칭하던 한량보다는 구조적 이탈자에 가깝다.
실업자도, 은퇴자도 아닌 이 중년 집단이 조명을 받고 분석의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청년의 '쉬었음'은 미래를 유예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소득도 가장 높고 아직 생산성이 남아있는 중년 계층의 '쉬었음'은 기존 인식의 분류 체계 밖에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층으로 나누거나 대립하는 모두가 그렇듯 이들의 좌절은 사회의 다른 부분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머지않은 미래에 노인 빈곤 문제로 곧바로 이어져 당사자는 물론 사회에 큰 부담을 안겨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쉬었음 중년'이라는 통계에 숫자를 보태지 않는 개인이 될 수 있을까? 사실 경제 성장이 둔화하고 AI가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세상에서 나 하나 부지런해진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격변기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각화하는 것은 가능하고도 유효한 일이다. 이를테면 생애 주된 일자리와 같은 형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일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 다른 시장과 연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동안 쌓은 기술과 경험을 프로젝트와 시간제 노동, 강의와 자문, 작은 사업처럼 여러 형태로 바꾸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러 갈래의 정체성을 만들어 두는 것은 소득원 하나를 잃고 삶의 역할이 증발하는 불운을 막아준다. 당장 수익이 되지 않는 교육 과정에도 가치를 두는 태도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앞만 보며 생산에만 열중하던 삶에서 벗어나 작은 소출만으로도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쉬었음 중년'이 아니다. 정작 한 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채우고 있는 이 숫자가 이제 그만 늘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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