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쪽 다리로 오른다…인생도, 산도 [화제인물 의족 산악인 최형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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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오늘을 못 넘기고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의족이 비싸요. 한쪽에 400만 원이에요. 대퇴(무릎 위쪽)는 1,000만 원이고요. 부품 대부분은 미국, 독일, 아이슬란드 제품이에요. 소모품이라서 3~4년에 한 번씩 갈아줘야 하죠. 몇 년마다 나름의 목돈이 나간다면, 적더라도 안정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는 공무원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정씨가 말한 대로였다.
최형욱씨는 그 행복을 찾아 오늘도 한 쪽 다리로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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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오늘을 못 넘기고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든 다리를 살려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절단 부위만 올라갈 뿐이었다. 사고 일주일 뒤, 아이는 의사에게 먼저 다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가혹한 고통이었다.
1997년 강원도 홍천, 빙판길에 미끄러진 차가 호수 위로 추락했다. 호수는 꽝꽝 얼어 있었다. 차에 타고 있던 아이는 튕겨 나가 나무에 부딪혔다. 조각난 뼈가 살갗을 뚫고 나왔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열악했던 도로 사정과 극심한 정체 탓에 서울까지 꼬박 10시간이 걸렸다. 구급차 안에서 다리는 이미 괴사하고 있었다.
일 년간 병상에 누워 네 번의 수술을 거쳤다. 중학교 입학도 한 해 미뤄졌다. 고등학생이 되도록 제대로 걷지 못했다. 최형욱(42)씨의 인생은 그렇게 남들보다 한 걸음 뒤처지는 줄만 알았다.

의족 하나가 1,000만 원
"장애를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눈앞에 닥친 현실이니까요. 어렸을 땐 남들의 시선도 싫고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럴수록 눈앞의 것들에 집중했어요. 학교 공부, 조금 더 똑바로 걷는 연습, 친구들과의 관계. 지나고 보니 무난하게 버텨낸 것 같네요."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 친구들과 여름방학마다 자전거를 타고 국토종주를 했다. 서울-강릉, 서울-부산을 달리며 마음을 씻어냈다. 다리가 아프다 보니 몸으로 하는 활동 중에 자전거가 적합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에는 제주도를 일주하러 갔다. 침낭 없이 텐트에서 자다가 추워서 서울로 올라왔다. 20대에는 산악자전거MTB를 탔다. 메이저 MTB 대회인 강촌챌린지와 왕방산대회에 참가했다.
신체가 불편하니 직업 선택의 자유가 제한됐다. 세상엔 생각보다 몸 쓰는 일과 불안정한 환경에 노출되는 일이 많았다. 바깥활동을 좋아함에도, 자연스럽게 공무원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의족이 비싸요. 한쪽에 400만 원이에요. 대퇴(무릎 위쪽)는 1,000만 원이고요. 부품 대부분은 미국, 독일, 아이슬란드 제품이에요. 소모품이라서 3~4년에 한 번씩 갈아줘야 하죠. 몇 년마다 나름의 목돈이 나간다면, 적더라도 안정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는 공무원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는 현재 행정직 군무원이다. 군부대의 회계·인사·기획 업무 등을 맡고 있다. 공무원과 시험과목이 똑같아서 군무원 시험을 봤는데 덜컥 붙었다. 1년만 더 서울시 공무원을 준비할까 하다가, 지쳐서 들어온 게 어느덧 15년째다. 경기도 고양에서 근무하고, 의정부에 살고 있다. 매일 도봉산을 끼고 출근한다.
산에 빠지게 된 건 영화 한 편 덕분이었다. 2016년, 영화 '메루, 한계를 향한 열정'을 봤다. 세 남자가 1,500m의, 그리 높지도 않은 벽을 오르고 있었다.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될 것을,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나 싶었다. '저 사람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나도 한 번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다음주에 바로 등산학교 문을 두드렸다.
"모집 요강엔 '신체 건강한 남녀 누구나'라고 쓰여 있는데, 저는 '누구나'가 아닌가 싶더라고요. '어, 나는 신체가 불건강한데?'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죠. (웃음)"

