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을 만나다] 9. 백성기 석공예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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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현무암에 새긴 40년 '진짜 문화'를 갈다 철원 부흥석재에 들어서자 백성기 석공예 명장이 손바닥만 한 현무암 맷돌에 검은 원두를 부었다.
1947년생인 백 명장은 40여 년간 철원 현무암으로 맷돌을 만들어왔다.
간판을 그리며 다져진 조형 감각과 장신구를 만들던 정교함, 음식점 현장에서 터득한 감각은 훗날 맷돌 연구와 현장을 잇는 자산이 됐다.
황해도 장인의 손기술과 북한 평강에서 흘러온 용암으로 형성된 철원의 돌이 접경지역에서 다시 맷돌로 만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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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분쇄 원리 살린 ‘자동 맷돌’ 특허
현무암 특성 살려 세척·관리 편의성 높여
지역 식재료 가공 접목 식품기계로 확장
강원도 초대 석공예 명장 선정 장인 인증
후계자 육성 위한 전술 기반 마련 강조

철원 현무암에 새긴 40년 '진짜 문화'를 갈다
철원 부흥석재에 들어서자 백성기 석공예 명장이 손바닥만 한 현무암 맷돌에 검은 원두를 부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원두가 두 돌 사이로 빨려 들어가며 잘게 갈린 가루가 맷돌 가장자리에 소복이 쌓였다. 명장은 그 자리에서 직접 간 원두로 커피를 내려 취재진에게 건넸다. 예부터 메밀과 콩을 갈던 맷돌이 현대인의 대표 기호식품인 커피를 갈고 있었다.

■돌은 돌아도 곡식은 갈리지 않았다
1947년생인 백 명장은 40여 년간 철원 현무암으로 맷돌을 만들어왔다. 작업실에는 손잡이인 ‘어처구니’를 고정하고 회전을 돕는 쇠축부터 마찰을 줄이기 위해 고안한 부속품, 시대별로 형태가 다른 손잡이까지 연구의 흔적이 수두룩했다.
처음부터 돌을 다룬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극장 간판을 그렸고, 도시로 나가 도장과 장신구를 만들어 팔았다. 고석정 인근에서 음식점도 운영했다. 간판을 그리며 다져진 조형 감각과 장신구를 만들던 정교함, 음식점 현장에서 터득한 감각은 훗날 맷돌 연구와 현장을 잇는 자산이 됐다.
1980년대 초 비어 있던 곡물건조장 건물을 마련한 것이 석재업의 출발점이었다. 낡은 건물을 고치기 위해 돌을 다룰 사람을 찾자 일감을 잃은 옛 장인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는 고향을 북에 두고 철원에 정착한 황해도 출신 장인도 있었다. 백 명장은 이들과 함께 철원 현무암을 쪼개고 정으로 다듬으며 돌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장인들이 떠난 뒤 문제가 생겼다. 돌 두 짝을 맞물려 돌리면 곡식이 갈릴 줄 알았지만, 돌은 그저 헛돌기만 했다. 물어볼 장인도, 제작 원리를 정리한 교본도 없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빗금, 아파트에 맞춰 변한 맷돌
맷돌 안쪽에는 굵고 가는 홈이 비스듬히 뻗어 있다. 윗돌 가운데로 들어온 곡물은 서로 엇갈리는 홈의 모서리에 부딪혀 잘리고, 두 돌의 무게에 눌리고 비벼지면서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굵은 홈은 곡물과 가루가 움직이는 통로가 되고, 그 사이의 작은 빗금은 곡물을 더욱 잘게 간다.
홈의 수와 깊이, 각도가 맞지 않으면 곡식이 제대로 갈리지 않는다. 새 곡물이 들어오면 먼저 들어간 곡물이 바깥으로 밀려나며 가루가 된다. 백 명장은 이 원리에 모터와 투입장치를 결합했다. 두 돌의 무게와 간격, 회전속도와 곡물 투입량을 맞춰 곡물이 들어오고 가루가 되어 나오는 전 과정을 다시 설계했다.
자동맷돌은 사람이 손으로 돌리던 것과 비슷한 분당 35회 안팎으로 회전한다. 고속 분쇄 때 발생하는 마찰열을 줄여 재료의 맛과 향, 영양성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그는 1996년 자동맷돌 특허를 시작으로 다수의 산업재산권을 확보했고, 같은 해 우리농산물식품대축제에 출품해 농림부장관상을 받았다. 맷돌이 사라진 것은 믹서기가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당과 마루가 있던 주거 공간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씻고 말릴 공간도 사라졌다. 돌의 크고 작은 기공에 곡물 찌꺼기가 남으면 실내에서 냄새가 날 수 있었다.
백 명장은 전시품으로만 남아서는 문화를 지킬 수 없다고 봤다. 고령자도 다룰 수 있도록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자동화했다. 철원 현무암 가운데서도 기공이 적고 조직이 치밀한 돌을 골라 세척과 관리가 쉽도록 하면서 전통의 분쇄 원리는 살렸다.
백 명장에게 현무암은 철원의 바탕이다. 수십만 년 전 현재 북한 평강 일대에서 분출한 용암이 철원평야와 한탄강 유역으로 흘러 용암대지를 이뤘다.

