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폭넓은 독서 요구 서·논술형 수능, 어설픈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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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개편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대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논술형 수능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의 정합성도 분명하게 확인해야 하고 서·논술형 수능의 공정성·객관성·정확성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데 서·논술형 수능의 방향을 던져놓은 국가교육위원회가 믿는 것은 오직 '폭넓은 독서'와 '인공지능(AI)'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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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개편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시작은 지난 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교육부 하반기 업무보고였다. 차정인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서·논술형 문항을 도입하고 전 과목에 절대평가를 적용하는 중장기 개편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보고로 끝낸 일도 아니었다. 곧바로 11일부터 지역 순회 형식의 ‘현장토론회’도 잇달아 개최하면서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일 전남·광주 현장토론회에서는 국가교육위원회 관계자가 개편안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엇박자를 놓기도 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개편의 방향이 아니라 그 방향을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당장 교육계가 쪼개졌다. 객관식 포기를 두 손 들고 반기는 환영의 목소리도 있고 새로 등장하는 서·논술형이 학교 교육을 망칠 것이라는 비관적인 목소리도 있다. 사교육 시장은 표정을 관리하면서 말을 아끼고 있다.
서·논술형 시험의 준비는 역시 자신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에 들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미 일부 사교육 시장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을 공략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는 소문도 있다.
그동안 교육 정책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고 알려진 이재명 대통령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대입 제도 개편은 너무 예민하다”면서 “대입 제도를 손대고 칭찬받은 선례가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현행 객관식 수능은 “어른들의 채점 편의를 위해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것”이고 빠르게 실현되고 있는 ‘AI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진흙이 가라앉아 있는 우물을 함부로 휘젓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있었다.
● ‘짝퉁 수능’은 폐지해야
분명히 해둘 사실이 있다. 현재의 5지 선다형 수능이 한계에 도달한 것은 인공지능(AI)의 등장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수능이 스스로 만들어낸 모순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문제가 모두 공개되고 출제 범위가 ‘교육과정과 교과서’로 제한된 상황에서는 객관식 출제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이 현재 수능의 위기를 이해하는 진짜 열쇠다. 그동안의 모든 기출문제와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모든 참고서에 실려 있는 문항을 수능에 활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객관식 문항을 만들어내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학생들의 수학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지난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교육과정의 내용을 축소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출제할 수 있는 범위가 극단적으로 좁아진 현실에서 출제위원이 선택할 수 있는 출구는 하나뿐이다.
문항의 표현을 난해하게 만드는 일이다. 소위 ‘극단적으로 꼬인 수능 문항’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수십 년의 연구 경력을 가진 과학자가 수능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제쳐두고 AI 시대를 들먹이는 것은 무의미한 궤변일 뿐이다.
현재의 수능은 1994학년도에 학생들에게 ‘학력고사’의 폐해를 극복하고 대학 교육에 필요한 통합교과적 수학 능력을 평가하겠다면서 화려하게 도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수능은 학생들에게 암기식 교육을 강요했던 과거의 ‘학력고사’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짝퉁 수능’이다.
선택과목이 40개를 넘고 통합교과적 출제는 국어에만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입 취지와 현실의 간극이야말로 이번 개편이 단순한 손질이 아니라 근본적인 재설계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수능 첫해부터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불거져 왔던 ‘난이도 조절 실패’와 ‘출제 오류’도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로지 출제위원과 검토위원의 ‘경험’과 ‘감’(感)에 의존하는 난이도 예측은 사실상 비현실적인 억지였다.
지난 34년 동안 해마다 반복해서 확인된 명백한 사실이다. 그동안 수험생이 실제로 체감하는 난이도를 확인하기 위한 시도는 전혀 없었다. 사실 수능 문제가 모두 공개되는 상황에서 개별 문항의 난이도 확인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현재의 수능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수능 성적과 대학 진학 이후의 학업 성취도 사이에서 의미 있는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상위권 대학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수능이 평가하는 것은 학생의 통합교과적 수학 능력이 아니라 문제 풀이 훈련에 투입할 수 있는 학부모의 재력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수능을 뿌리부터 바꿔야 하는 진짜 이유다.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2028학년도부터는 현재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고교학점제를 핑계로 사회와 과학의 출제가 고등학교 1학년의 통합사회·통합과학으로 제한된다. 출제 범위가 더욱 좁아진 사회·과학의 객관식 출제는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의 심화 사회·과학이 학교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도 걱정이다.
