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인 없으면 공장 멈춘다"… 대만 반도체 장악한 이주노동자들

나광현 2026. 8. 27.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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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세계가 주목하는 '반도체 성공 신화'를 썼다.

대만 전체 반도체 산업 현장으로 넓혀보면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진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내국인들의 차별이나 멸시 같은 건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게 대만에서 만난 필리핀인들의 일관된 얘기였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 업계가 향후 이주노동자에게 문을 연다면, 동남아시아와 가깝고 생활물가가 저렴해 대만을 선택했던 이들이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으로 이동해 올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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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반도체 강국의 명암: 사람이 없다
반도체 패키징 집적 '난쯔'엔 필리핀 거리
저숙련·노동집약 '오퍼레이터' 직무 종사
대만 전자산업 이주노동자 8만4,000명
월 200만 원 전후... 모국엔 넉넉한 금액
한국도 반도체 인력 수요↑... 외국인 올까
편집자주
대만은 세계가 주목하는 ‘반도체 성공 신화’를 썼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 뒤에는 양극화를 비롯한 그늘도 짙다. 한국도 전국에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대하며 대만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한국일보는 대만 현지 취재를 통해 반도체 강국의 두 얼굴을 살펴봤다.
7월 20일 대만 가오슝 난쯔산업단지 인근 필리핀 식당가에 야간 근무를 마친 필리핀 노동자들이 체니 창(오른쪽)의 길거리 음식점에서 필리핀 전통 음식을 구매하고 있다. 가오슝=나광현 기자

7월 20일 오전 7시 30분, 대만 남부 가오슝시 난쯔구의 한 골목 좌판에 필리핀식 도시락과 스파게티가 진열되기 시작했다.좌판 앞마다 수십 명이 줄을 섰다. 골목 안쪽의 필리핀 식료품점 '마부하이 익스프레스'에도 손님이 꽉 들어차 있었다. '마부하이'는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상대를 반기거나 축복할 때 쓰는 인사말이다. '대만 안의 작은 필리핀'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가오슝에 왜 이런 '필리핀 거리'가 생겨났을까. 답은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었다. 오전 7시 30분이 가까워지자 난쯔기술산업공원 북쪽 출입구에서 퇴근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밤샘 교대근무를 마친 직원들이었다. 인파 중 상당수는 필리핀 출신이었다. 어림잡아도 80%는 돼 보였다. 이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곧장 골목 음식점과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난쯔기술산업공원은 세계 최대 반도체 패키징 업체인 ASE 공장 20여 곳을 중심으로 조성된 대만의 대표적인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및 테스트) 및 장비 클러스터다. ASE 외에도 OSE(패키징 및 검사)·윈웨이(반도체 테스트 인터페이스)·창와테크놀로지(리드프레임) 등 관련 기업 80여 곳이 입주해 있다.

필리핀계 물류·송금 업체 LBC익스프레스의 가오슝지점장 체니 창(54)은 "인근에 1만 명 이상의 필리핀인이 살고 있을 것"이라며 "대부분 ASE 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다"고 설명했다. 창은 부수입을 얻기 위해 필리핀 노동자들을 상대로 4년 전부터 사무실 앞에서 길거리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난쯔의 필리핀 거리는 첨단 반도체 산업이 고숙련 엔지니어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규모 생산라인을 가동하려면 장비를 운전하고 생산 상태를 살피는 현장 인력이 필요하다. 대만은 내국인이 선호하지 않는 일부 생산직을 이주노동자로 채우고 있다. 반도체 생산시설을 대폭 늘리고 있는 한국도 대만과 비슷한 인력 수급 문제를 마주할 수 있다.


반도체 산업 받치는 '오퍼레이터' 직군

7월 20일 오전 8시 대만 가오슝 난쯔산업단지 앞 교차로에서 근무 교대 시간에 맞춰 출근하려는 필리핀인 노동자들이 우산을 들고 길을 건너고 있다. 가오슝=나광현 기자

반도체 인력 하면 '고연봉 TSMC 직원'으로 대표되는 고숙련 엔지니어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엔지니어만으로 거대한 생산 공정을 가동할 수는 없다. 엔지니어가 정해놓은 표준 작업 절차(SOP)에 따라 설비를 가동하고 관찰하는 현장 생산직인 '오퍼레이터'도 필요하다.

엔지니어는 초미세 생산 공정을 실시간 추적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 등 고도의 판단을 내려야 하기때문에 공정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요구된다. 하지만 오퍼레이터는 SOP를 따라 착실히 설비를 가동하고, 이상이 생기면 보고만 하면 된다. 엔지니어만큼 높은 수준의 업무를 요구받지 않는다. 특히 ASE 같은 패키징·테스트 후공정 업체의 경우 공정 표준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오퍼레이터 수요가 많다.

하지만 대만인들은 급여가 적은 오퍼레이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ASE의 오퍼레이터는 한 달에 기본급으로 3만 대만달러(약 135만 원)를 받는데, 이는 최저시급을 살짝 넘는 수준이다. 고된 노동 환경도 대만인들이 오퍼레이터를 멀리하는 이유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에 교대 근무가 필수적이다. ASE 오퍼레이터는 '4조 2교대, 12시간 근무'가 원칙이고, 원하면 초과근무도 가능하다. 전통적 '노동집약 산업'의 근무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국인 기피 자리 채운 외국인들

그래픽=송정근 기자

내국인이 기피하는 오퍼레이터 자리를 채운 건 외국인들이다. ASE 팹이 몰려 있는 난쯔공원 일대는 대만에서도 가장 쉽게 이주노동자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대만 경제부 산업원구관리국 소속 홍보담당자 브라이언 황은 "IT 인력난이 심하다 보니 내국인이 선호하지 않는 단순 업무나 현장 중심 일자리는 자연스럽게 이주노동자들에게 의존하게 됐다"며 "현재 난쯔공원에서 일하는 동남아 출신 노동자는 1만4,000명 정도"라고 말했다. 특히 필리핀인은 영어에 익숙해서 선호도가 높다.

