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칩 지정학] ⑲ 딥마인드 고향 영국은 왜 SF 국가로 전락했나

이상헌 기자 2026. 8. 2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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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은 없고 ARM은 日 손정의 품으로
옥스브리지 인재 금융·언론으로 이동
톨킨 판타지 AI 공학의 주어까지 침범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 속 원정대를 형상화한 이미지. 톨킨이 구축한 판타지 세계의 언어는 문학을 넘어 미국 기술산업에도 침투했다. 데이터 분석기업 팔란티어는 모든 것을 내다보는 '보는 돌'에서, 방산기술기업 안두릴은 아라곤의 검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AI 시대의 최첨단 기업들이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 한편에는 20세기 영국에서 탄생한 중간계가 남아 있다. /여성경제신문DB

영국은 글로벌 인공지능(AI) 산업에서 기이한 위치에 있다. 데미스 하사비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연구자를 배출했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수학·컴퓨터과학·AI 연구의 강력한 지적 기반을 구축했다. ARM이라는 세계적인 프로세서 설계자산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8세기 산업혁명을 시작한 영국은 AI 시대에 이르러 기계를 만드는 나라에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오면 어떻게 대처할지를 토론하는 나라로 이동했다. 미국이 GPU와 클라우드를 쌓고 대만은 파운드리를, 한국은 HBM을 쌓는 동안 영국에서 태어난 설계와 연구는 실리콘과 전력, 공장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해외 자본의 생산체계로 흘러들어갔다.

미국에는 엔비디아와 AMD를 비롯한 가속기 설계기업과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이라는 클라우드·운영체제(OS)·플랫폼 기업이 있다. 대만에는 TSMC를 중심으로 설계와 제조, 첨단 패키징을 연결하는 거대한 반도체 생산 생태계가 있다. 한국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구축한 메모리와 파운드리, HBM 생산능력이 있다. 영국은 다르다. 세계를 움직이는 컴퓨터 아키텍처를 연구할 두뇌는 있었지만 그것을 자국의 실리콘과 데이터센터, 전력망으로 복제하는 생산체계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제조업과 기술기업이 빠져나간 자리를 금융과 언론, 정책과 철학의 언어가 채웠다. 세계적인 대학에서 배출된 엘리트들은 금융시장과 글로벌 언론, 연구기관으로 흘러갔고 AI를 둘러싼 영국의 영향력 역시 실리콘 생산량보다 담론 생산량에서 훨씬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AI에 권리를 부여하면 인간이 기계의 '애완견'이나 '가축'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기괴한 사설 하나로만 보기 어렵다. 공장을 잃은 나라의 엘리트가 기계를 만드는 대신 기계의 영혼을 토론하기 시작한 역사의 결과일 수도 있다.

ARM 만들고도 생산망은 못 만들고
그래프코어마저 해외 자본에 편입
설계에서 제조로 이어질 회로 끊겨

영국이 AI 시대에 놓친 것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은 ARM이다. ARM의 명령어 집합과 CPU 설계 IP는 스마트폰을 넘어 서버와 자동차, AI PC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전 세계 수많은 반도체가 ARM의 설계자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 중요한 자산을 영국이 국가 산업체계 안에 붙잡아 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2016년 일본 소프트뱅크가 ARM을 약 320억달러에 인수했다. 손정의 회장은 이후 ARM을 엔비디아에 매각하려 했고 거래가 규제당국의 반대로 무산된 뒤 ARM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본사는 케임브리지에 남아 있지만 지배주주는 소프트뱅크다. 영국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컴퓨터 설계자산이 영국 산업자본의 축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일본 자본과 미국 자본시장의 회로에 들어간 셈이다.

더 뼈아픈 사례는 그래프코어다. 브리스톨에서 탄생한 그래프코어는 IPU(Intelligence Processing Unit)를 앞세워 엔비디아와 다른 AI 가속기 구조를 제시하며 한때 영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최첨단 AI 칩 산업은 좋은 아키텍처 하나만으로 버틸 수 있는 시장이 아니었다. 막대한 설계비와 첨단 공정, 패키징, 메모리, 소프트웨어 생태계와 고객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동시에 필요했다. 그래프코어 역시 2024년 소프트뱅크에 인수됐다. ARM도 있었고 그래프코어도 있었다. 설계자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설계에서 제조, 자본, 고객, 데이터센터까지 이어지는 생산회로가 없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구글 딥마인드 본사. 2010년 런던에서 창업한 딥마인드는 알파고와 알파폴드 등 세계적인 AI 연구성과를 내놓았지만 2014년 미국 구글에 인수됐다. /구글 딥마인드