● 서·논술형이 성공하려면
더 이상의 객관식 수능 출제가 불가능한 현실에서 서·논술형이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대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논술형 수능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의 정합성도 분명하게 확인해야 하고 서·논술형 수능의 공정성·객관성·정확성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데 서·논술형 수능의 방향을 던져놓은 국가교육위원회가 믿는 것은 오직 ‘폭넓은 독서’와 ‘인공지능(AI)’뿐이다. 학교 교육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관심도 찾아볼 수 없고 실질적인 준비도 없다. 수능의 공정성·객관성·정확성에 대한 학생·학부모·대학의 우려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준비 없는 대안은 대안이 아니라 또 다른 환상일 뿐이다.
초·중·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이미 과중한 독서 교육의 부담에 짓눌리고 있다. 단순히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적성과 미래 진로에 맞는 책을 체계적으로 선택해야만 하고 교사에게 그 결과를 알려서 학생부에 기록으로 남도록 해야 한다.
여유가 있는 학부모는 사교육 시장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문해력·독서 논술·사고력 글쓰기와 같은 화려한 이름의 사교육이 판을 치고 있다. 학생들의 과중한 독서 교육의 부담은 출판 시장에서도 확인된다. 초·중·고등학생을 위한 얄팍한 ‘고전’과 ‘사회·과학 교양서’가 넘쳐나고 있다. ‘폭넓은 독서’를 대안의 전부로 내세우는 순간 새로운 사교육·출판 시장이 날개를 달게 될 뿐이다.
서·논술형 수능의 공정성·객관성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창의적 사고력을 평가하겠다고 도입하는 시험이 오히려 객관식보다 더 획일적인 교육을 부추길 수 있다. 교육 당국이 채점의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요구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일관된 채점을 위해 필수 키워드의 유무, 논증 단계의 개수 등을 평가하는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채점 기준표가 꼭 필요하게 된다. 자칫하면 서·논술형 수능이 ‘문장으로 쓰는 객관식’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미 학교 현장의 서술형 평가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학생은 자기의 생각을 논리적·체계적으로 전개하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모범 답안의 핵심어를 암기해서 적절하게 배치하는 요령을 배우고 있다. 형식만 바뀐 ‘짝퉁 수능’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
인공지능(AI) 채점도 무작정 믿을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AI의 채점 방식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 학교 교육을 무력화시키는 요인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 분명하다. 채점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될 AI의 채점 결과에 대한 이의 제기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진다.
이제 공은 국가교육위원회로 넘어갔다.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 치르게 될 2033년의 수능 개편을 당장의 의제로 선택한 것은 다행이다. 그렇다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34년 만의 수능 개편을 위해 국가교육위원회가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개최하는 설익은 ‘현장토론회’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수능 개편이 얼마나 중차대한 과제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서·논술형 수능의 도입은 현재 객관식 수능에 적응하고 있는 초·중·고등학교의 교육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
과연 다양한 인재를 길러내야 하는 21세기에 수능과 같은 국가 단위의 획일적인 평가가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논술형 수능 이외의 대안은 정말 없는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시 강조한다. ‘폭넓은 독서’에만 신경 쓰면 학생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는 환상은 국가교육위원회 위원들에게나 설득력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순진하고 어리숙한 환상에 넋을 놓을 학생도 없고 학부모도 없다.
통합교과적 수학 능력을 평가하겠다는 수능을 ‘학력고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짝퉁 수능’으로 변질시킨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뼈를 깎는 반성이 필요하다. 오로지 개혁을 위한 개혁을 핑계로 우물물을 흙탕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필자 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 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3200여 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질병의 연금술》《지금 과학》을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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