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물속 길'에서 고향 잃은 사람들 만나다 [동서트레일 대전 구간 下]

서현우 2026. 8. 25.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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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잘 맞춰 오셨네요. 여긴 대청호에서 1년 중에 일주일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어요. 그 뒤로는 물속으로 모습을 감추죠."

마치 썰물이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섬 길처럼 대청호의 수위가 낮아지면 걸을 수 있는 제방길이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연중 일주일만 걸을 수 있는 길 위에 올라서자, 한결 대청호의 바닥이 가까이 보였다.

"황새바위전망대네요. 이렇게 물이 많이 빠질 때면 이곳 전망대에서 여러 수몰민 마을 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청호는 워낙 여러 마을을 이주시키고 물을 가둬둔 곳이라 물속에 잠든 마을이 충주호와 소양호를 더한 것보다 많다고 하네요. 우리는 그저 물 위의 아름다움만 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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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구간 르포
연중 가장 수위가 낮은 때, 대청호를 찾았다. 평소라면 물에 잠겨 있을 모래사장의 끝까지 걸어가 투명한 호수 속을 들여다본다.

"때를 잘 맞춰 오셨네요. 여긴 대청호에서 1년 중에 일주일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어요. 그 뒤로는 물속으로 모습을 감추죠."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출발하기 전 먼저 위성지도를 통해서 코스를 예습하는데 길을 공유하는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의 끝 구간 약 600m가 물 위를 걷도록 돼 있었다. 동서트레일은 이 길 표시가 잘못됐다는 듯 우회해서 가도록 안내하고 있어 단순한 실수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가 아니었다. 마치 썰물이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섬 길처럼 대청호의 수위가 낮아지면 걸을 수 있는 제방길이 그곳에 있었다. 그렇게 연중 일주일만 걸을 수 있는 길 위에 올라서자, 한결 대청호의 바닥이 가까이 보였다. 그 밑에 아스라이 잠든 수몰민들의 애환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이 길은 마냥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드러나는 길이 아니다. 대청댐에서 수위 조절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정확히 언제 걸을 수 있다고 정해진 시점이 없다. 말하자면 '대청호의 저수량을 많이 유지할 필요가 없고, 물이 많이 사용되는 시기'다. 구체적으론 모내기철에 농부들이 논에 물을 잔뜩 대고, 장마 직전이라 어차피 곧 비가 많이 올 테니 물을 많이 담을 필요가 없는 시기, 이때만 잠깐 걸어볼 수 있다. 박석신 목원대 미술학부 교수와 함께 이 길을 찾아 떠나보기로 했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의 끝 구간 약 600m는 위성지도로 보면 물 위를 걷도록 돼 있다. 그 비밀의 해답은 1년 중 1주일가량만 공개된다.

대청호에 가라앉은 마을을 그리는 노화가

"대청호둘레길은 앞으로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옆을 지켜보면서 가는 길이죠."

사실, 만만하게 봤다. 동서트레일 22구간은 바로 옆에 차들이 씽씽 다니는데다가 상류인 옥천, 영동, 보은에 비라도 쏟아지면 곧장 물이 차올라서 길과 나무가 잠기기 일쑤인 곳이다. 그런 길이 생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뛰어날 것이란 기대감을 갖긴 어려웠다. 비료 냄새 쿰쿰한 촌락의 길일 것이라 여기고 한 걸음씩 내딛어봤다.

그런데 박 교수의 손가락을 따라서 잘 들여다보니, 그렇지 않았다. 대청댐이 들어서고 50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엄격하게 보호된 탓에 다양한 풀과 꽃, 나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대청호오백리길도 어언 2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길도, 숲도 깊어질 수밖에 없는 세월이다.

동서트레일 22구간은 대청호오백리길 4~5구간을 이용한다. 늘 모니터링 요원들이 잘 관리하고 있어 걷기 편하고, 볼거리도 많다.