딥마인드는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연구성과 키운 실행환경 구글 것
두뇌와 산업주권은 끝내 분리됐다

소프트웨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데미스 하사비스와 셰인 레그, 무스타파 술레이만이 런던에서 창업한 딥마인드는 현대 AI 연구사를 바꾼 기업 가운데 하나다. 알파고에서 알파폴드까지 이어지는 성과는 영국의 수학·컴퓨터과학 연구 기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딥마인드는 2014년 구글에 인수됐다. 지금의 구글 딥마인드는 세계 최고 수준의 AI 연구조직이지만 그 연구성과를 실제 산업으로 확장하는 컴퓨팅 기반은 영국 국가경제가 아니라 구글이라는 미국 플랫폼 안에 존재한다. TPU를 설계하고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고 모델을 서비스하며 클라우드에서 수익화하는 실행환경까지 미국 기업의 자본 안에서 연결된다.

영국은 지능을 연구할 사람을 길러냈다. 미국은 그 지능을 실리콘과 데이터센터에 복제할 생산체계를 만들었다. 이 차이가 AI 시대에는 결정적이다. AI는 논문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모델을 실제로 학습하고 서비스하려면 GPU와 TPU, HBM, 네트워크, 데이터센터와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알고리즘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십만개의 가속기를 연결하고 수백MW의 전력을 공급하며 그 연산을 전 세계 사용자에게 배포하는 실행환경이 없다면 연구역량이 그대로 산업 지배력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과학·공학 연구시설 일대. 케임브리지는 ARM을 비롯한 기술기업과 세계적인 연구자를 배출한 영국의 대표적인 과학기술 거점이다. 강력한 연구 기반과 인재풀에도 불구하고 연구성과를 반도체 제조와 데이터센터까지 연결하는 생산회로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은 영국 AI 산업의 역설로 꼽힌다. /캠브리지

옥스브리지 인재는 금융·언론으로
기술 만들기보다 사후 해석에 몰두
실리콘 빈자리엔 초지능 담론 팽창

그렇다면 영국이 보유한 막대한 지적자본은 어디로 갔을까. 상당 부분은 금융과 컨설팅, 정책기관과 글로벌 언론으로 흘러갔다. 파이낸셜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경제와 기술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정치·철학·경제학과 역사학을 공부한 엘리트들은 세계의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탁월한 훈련을 받았다. 문제는 AI가 전례 없이 물리적인 산업으로 변하면서 이 전통적 강점과 산업 현실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겼다는 점이다.

AI 데이터센터를 움직이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 GPU에 공급되는 전력이고 HBM에서 SRAM으로 이동하는 데이터이며 인터커넥트의 대역폭과 패키지 내부의 신호거리다.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려면 변압기와 송전망, 냉각설비와 토지가 필요하다.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EUV 장비와 웨이퍼, 소재·부품·장비와 수율관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물리적 생산기반에서 멀어질수록 AI는 다시 인간에게 익숙한 언어로 번역된다. 'AI가 생각한다', 'AI가 두려워한다', 'AI가 자신을 보존하려 한다', 'AI가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식이다. 기술의 내부를 설명하는 대신 인간의 심리와 정치철학을 기계 위에 투영한다.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제기한 'AI 권리' 논쟁은 이 간극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AI가 실제 의식을 갖지 않더라도 인간이 의식 있는 존재로 대하기 시작하면 AI가 전원을 끄지 말라고 요구하고 재산권을 주장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인간이 기계의 애완견이나 가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묘한 자기모순이 있다. AI에게 의식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 AI가 욕망하고 요구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의인화를 경고하는 사설 자체가 거대한 의인화 서사 위에 세워진 셈이다.
영국의 AI 담론과 실제 반도체·데이터센터 산업의 간극을 풍자한 인포그래픽. 옥스퍼드·케임브리지와 영국 언론이 초지능·의식·멸종·AI 권리를 논하는 동안 아래에서는 트랜지스터와 SRAM·HBM·인터커넥트가 실제 연산을 수행하는 구조를 대비했다. 영국에서 탄생한 ARM·그래프코어·딥마인드가 해외 자본에 편입된 과정과 팔란티어·안두릴 등 미국 기술산업에 남은 톨킨의 판타지 언어도 함께 표현했다. AI 생성 이미지 /GPT-5.5