■100% 메밀에서 커피와 밀까지
과거 음식점 운영 경험은 자동맷돌을 식품기계로 발전시키는 바탕이 됐다. 강원도 곳곳에서 막국수를 팔지만 이미 가루로 공급받으면 실제로 100% 메밀인지 음식점주와 소비자가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다. 통메밀을 직접 갈면 원료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손맷돌로 필요한 양을 생산하기는 어렵다. 백 명장은 회전속도에 맞춰 메밀을 일정하게 투입하고 곱게 가는 자동맷돌을 개발해 제분 공정을 줄였다. 원료를 직접 확인하면서 음식점에서 필요한 양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맷돌의 쓰임은 커피로 넓어졌다. 그는 전문가들과 원두에 맞는 돌의 간격과 회전속도를 조정해 커피 전용 자동맷돌을 개발했고, 2017년 정부조달문화상품 공모전 대상을 받았다. 현재는 빵과 면에 사용할 밀 전용 맷돌의 활용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극장 간판과 장신구 제작 경험은 형태와 돌의 조직을 읽는 눈을 길러줬고, 음식점 운영은 현장의 필요를 파악하게 했다. 이제 그는 교수와는 맷돌의 역사와 구조를 논하고, 시장 상인과는 필요한 가루의 굵기와 생산량을 이야기한다. 전통의 원리와 현장의 필요를 잇는 장인이 됐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진짜의 문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서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왜 없었겠느냐”며 웃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요. 나는 알고 있었고, 그 단계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 확신은 해외에서 먼저 목격한 식문화에서 비롯됐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제대로 만든 먹거리가 이미 문화로 대접받고 있었고, 동남아에서도 맷돌이 생활도구로 남아 있었다. 해외에서 확인한 변화는 지역의 재료와 전통적인 방식이 다시 가치를 얻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굳혔다. 그 믿음은 기술 전승으로도 이어졌다. 백 명장은 아들 백재현 씨에게 맷돌의 가치를 이어달라고 부탁했다. 2013년 강원도기능경기대회 석공예 부문에 함께 출전해 아들은 금메달, 아버지는 동메달을 받았다. 이제 그는 아들을 자신만의 신념을 세운 동료 기술인으로 인정한다.
2019년 강원도 초대 석공예 명장으로 선정된 그는 장인이 기술을 가르치고 후계자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지역에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친 백 명장은 “동네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인사를 오기로 했다”며 자리를 정리했다. 어느덧 마을의 어른이 된 그는 여전히 맷돌을 돌린다.
“진짜가 문화가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의 맷돌이 오래전부터 내다본 ‘진짜의 문화’를 오늘날의 식탁으로 끌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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