인생을 바꾼 스승, 정승권
그렇게 정승권등산학교에 들어갔다. 사실 산악인 정승권씨도 처음부터 승낙한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최씨의 의족을 직접 만져보고 구부려보면서 등반의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발목과 발등이 휘어야 등반을 할 수 있는데, 의족은 그러지 못하다 보니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실내 스포츠클라이밍을 권유했다.
최형욱씨는 실망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이내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있던 노스페이스 클라이밍센터 초급반에 등록했다. 일 년 뒤 그는 상의도 없이 등산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암벽반에 등록했다. 정승권씨는 그가 그간 실내암벽에서 몸을 얼마나 적응시켰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의 열정을 지켜보고 싶기도 해서 입교를 받아들였다.
"원래는 코오롱등산학교와 한국등산학교에 먼저 문의전화를 했어요. 그때 아마 접근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장애인을 위한 교육도 있냐'고 물으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와서 전화를 끊곤 했죠. 반면 정승권등산학교는 개인이 운영하다 보니 한 사람만 오케이하면 될 거라 생각했어요."
정씨가 말한 대로였다. 경사가 급해질수록 발목이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럴 땐 렌치로 미세하게 의족 각도를 조절했다. 더 무서운 건 자신도 모르게 추락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발끝 감각이 없으니 모든 감각을 무릎 위에서 느끼거나 눈으로 확인해야 했는데, 괜찮게 디뎠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쑥 미끄러졌다. 하도 미끄러져서 암벽화는 항상 앞코부터 구멍이 났다. 날 선 암벽에서 등반을 한 번만 해도 밑창을 갈아야 했다. (일반적인 창갈이 주기는 6개월에서 1년 정도다.)
"처음에는 아예 안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제한이 있을 뿐이지 안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루트는 조정하기 나름이라 최대한 내 상황에 맞는 구간으로 피해 가면 돼요. 그렇다고 물리적으로 안 되는 걸 할 수는 없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요."
등산학교는 그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건 안 되니까 건너뛰고 저것만 하자'는 예외는 없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과정을 동기들과 똑같이 이수했다. 그는 "뭣도 모르고 찾아간 나를 받아준 교장선생님께 감사하다"며 정씨를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동안은 아무리 찾아봐도 물어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힘든 거 극복하고 사는 것"
꿈에 그리던 기회가 찾아왔다. '2026 대한산악연맹 히말라야 사트피크(6,220m) 원정대'에 발탁된 것이다. 마지막까지 떨어질 줄 알았는데 붙었다. 그는 "하이킹도 좋고 클라이밍도 좋고 백패킹도 좋다"며 "어느 하나만 좋아하고 나머진 별로였다면 원정을 못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로따로 같아도 결국엔 다 하나로 합쳐진다"는 말도 덧붙였다.
"요구 수준에 맞춰놔야겠더라고요. 게스트처럼 체험하는 게 아니라 원정대원으로서 부여받은 임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려면요. 그러기 위해서 남들보다 120% 노력해요. 저를 뽑는 게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감사하게 생각해요."
비현실적으로 광활한 설원은 영화로 보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검은 것과 흰 것이 섞여 있는 풍경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여태껏 살아오며 가장 오래 걸은 날이었다. 새벽 4시에 시작해서 정오까지 어프로치(등반 시작 지점까지 접근하는 것)하고 곧바로 등반을 이어나갔다.
"몸 상태는 좋았어요. 고산병도 없었고요. 그런데 의족 안쪽 살이 붓더니, 의족과 쓸리면서 상처가 나더라고요. 국내에서는 1박2일로 걷든, 스키를 타든, 빙벽등반을 하든 사전에 처리를 해놔서 문제없었는데. 하필이면 여기서 이러나 싶어 당황스럽고 짜증도 났어요."
고산에 다녀와서야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알았다. 국내에는 관련 자료가 없어서 항상 외국 자료를 찾아보곤 했는데, 고산 환경에서 다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몸소 알게 된 것이다. 약을 준비하거나 기술적으로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결국 대장님의 판단에 따라 4,600m 베이스캠프에 남아 드론을 띄우고 망원경으로 길 찾기를 지원했다.
"알파인 등반이다 보니 한 명이 내려오면 전부 다 내려와야 하잖아요. 스스로도 힘들겠다는 판단이 들었고… 짐 꾸리다 대장님 말 듣고 바로 지원 모드로 바꿨죠. (웃음) 고민되더라고요. 그래도 무조건 간다고 했어야 하나… 결과적으로 베이스캠프에서 지원한 게 좋았던 듯해요. 이번 원정은 팀 등반을 성공시키는 게 임무니까요. 아쉬움보다는 보람이 더 커요. 아쉬움은 제 개인적인 욕심이죠."
평소 같으면 매주 등반하지만, 원정에 다녀오고 2주 동안은 산에 안 가고 쉬고 있다고 했다. 도봉산 아래 카페에서 만난 그는 불과 며칠 전까지 6,000m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탄탄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직장에는 원정대니 알파인이니 이런 얘기 안 하고, 그냥 히말라야 산에 간다고 말하고 조용히 다녀왔어요. (웃음) 1년치 휴가 20일을 모아서 통으로 썼어요."
장애인으로서 특별한 애환 같은 게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각자 힘든 거 극복하고 사는 거잖아요. 그거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아요. 생활 전반이 불편하긴 하지만, 다친 지 너무 오래 돼서 익숙해졌고요. 대우만 받으려 하다 보면 정상인과 함께 가기 어려워져요. 최대한 그들의 기준에 제가 맞춰야 하죠."

처음에 등반한다고 했을 땐 주변에서 만류했다. 그 자신도 지레짐작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 막상 부딪혀 보니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이제는 산 자체가 좋아졌다고 해야 될 것 같아요. 처음엔 미친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고요. 등반 자체의 스릴보다는, 힘든 거 다 지나가고 목표한 지점까지 갔을 때의 성취감이 좋아요."
그에게 등반은 또 다른 삶의 형태다. 인생의 큰 고비를 넘겼듯, 힘든 구간을 넘어서 목표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행복. 최형욱씨는 그 행복을 찾아 오늘도 한 쪽 다리로 산을 오른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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