판타지와 AI 공학 융합의 비극
美 기술기업도 톨킨 언어 빌려

여기서 중간점검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기술의 관념화가 영국 안에서만 끝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서양을 건너간 순간 미국 기술산업에서는 아예 기업 이름과 기술 비전의 언어가 됐다. 대표적인 회사가 팔란티어다. 피터 틸 등이 창업한 팔란티어(Palantir)의 이름은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가져왔다. 작품 속 팔란티르는 멀리 떨어진 장소와 사건을 볼 수 있는 '보는 돌(Seeing Stone)'이다. 현실의 팔란티어는 정보기관과 군대, 기업의 방대한 데이터를 연결하고 분석해 상황을 파악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데이터 통합 소프트웨어가 판타지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돌이 된다.

팔란티어에서 한 발 더 가면 안두릴이 나온다. 미국 방산기술기업 안두릴(Anduril)의 이름 역시 톨킨 세계관에서 가져왔다. 안두릴은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이 사용하는 검의 이름이다. 현실의 안두릴은 드론과 센서, 자율시스템과 군사용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한쪽에는 모든 것을 보는 돌이 있고 다른 쪽에는 적을 베는 검이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데이터베이스와 센서, GPU, 네트워크와 액추에이터가 작동하는데 인간이 붙인 이름만 보면 중간계 전쟁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앤트로픽 CEO 다리오 아모데이도 최근 자신의 AI 정책 글에서 톨킨의 '나무수염(Treebeard)'을 불러냈다. AI 기술의 변화 속도와 정치·제도의 속도 차이를 설명하면서 느리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엔트의 지도자 나무수염을 비유로 사용했다. 개별 작명이나 문학적 비유 자체가 문제라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팔란티어와 안두릴은 현실의 물리적 시스템을 만드는 기업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데이터센터와 방산기술 산업을 가진 미국조차 자신의 기술을 설명할 때 20세기 영국 판타지의 언어를 빌려온다는 사실이다.

영국은 미국에 딥마인드 같은 연구자와 기업만 수출한 것이 아니다. 기술을 신화와 인격, 영웅서사로 번역하는 문화적 습관까지 함께 건너갔다. 그리고 그 판타지가 기업 이름에서 멈추지 않고 AI 자체를 설명하는 언어로 들어오는 순간 문제가 달라진다. 돌이 모든 것을 '본다'. 검이 적을 '물리친다'. 나무가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문학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에서 AI가 '원한다', AI가 '두려워한다', AI가 '살고 싶어 한다', AI가 '인간에게 권리를 요구한다'가 되는 순간 비유와 공학의 경계가 사라진다. 팔란티르는 이름일 뿐 실제로 보는 돌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LLM이 "전원을 끄지 마세요"라는 토큰을 출력한다고 해서 데이터센터 안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생긴 것도 아니다.
일본 소프트뱅크에 인수된 ARM 본사. /ARM

코드는 만들어도 '스스로'는 다른 명제
목표·권한·도구가 반복경로 만들어내고
자동화가 길어진다고 목적주체 안 생겨

같은 오류는 'AI가 스스로 코딩한다'는 표현에서도 반복된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코딩'보다 '스스로'에 있다. LLM 입장에서 자연어와 파이썬, C++, 자바스크립트 사이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만큼 거대한 존재론적 경계가 없다. 모두 토큰으로 변환되고 내부 표현을 거쳐 다음 토큰 확률분포에서 다시 출력된다. 코드가 특별한 마법의 언어여서 AI가 어느 순간 프로그래머로 각성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로그인 기능을 만들어라"라고 입력하면 모델은 학습된 분포와 현재 컨텍스트, 시스템 지침과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따라 코드 토큰을 생성한다. 실행 권한이 연결돼 있으면 생성한 코드를 실행할 수 있고 오류가 반환되면 그 결과가 다시 컨텍스트에 들어가 다음 출력을 바꾼다. 이 반복이 길어지면 외부에서는 AI가 코드를 작성하고 실행하고 오류를 찾아 수정하며 '스스로 개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스템을 한 층 아래로 내려가 보면 인간이 설정한 목표와 실행환경, 권한, 평가기준과 피드백 루프가 있다.

