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진화가 만든 시스템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

인체는 평균적으로 약 38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세포의 핵 속에는 인간의 유전 정보를 담은 약 30억의 DNA 염기쌍이 들어 있고, 여기에는 2만여개의 유전자가 담겨 있다. 유전자 코드에 따라 만들어진 단백질들은, 다양하게 접히고 꼬이고 가공되면서 결국 수십만으로 증폭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다.
그런데 매번 단백질을 만들 때마다, 다 펼치면 1.8m나 되는 DNA를 모두 세포핵에서 끄집어내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DNA 자체는 세포핵 속에 그대로 두고, 일부만 베껴 사용하곤 한다. 세포에서 일어나는 DNA 정보 필사는 전사(轉寫·transcription)라 하는데, 말 그대로 옮겨서(轉) 베낀다(寫)는 뜻이다. 책을 필사할 때는 종이와 펜을 쓰지만, DNA 정보를 전사할 때는 mRNA를 이용한다. 유전자 필사본인 mRNA는 세포질에 위치하는 단백질 생성공장인 리보솜으로 이동하고, 리보솜은 mRNA에 새겨진 정보를 바탕으로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리보솜에 실제 단백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DNA가 아니라 mRNA인 것이다.
과학자들은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세포에서 새로운 단백질을 만들어내게 하려면 DNA로 이루어진 유전자 자체를 넣어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제 단백질을 생성하는 정보를 직접 전달하는 건 mRNA였다. 그렇다면 mRNA만을 넣어주어도 원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의문은 2020년 12월 등장한 코로나19 백신으로 처음 가시화됐다. 코로나19 백신은 mRNA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백신이었으며, 이는 mRNA라는 이름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요란하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mRNA가 최근 다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모더나와 MSD가 개발한 mRNA 기반의 4세대 항암제인 ‘인티스메란 오토진’, 이른바 ‘항암백신’으로 말이다.
외부에서 병원체가 유입돼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과는 달리, 암세포는 원래 내 몸의 일부였던 정상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변질되며 생겨난다. 따라서 항암제 개발의 역사는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구분하는 방법을 정교화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mRNA 항암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암세포가 가진 네오항원(neoantigen)을 이용한다. 암세포는 약물, 산화스트레스, 노화, 방사선 등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DNA의 일부가 사라지거나, 중복되거나, 다른 것으로 바뀌는 과정이 누적되면서 만들어진다.
DNA가 바뀌었기에 암세포는 정상세포에는 없는 변형단백질, 즉 네오항원을 만들어내게 된다. 암세포의 네오항원은 암세포에 일어난 돌연변이의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지만, 어쨌든 정상세포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네오항원들은 암세포만을 골라 타격하는 면역세포들에는 좋은 타깃 포인트가 된다. 이에 따라 암세포들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네오항원들을 숨기고 감추어 면역세포의 눈을 피하려 한다.
현재 개발된 mRNA 기반 항암제는 암세포의 네오항원에 대한 유전 정보를 담은 mRNA로 만들어진다. 환자의 암세포와 정상세포의 DNA를 비교해 암세포에만 있는 돌연변이 네오항원을 여럿 찾아낸 뒤, 이들의 유전 정보를 mRNA에 담아 환자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체내에 유입된 mRNA가 만들어낸 네오항원을 통해 암세포의 타깃 포인트를 학습한 면역세포들은 암세포를 더 쉽게 구별하고 더 빠르게 제거한다. 암세포만을 세포 단위로 정밀하게 골라 제거하기에 흔히 항암제 하면 떠올리는 부작용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환자 개인의 암세포를 분석해 제작하기 때문에 맞춤형 치료도 가능하다.
하지만 암세포를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암을 예방한다기보다는 이미 암이 발병한 환자에게서 재발을 막는 것에 더 가깝다. 최근 임상실험 결과 역시도,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발병했던 환자들을 대상으로 재발과 전이를 억제하는 효과를 실험한 것이었다.
‘항암백신’이란 단어가 주는 희망과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현재 대부분의 암 환자가 초기 원발암이 아니라 재발암 혹은 전이암으로 사망하는 현실에서 암의 재발과 전이를 막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이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우리 몸이 원래 가지고 있던 면역 기능을 활용하는 것으로, 수십억년에 이르는 생물의 진화가 만들어낸 생체 조율 시스템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오요안나 사건’ 후 계약 종료된 MBC 기상캐스터, 부당해고 인정
- ‘오겜’ 황동혁 감독, 이병헌 주연 영화 ‘케이오 클럽’으로 스크린 복귀
- “영화로 일본 사회에 폭탄을 던지고 싶었다”···‘핑크 영화’ 찍던 여성 감독, 가네코 후미
- “성소수자 의뢰인 만나고 싶어서”···대형 로펌에서 퇴사하고 웹툰 만드는 ‘이쪽 변호사’
- 엔비디아, 분기 매출 133조원 ‘신기록’…젠슨 황 “AI는 지금 변곡점”
- “지진인 줄 알았는데 빙하 붕괴”…10년 전부터 지구가 보낸 경고 [이윤정 기자의 소소월드]
- 쇼핑하고 건강 챙기고··· 서울 찾은 외국인 한달에 1조원 넘게 썼다
- 장미란씨 실종 허위 종결 경찰관, 한 달 뒤 경찰청장 표창도 받았다
- ‘저 등산가방은!’···퇴근길에 종일 수색했던 실종자 행색 한눈에 알아본 소방관
- 서울대공원이 경남 합천 농수로에 ‘금개구리’ 100마리 푼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