대만 전체 반도체 산업 현장으로 넓혀보면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진다. 대만 노동부가 공개한 노동통계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33만6,363명이었던 대만 내 산업이주노동자는 지난해 54만662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부품산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는 8만3,794명인데, 필리핀인 비중이 82%에 달한다.

7월 19일 대만 가오슝 난쯔산업단지 인근 필리핀 식당 '치차필리피노퀴진'에서 필리핀인 노동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가오슝=나광현 기자

오퍼레이터 급여가 대만인들이 보기엔 높지 않지만, 이주노동자들 입장에선 본국 가족을 먹여살리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많이 찾는 필리핀 전통음식점 '치차필리피노퀴진'(Chi-Cha Filipino Cuisine) 사장이자 ASE 오퍼레이터인 멜라이(42)는 "필리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지만, 적당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며 "직장을 구하려고 대만에 왔고, 이곳에서 남편(대만인)을 만나 결혼했으니 만족한다"고 말했다.

난쯔공원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은 개인마다 차이가 난다. 필리핀 노동자들의 송금을 돕는 창에 따르면, 오퍼레이터 직군에서 일하면 초과근무 수당까지 포함해 한 달에 최소 3만 대만달러에서 5만 대만달러(약 225만 원)까지 받는다고 한다. 이들은 보통 소득의 절반가량을 본국에 송금하는데, 1만5,000대만달러(약 67만5,000원)를 보내면 필리핀 돈으로 2만8,000페소 정도다. 이는 필리핀 싱크탱크 IBON 재단이 산출한 '5인 가족이 품위 있게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인 월 2만6,590페소를 웃돈다. 엔지니어로 일하게 되면 10만 대만달러(약 450만 원)까지도 벌 수 있는데, 웬만한 대만인보다도 높은 소득이다.

난쯔공원의 필리핀 노동자들은 대만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입을 모았다. 공원 인근에서 공동 욕실 사용을 감내하면 한 달에 9만~12만 원에 방을 구할 수 있어 주거비 부담이 크지 않고, 의료보험제도도 잘돼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가 붙는다. 멜라이는 "확실히 대만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을 존중해준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내국인들의 차별이나 멸시 같은 건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게 대만에서 만난 필리핀인들의 일관된 얘기였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이주노동자 써본 기업도 '만족'

7월 20일 대만 가오슝 난쯔산업단지 입주 반도체 후공정 기업인 달마전자 공장에서 박창규 달마전자 사장이 한국일보에 이주노동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오슝=나광현 기자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반도체 기업들도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반도체 기판 불량 검사(테스트) 전문업체인 '달마전자'의 박창규 사장은 "우리도 베트남 직원을 최대 한도인 20명을 꽉 채워 쓰고 있다"며 "아주 만족하고 있고, 가능하면 더 뽑아서 쓰고 싶을 정도"라고 했다. 달마전자는 한국 내 대표 반도체 패키징 기업인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의 주요 협력사 중 하나로, 2004년 앰코 사업장이 있는 광주에서 사업을 시작해 2014년 거래처가 있는 가오슝 난쯔공원으로 진출했다.

박 사장은 이주노동자의 장점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근무 열의다. 돈을 벌기 위해 외지로 왔기 때문에 초과근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듯 '전투적으로' 일한다는 게 박 사장 설명이다. 오히려 초과근무가 적으면 불만을 품는 경우가 많아 일감이 적으면 난감할 때가 있다고 했다. 두 번째는 고용 안정성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취업과 연동돼 비자가 나오기 때문에 사업장을 쉽게 옮기지 않는다. 박 사장은 "내국인들은 몇 개월 가르쳐놔도 조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회사가 있으면 금방 그만둔다"고 설명했다.

대만에선 이주노동자 고용을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만의 대표 구인구직 플랫폼인 '104잡뱅크'의 중원슝 수석부사장은 "인력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중년층과 고령층 고용을 늘리고 외국인 인력을 확대하는 것"이라며 "오퍼레이터가 부족한 ASE 같은 반도체 패키징 기업에서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에도 이주노동자 올까

7월 23일 오전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주과학기술원에서 공득조 AI정책전략대학원 부원장 겸 교수가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한국 반도체 업계도 향후에 인력 부족으로 이주노동자들을 필요로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정부 계획대로 충청권에 '첨단 패키징 거점'이 들어설 경우, 이곳에 증설될 팹에서는 난쯔공원과 유사하게 노동집약적 고용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

한국도 대만과 비슷하게 이주노동자들의 존재감이 꾸준히 커지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 내 취업자격 체류 외국인은 59만4,047명이었는데, 이는 2021년보다 20만 명 이상 늘어난 수치다. 다만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건설 현장은 보안을 위해 100% 내국인 노동자를 고용했을 정도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아직 '이주노동자 금지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 반도체 업계가 향후 이주노동자에게 문을 연다면, 동남아시아와 가깝고 생활물가가 저렴해 대만을 선택했던 이들이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으로 이동해 올 가능성도 있다.

공득조 광주과학기술원(지스트·GIST)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 팹이 만드는 일자리가 3만 개 정도라면, 50~60%는 전문학사나 고졸급 인력을 필요로 하는 생산직"이라며 "인구 절벽 상황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를 꾸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오슝= 나광현 기자 name@hankookilbo.com
타이베이=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광주= 문지수 기자 do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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