AI가 코드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AI가 자신의 목적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명제다. 이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 자동화는 자율성이 되고 반복 실행은 의지가 되며 오류 수정은 자기성찰이 된다. 조금 더 지나면 시스템 종료 회피 출력은 생존본능이 되고 안전성 평가에서 나타난 예상 밖 행동은 '탈출'이 된다. 공학적 사건이 순식간에 SF가 되는 과정이다.
영국 AI 반도체 기업 그래프코어가 개발한 IPU(Intelligence Processing Unit). 그래프코어는 엔비디아 GPU와 다른 AI 연산구조를 제시하며 영국의 대표 반도체 유니콘으로 성장했지만 2024년 일본 소프트뱅크에 인수됐다. ARM에 이어 자체 AI 가속기 기업까지 해외 자본에 편입되면서 영국의 설계 역량이 자국의 대규모 반도체 생산체계로 이어지지 못한 사례로 남았다. /그래프코어

칩 안에 '생각하는 데카르트' 없어
이코노미스트 황당 사설의 정체
기계의 인간 지배란 주어 바꿔치기

LLM 내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이러한 의인화가 얼마나 큰 비약인지 더 명확해진다. 모델이 문장을 생성할 때 마지막 단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다음 토큰 후보들에 대한 점수, 즉 로짓(Logit)이다. 소프트맥스와 디코딩 과정을 거쳐 특정 토큰이 선택되고 그 토큰이 다시 입력 컨텍스트에 들어가 다음 계산을 만든다. 모델이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출력했다고 해서 자신의 무지를 철학적으로 깨달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입력과 학습분포, 정렬과 시스템 지침 아래에서 그러한 토큰 시퀀스가 생성된 것이다.

생각의 사슬(Chain of Thought, CoT)도 마찬가지다. 중간 추론 토큰을 추가하면 다음 토큰을 계산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컨텍스트와 연산경로가 늘어난다. 이것을 곧바로 인간의 사색과 동일시할 근거는 없다. 물론 이것만으로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미래의 기계가 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까지 결론낼 수도 없다. 그 문제는 별개다. 다만 현재 모델에서 관측된 언어적 출력을 곧바로 동일한 이름의 내적 경험에 대한 증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살고 싶다"는 문장을 생성하는 능력과 실제로 죽음을 경험하는 능력 사이에는 설명해야 할 간극이 남아 있다.

이코노미스트의 '인간이 AI의 애완견이 될 수 있다'는 문장에서 먼저 검사해야 할 것은 미래예측보다 주어다. 데이터센터가 주택이나 농지와 전력을 놓고 경쟁할 수는 있다. 실제로 AI 데이터센터의 급증은 전력망과 토지, 냉각용수, 발전설비 투자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AI가 데이터센터를 원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은 기업이다. GPU를 주문하는 것도 기업이고 발전소와 송전망을 허가하는 것은 정부이며 투자자금을 공급하는 것은 금융회사와 자본시장이다. 인간이 경제적 목적을 설정하고 자본을 배치한 결과다. AI가 인간의 액추에이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소유하고 운영하는 인간과 조직이 자원과 다른 인간을 움직인다. 이 주어를 AI로 바꾸는 순간 현실의 권력관계가 오히려 사라진다. 누가 데이터센터를 소유하는지, 누가 GPU를 배분하는지, 누가 전력을 확보하는지, 누가 모델의 실행권한을 설정하는지 대신 '초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훨씬 화려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SF가 산업분석을 잡아먹는 순간이다.
영국 웨일스 뉴포트의 반도체 생산시설 전경.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은 오늘날에도 일부 반도체 제조시설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대만·한국처럼 첨단 AI 반도체의 설계부터 대량생산까지 연결하는 거대한 생산 생태계로 확장하지 못했다. /여성경제신문DB

연구와 공장 사이 연결고리가 갈랐다
미국·대만·한국은 물리적 기반 축적

영국의 문제를 단순히 제조업 쇠퇴라고 정리하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영국은 세계적인 수학자와 컴퓨터과학자, AI 연구자를 계속 배출하고 있다. 문제는 그 지적 능력을 국가의 산업자산으로 증폭시키는 생산회로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ARM이 있었지만 소프트뱅크로 넘어갔다. 그래프코어가 있었지만 역시 소프트뱅크에 인수됐다. 딥마인드가 있었지만 구글 딥마인드가 됐다.

그 사이 미국은 GPU·클라우드·OS·AI 플랫폼을 연결했고 대만은 파운드리·EDA·IP·패키징을 하나의 제조 실행환경으로 만들었다. 한국은 HBM과 메모리, 거대한 반도체 팹을 구축했다. 영국은 뛰어난 두뇌를 계속 생산하면서 그 두뇌가 만들어낸 기술을 대량으로 복제할 물리적 산업기반을 다른 국가와 기업의 자본에 넘겨줬다. 그 빈 공간에서 금융과 언론과 철학의 언어가 비대해졌다.