대청호자연생태관을 출발해 도로를 따르다가 질경이가 융단처럼 깔려 있는 길을 따라서 대청호를 만나러 들어간다. 박 교수는 돼지감자로 불리는 뚱딴지, 약초로 널리 쓰인다는 쇠무릎, 수관 안이 노랗게 차 있는 애기똥풀, 약성을 갖고 있어 살균 효과가 있으며 굵기도 적당해 젓가락으로 자주 쓰였다는 산초나무를 하나하나 보여 준다. 굵직한 리기다소나무들이 가지 밑으로 감춰뒀던 풍경들이다.

"황새바위전망대네요. 이렇게 물이 많이 빠질 때면 이곳 전망대에서 여러 수몰민 마을 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청호는 워낙 여러 마을을 이주시키고 물을 가둬둔 곳이라 물속에 잠든 마을이 충주호와 소양호를 더한 것보다 많다고 하네요. 우리는 그저 물 위의 아름다움만 볼 뿐이죠."

대청호를 가까이 들여다보며 걷는다. 수위가 오르면, 이 길은 폐쇄되고 우회로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면서 호수 건너편에 산다는 한 70대 화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근 이 화가는 50년 동안 기억 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마을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강변에서 놀던 추억, 허름하지만 정겨운 마을 골목길, 이젠 생사도 알기 어려운 이웃사촌들의 집 담벼락 등을 화폭에 담고 있다. 수몰민들이 잠시나마 향수에 젖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란다. 박 교수도 수몰민들의 우울감을 달래기 위해 예술가들과 함께 걷는 여행을 기획하고, 현장에서 스토리텔링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안내판을 따라 황새바위를 찾아본다. 그런데, 그다지 황새의 형상은 확인하기 어렵다. 당연하다. 황새바위란 이름이 붙은 건 대청호가 생기기 이전이다. 수몰 전, 옛날에 대청호가 금강으로 불렸을 때 강 위에서 이곳을 올려다 보면 황새가 앉은 모양의 암봉이라 그런 이름이었다고 한다.

대청호둘레길, 국내 최고 생태교육장

전망대에서 내려서서 이제 대청호를 끼고 쭉 걷는다. 물가에는 줄지어 은사시나무가 들어서 있다. 이 나무들도 사연이 있었다. 원래 엄마격인 커다랗고 멋진 은사시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가 호수 경관을 막고 있다고 공무원들이 베어버렸단다. 그 후손격인 나무들이 지금의 이 나무들이란 설명이다. 인동초와 산딸기꽃이 천지인 길을 지나면 작은 돌담들과 우물 터가 보인다. 옛 마을의 흔적들이다.

동서트레일을 따라 걷던 중, 한 화가가 운영하는 전시농장에 들렀다. 대청호 주변에는 유독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길은 잠시 숨을 고르듯 마을로 올라선다. 그리고 곧 주산동전망대로 들어선다. 이곳은 대전에서 손꼽히는 일출 명소로, 특히 대청호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이면 환상적인 절경을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은 왜가리 한 마리가 한가롭게 노닐 따름이다. 부서진 조각배 하나가 쓸쓸하게 밀려오는 물결에 치댄다. 박 교수는 호수에 뺏긴 시선을 다시 풀로 가져온다. 며느리밑씻개와 사위질빵이다.

"옛날 선조들의 애환이 담긴 풀이름입니다. 사위질빵은 잡아당겨보면 줄기가 툭툭 끊어져요. 이걸로 지게 끈을 만들어 놓고 사위가 메도록 했다는 거죠. 그러면 금세 끊어지고, 우리 사위 고생했다고 이제 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며느리밑씻개는 그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줄기 앞과 뒤가 전부 가시인데, 그거로 용변을 본 뒤 처리하라고 줬다는 거예요.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믿거나 말거나한 유래입니다."

박석신 교수가 익살스럽게 생태해설을 들려주고 있다.

