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다귀만 남았다" 인육 괴담까지…생존 위기에 내몰린 광주대단지 사람들 ('꼬꼬무') [종합]

한수지 2026. 8. 2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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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단지 사건의 안타까운 진실과 '인육 괴담' 실체가 드러났다.

2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71년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의 전말이 공개됐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1년 8월 경기도 광주대단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주민 시위로, 서울의 판자촌 철거와 주민 이주 과정에서 누적된 생활고와 토지분양 문제 등이 배경이 됐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인 1971년 6월, 광주대단지 관할 행정기관인 경기도청은 주민들에게 토지대금 납부 고지서를 발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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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포트=한수지 기자] 광주대단지 사건의 안타까운 진실과 ‘인육 괴담’ 실체가 드러났다.

27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1971년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의 전말이 공개됐다.

이날 방송에는 남규리, 윤병희, 이광기가 이야기 친구로 출연해 당시 생존권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던 도시 빈민들의 상황을 되짚었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1년 8월 경기도 광주대단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주민 시위로, 서울의 판자촌 철거와 주민 이주 과정에서 누적된 생활고와 토지분양 문제 등이 배경이 됐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당시 서울시는 대규모 재개발을 추진하며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정비했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한 사업에 따라 판자촌 주민들은 새로운 정착지로 조성된 광주대단지로 옮겨졌다. 문제는 주민들의 이주가 먼저 진행된 뒤 생활 기반시설을 갖추는 방식으로 사업이 추진됐다는 점이었다.

광주대단지는 서울의 판자촌 주민들에게 새로운 주거지를 제공하는 곳으로 홍보됐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시는 이주민들에게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주민들이 실제로 마주한 것은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땅이었다. 수도와 전기 등 기본적인 생활환경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주민들의 반발을 키운 것은 토지대금 문제였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인 1971년 6월, 광주대단지 관할 행정기관인 경기도청은 주민들에게 토지대금 납부 고지서를 발부했다. 당초 약속된 가격은 20평 기준 평당 2천 원이었지만, 실제 고지된 금액은 평당 8천 원에서 1만6천 원에 달했다. 더욱 충격적인 건 당시 서울시는 광주대단지를 평당 120원~400원에 사들였고, 주민들은 67배 넘는 가격에 사게 된 것이다.

더구나 해당 금액은 일시불로 납부해야 했다. 기한 내 납부하지 않을 경우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3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내용까지 고지서에 포함됐다. 당시 주민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당시 현지에서는 극심한 생활고를 보여주는 각종 소문도 퍼졌다. 특히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산모가 자신의 아이를 삶아 먹었다는 이른바 ‘인육 괴담’까지 돌았다. 한 주민은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뼈다귀만 남았다는 거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방송을 통해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한파 속에서 세 살배기 아이가 숨졌고, 이후 아이가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산모가 아이를 먹었다는 괴담으로까지 확대된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들의 분노는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7월 19일 ‘분양지 불하 가격 시정 대책위원회’가 결성됐고, 주민들은 토지 가격을 평당 1천500원 이하로 낮추고 10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하는 한편 영세민 취로사업을 시행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기다리던 양택식 서울시장은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격앙된 주민들은 서울시청 차량을 개천에 밀어 넣고 성남출장소를 파괴했다. 건물과 차량에는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다. 격분한 주민들은 “시장이 안 오면 우리가 대통령을 만나면 된다”며 청와대로 향했다.

경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했고, 주민들은 결국 자진 해산했다. 양택식 시장은 교통 정체 등으로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으며, 사태가 악화하자 면담 장소를 변경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양 시장은 주민 대표들과의 회담에서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광주대단지의 행정구역을 성남시로 승격하고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하면서 사태는 진정됐다.

당시 광주대단지 청년위원장이었던 유협종 씨는 “쉽게 얘기해서 우리는 서울시의 발전을 위해 희생이 된 곳이 여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선 판자촌을 고급 땅으로 만들어서 이익을 본 거다”라고 털어놨다.

남규리는 자신 역시 과거 옥탑방과 반지하, 고시원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다고 밝히며 “폭우가 오면 옥탑방은 물이 내려가질 않았다. 집에 오면 다 둥둥 떠 있을 정도로 열악했다”라고 떠올렸다. 이어 “주거 약자 문제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가 아닐까”라고 전했다.

한수지 기자 / 사진= SBS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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