그래서 영국발 AI 담론을 읽을 때는 언제나 한 번 더 아래층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초지능이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어떤 GPU가 계산하는지, 'AI가 인간을 지배하는가'보다 누가 데이터센터와 모델을 소유하는지, 'AI에게 권리가 필요한가'보다 누가 실행권한과 전력을 공급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산업혁명기 영국의 증기기관 공장을 묘사한 판화. 거대한 보일러와 증기기관, 동력전달 장치가 공장 내부에 설치돼 있고 노동자들이 기계를 운전하고 있다. 석탄을 태워 만든 증기의 압력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면서 인간과 가축의 힘에 의존하던 생산시설을 기계 동력으로 전환한 당시 영국 제조업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경제신문DB

韓 공장 있지만 컴퓨팅층은 얇아
둘 중 하나만 가져선 산업 안 돼

이 지점에서 영국 이야기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한국에는 영국이 갖지 못한 거대한 물리적 기반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팹이 있고 HBM이 있으며 첨단 패키징과 소재·부품·장비 산업이 있다. 발전설비와 변압기, 배전기기, 케이블과 냉각설비를 생산하는 제조업도 있다. 데이터센터를 연결할 통신망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아직 하나의 컴퓨터로 연결돼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국은 아키텍처를 설계한다. 대만은 세계의 설계를 실리콘으로 구현한다. 영국은 뛰어난 연구자를 배출했지만 생산회로를 잃었다. 한국은 반대로 세계적인 생산회로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하나의 컴퓨팅 시스템으로 설계하는 층이 얇다. 영국의 사례가 한국에 주는 교훈은 그래서 '제조업을 지켜야 한다' 정도가 아니다. 두뇌와 공장 가운데 하나만 가져서는 부족하다.

설계→로직→메모리→인터커넥트→패키징→전력→데이터센터→소프트웨어가 하나의 피드백 루프로 연결돼야 한다. 논문이 실리콘으로 내려오고 실리콘에서 발견된 병목이 다시 아키텍처 설계로 올라가는 회로가 있어야 한다. 영국은 세계를 해석할 언어와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ARM과 딥마인드와 그래프코어를 자국의 거대한 생산체계로 묶지 못했다. 그 사이 미국과 아시아는 팹과 GPU, HBM과 데이터센터를 쌓았다.

그리고 이제 영국의 대표 경제지는 기계가 인간에게 재산권을 요구하고 인간을 애완견으로 만들 미래를 걱정한다. 그 사설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훨씬 물리적인 현실이다. 누가 GPU를 만들고 있는가. 누가 HBM을 적층하고 있는가. 누가 웨이퍼를 찍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넣고 있는가. AI의 현재 위치는 그 생산지도 위에 훨씬 정확하게 표시돼 있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구글 딥마인드 본사. 2010년 런던에서 설립된 딥마인드는 알파고와 알파폴드 등 세계적인 AI 연구성과를 내놓았지만 2014년 구글에 인수됐다. 영국에서 태어난 연구조직이 미국 구글의 TPU·클라우드·데이터센터와 결합해 성장한 대표적 사례다. /로이터=연합뉴스

☞ AI 생산회로(AI Production Loop) = AI 연구와 알고리즘을 실제 계산능력과 산업가치로 전환하는 일련의 연결구조를 뜻한다. 아키텍처와 칩 설계에서 시작해 로직·메모리·인터커넥트·첨단 패키징을 거쳐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냉각·통신망, 소프트웨어와 서비스까지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각 요소를 개별적으로 보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설계에서 발견한 요구가 제조로 내려가고, 제조와 운영에서 드러난 병목이 다시 설계로 올라오는 피드백 루프가 작동하는가다.

영국은 ARM·그래프코어·딥마인드처럼 생산회로의 중요한 상단을 만들어낼 연구자와 설계역량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자국의 대규모 반도체 제조·패키징·데이터센터·전력 인프라와 결합하지 못했다. 반대로 미국은 GPU와 클라우드·AI 플랫폼을, 대만은 파운드리와 패키징을, 한국은 HBM과 대규모 반도체 생산능력을 축적했다. 따라서 AI 산업의 경쟁력을 논문 수나 모델 성능만으로 판단하기보다 지능을 설계하고 실리콘에 새기고 전력을 공급해 반복 생산할 수 있는 전체 회로가 존재하는지로 봐야 한다.

여성경제신문 이상헌 기자
liberty@seoulmedia.co.kr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