대청호를 두고 걷는 길이 단조로워질 무렵, 박 교수는 간이 생태교육을 보여 줬다. 땅에 떨어진 풀을 갈라서 이렇게 저렇게 엮더니 금세 물에 둥둥 떠다니는 돛단배를 만들었다. 또 줄기 두 개를 A자로 엮어 무게중심을 손가락 위에 올려놔도 맞게끔 만들기도 했다. 그는 "대청호는 식생이 워낙 다양하고 걷기 난이도도 평이해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생태교육장으로서 국내 최고"라고 했다.

낮아진 수위에 모습 드러낸 수몰 마을

풀을 만지작거리며 여름 바람을 맞는다. 어느 순간 숲이 트이면서 이제 1년 중 대부분을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는 제방길을 만난다. 숨은 길이라기엔 생각보다 넓고 단단하고 여름 뙤약볕도 강한 탓에 서둘러 지나간다. 대청호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느낌을 받으려면 조금 더 수위가 높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제방을 건너 오솔길을 따라 직진하면 다시 동서트레일로 올 수 있다.

이 길이 물속에 잠겨 있다면, 동서트레일 이정표를 따라서 길이 480m로 상공에 떠있는 무장애데크길을 이용하면 된다. 데크길은 차가 달리는 신상교 아래를 지나 오리골 마을로 데려다준다. 오리골은 마을 바로 옆에 있는 연못이 하늘에서 보면 오리 엉덩이를 닮아 이름이 유래했다는 작은 마을이다. 여기서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이 끝난다.

마을 정자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이제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을 찾아간다. 단 접속구간이 좀 별로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빙 돌아야 한다. 대신 대청슈퍼(010-9402-6002)에서 물이나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보급할 수 있어 약간의 위로가 된다.

토끼봉 옆에서 옛 수몰민들의 마을 터를 발견했다. 마을 터를 향해 누군가가 들어갔다가 나온 발자국이 보인다. 무슨 연유로, 그런 걸음을 남겼는지, 알 길이 없다.

도로를 따라 들어서면 이제 22구간의 마지막 흙길 구간, 토끼봉이다. 이곳은 흥진마을둘레길이라고도 불리며 대청호와 어우러진 갈대와 억새 풍광이 몹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산의 모양이 웅크린 토끼를 닮았다고 한다.

길은 이 봉우리를 한 바퀴 돌면서 걷는다. 사실상 대청호를 향해 튀어나온 곶과 같은 형상이다. 짙은 억새와 마찬가지로 짙은 대청호를 옆구리에 끼고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다. 이따금 나오는 벤치나 전망대에선 망중한을 즐긴다. 그러다 문득, 마치 유적지 발굴현장 같은 모습으로 큼지막한 마을 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2채의 집 흔적이 역력하고 이를 크게 둘러싼 담과, 화장실이었을 것 같은 공간이 집 뒤편 멀리 떨어진 곳에 또렷하다.

거기에 더 관심을 끌었던 건, 젖은 땅 위에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이었다. 수몰민이었을까? 발자국은 똑바르지 않고 우수에 찬 듯 굽이굽이 흔들리며 집으로 향했다가, 떠나가는 방향에선 충분히 마음이 달래졌다는 듯 제법 곧바르게 나아간다. 발자국에 담긴 사심을 짐작하며 이제 다시 도로로 올라선다. 오동선벚꽃길이다.

22구간 막바지는 571번 지방도를 따른다.

애향탑에 남은 절절한 그리움

동서트레일 상으로는 신하한터주차장, 네이버지도 상으로는 오동선대청호벚꽃길주차장(대전 동구 신상동 282)에서 22구간은 줄곧 571번 지방도를 따른다. 대청호오백리길은 백골산을 한 번 오르라고 권하지만 갈 길이 바쁜 동서트레일 종주자에겐 이 산길을 권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벚꽃이 필 때면 이 도로는 차와 사람으로 가득 찬다. 하지만 꽃이 진 지금은 데크를 보랏빛으로 물들인 버찌들만이 그 봄 축제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줄 따름이다. 그래도 숲 터널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도로를 따르니 제법 운치가 있다. 드리워진 벚나무 그늘이 태양으로부터 제법 뜨거워진 머리를 지켜주기도 한다.

동서트레일 안내리본이 대청호오백리길 리본과 나란히 붙어 있다.

이제 차도, 인적도 없는 도로는 쓸쓸하다. 등산화를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데크 소리만 요란하다. 그러다 문득 길옆으로 커다란 비석이 나온다. 애향탑이다. 신촌리애향탑, 모래재애향탑 등이다. 손끝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글을 읽어본다.

'실향민은 통일이 되면 고향을 찾을 수 있겠지만 수몰민은 영원히 못 할 수중이 아닌가?', '이웃사촌과 다정한 친구들과 헤어져 살며 이제 소식조차 알기 어렵게 되어 타지에서 사니 그저 그리운 것은 고향의 향수뿐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절절한 그리움이 떨려오듯 다가온다.

한편 모래재애향탑 이후 구간은 데크도 없는 완전한 도로 갓길이다. 마주 오는 차에 주의하며 걸어야 한다. 갓길을 침범할 정도로 자라난 나무들 탓에 걸음이 도로 복판으로 밀려날 때도 있다. 묵묵히 걸음과 땀을 쌓아올려 서둘러 지난다. 그러다보면 와정삼거리, 22구간의 끝이다. 여기는 옥천이다.

산행길잡이

전반부는 대청호오백리길 4코스, 후반부는 571번 지방도다. 갈림길이 없고 이정표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 그냥 넋 놓고 걸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이정표에 주산동전망대부터 신하한터주차장까지 거리를 7.7km로 표기해 둔 것은 잘못. 실측은 4.7km 정도였다.

강우량이 많은 경우 일부 구간은 침수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상습 침수구간은 전반부에 황새바위전망대와 주산동전망대 부근으로 침수될 시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위쪽으로 나 있으니 이를 이용하면 된다.

4코스가 끝나고 571번 지방도로 넘어갈 때도 주의해야 한다. 기사에서 건넌 제방길은 엄밀히 따져서 동서트레일은 아니고, 4코스에 해당한다. 이를 이용해서 동서트레일로 가려면 쭉 따라 건넌 뒤 신상교 아래를 지나 직진하면 오를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교통

굳이 택시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가도 좋다. 먼저 시점인 대청호자연생태관은 60, 61번 버스가 수시로 다닌다. 각각 배차간격은 75, 120분이다. 종점인 와정삼거리에선 택시를 불렀으나 응하는 기사가 없었고, 그 사이에 63번 버스가 다가와서 이를 이용했다. 이 버스는 배차간격 약 1시간을 두고 1일 15회(06:30~22:10) 운행한다. 버스 시간을 감안해 차도 구간의 운행속도를 조절하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다. 만약 정 시간이 안 맞으면 걷는 도중에 마주 오는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바깥아감부터 방아실 입구 와정리 정류장까지 동서트레일이 63번 버스 노선과 정확히 겹치기 때문. 정류장이 9개나 된다.

맛집&숙식(지역번호 042)

대청호는 상수원보호구역이라 식당이나 숙박업소가 많지 않은 편인데 22구간은 좀 다르다. 상당 구간을 마을길과 도로를 따르기 때문에 음식점과 숙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맛집으로는 조선오리(0507-1382-6143)가 있다. 취재진도 여기서 한방오리백숙(6만5,000원) 하나를 나눠 먹으며 든든히 배를 채웠다. 깔끔하고 계속 손이 가는 맛깔난 반찬과 진한 풍미에 육질은 부드러운 백숙 한 상이 나온다. 먹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것 같은 맛. 이외로는 벚꽃길가든(0507-1475-0294), 진고개식당(274-5421), 일능이칼국수(272-8879) 등이 있다.

샤를몽탁(0507-1321-1925)은 지역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카페다. 음료뿐 아니라 피자(2만 원) 맛집으로 유명하며 가게 안팎에서 발견할 수 있는 7마리의 귀여운 고양이가 마스코트다.

숙소로는 종점인 와정삼거리에 힐호텔(043-733-6335)이 있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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