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단 반도체, 다 된 '탈원전' 돌려세웠다… '원전 재가동' 힘받는 대만

나광현 2026. 8. 25.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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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세계가 주목하는 '반도체 성공 신화'를 썼다.

반도체 전력 수요가 늘어나고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원전 재가동 필요성이 제기되자, 대만 입법원은 지난해 5월 원전 수명 연장법을 통과시켰다.

지원금보다 주목할 점은 반도체 산업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원전 재가동 찬성으로 표출됐다는 사실이다.

원전 가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분명 존재하지만, 대만 내 반도체 산업의 상징성과 '정부가 하는 일이니까 도와줘야 한다'는 인식에 묻혀 선명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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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반도체 강국의 명암: 인프라 전쟁
탈원전 기조 대만 정부, '탈탈원전' 선회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전력 수요 급증 탓
TSMC, 국가 총전력의 8.2% 잡아먹어
대만 국민수용성 높지만 한국은 상황 달라
'핵심 거점' 신장성변전소 둘러싼 민관 갈등
"속도전일수록 민주적 소통이 중요" 제언
편집자주
대만은 세계가 주목하는 ‘반도체 성공 신화’를 썼다. 하지만 화려한 성공 뒤에는 양극화를 비롯한 그늘도 짙다. 한국도 전국에 반도체 생산 거점을 확대하며 대만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한국일보는 대만 현지 취재를 통해 반도체 강국의 두 얼굴을 살펴봤다.
7월 22일 대만 최남단인 핑둥현 헝춘진 한 해수욕장 모습. 언덕 뒤로 지금은 작동을 멈춘 마안산 원전 일부와 풍력발전기들이 보인다. 핑둥=나광현 기자

7월 22일 오후 찾은 대만 최남단 핑둥현 헝춘반도의 난완(南灣) 해변.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사장으로 유명한 전형적인 휴양지다. 삼삼오오 수영복을 입고 놀러온 청춘들, 대형견을 데려온 외국인 관광객, 가족 여행객 등 모두가 작렬하는 햇볕을 쬐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광경 뒤편으로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반원형의 회색 거대 물체가 보였다. 대만의 세 번째 원자력발전소인 '마안산 원전'의 원자로 지붕이다. 비록 지난해 운영 허가가 만료되며 지금은 작동을 멈췄지만, 원전의 형상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휴양지와 가까운 곳에서 40년간 가동됐다. 관광지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지만 현지 주민들은 "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동 중단과 함께 잊힐 퇴역 원전은 최근 갑작스럽게 화제의 중심이 됐다. 강경한 탈(脫) 원전파인 대만의 민주진보당 정부가 지난해 이 원전의 재가동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였기 때문이다. 탈원전 정책을 고수하던 대만 정부가 돌연 입장을 바꾼 이유는 '반도체' 때문이다.


'탈원전 정부' 돌려세운 반도체 슈퍼사이클

그래픽=이지원 기자

마안산 원전은 대만 정부가 화력 발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1970~1980년대 지은 원전 3개 중에서 가장 늦게(1984년) 가동을 시작했다. 대만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화석 연료가 거의 나지 않아 수입 의존도가 높다. 다만 이후 추가 원전 건설은 없었고, 2018년에 첫 번째로 운영 연한(40년)에 도달한 진산 원전 1호기를 시작으로 동을 순차 중단했다. 마지막 남은 마안산 원전 2호기도 지난해 운영을 종료하며 대만은 '탈원전 국가'가 됐다.

하지만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전 세계적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모든 걸 바꿔놨다. 대만은 세계 1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전문) 기업인 TSMC를 보유한 '반도체 강국'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봤다. 하지만 반도체 공장에 공급할 막대한 양의 전기를 확보하는 게 과제가 됐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대만 반도체 산업의 전력 사용량은 어마어마하다. TSMC는 대만 국가 총전력의 9% 정도를 사용하고 있다. TSMC는 늘어나는 반도체 수요에 맞춰 공장을 꾸준히 증설 중인데, S&P글로벌은 2030년에는 TSMC의 전력 소비량이 국가 총전력의 24%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쉬보런 대만 환경권보장기금회(ERF) 최고경영자는 "앞으로 대만에 2나노 공장 25개가 들어설 예정인데, 공장 가동에 필요한 전력 6기가와트(GW)는 원자로 6기 생산량과 맞먹는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전력 수요가 늘어나고 지정학적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원전 재가동 필요성이 제기되자, 대만 입법원은 지난해 5월 원전 수명 연장법을 통과시켰다. 같은 해 8월 원전 재가동을 놓고 진행된 국민투표에서 법정 가결 요건(전체 등록 유권자의 25% 이상 찬성)을 만족시키지 못해 부결됐지만, 투표자의 74%가 찬성표를 던지면서 여론의 변화가 확인됐다. 이후 대만전력공사(TPC)가 올해 3월 마안산 원전의 운영 허가 갱신 신청서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제출하면서, 대만 정부의 '탈(脫) 탈원전' 기조 전환은 명백해졌다.


'호국신산' 밀어주는 대만 국민

7월 22일 대만의 최남단인 핑둥현 헝춘진의 마안산 원전 부지 정문에 '오늘의 전력 생산량은 0'이라는 내용이 표시돼 있다. 핑둥=나광현 기자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원전 소재지' 헝춘진의 주민 찬성 비율은 60% 정도였다. 전국 찬성률에 비하면 낮지만, 과반은 넘었다. 헝춘진 진사무소장은 높은 찬성률 배경을 보조금에서 찾았다. 그는 "정부가 헝춘에 매년 1억2,000만 대만달러(약 54억 원)를 지원금으로 준다"며 "지역 교육, 농업, 행사 등에 쓴다"고 했다. 하지만 주민들 체감은 별로 높지 않다. '생활복리금' 명목으로 헝춘진 주민 1인당 한 달에 6,750원가량이 지급될 뿐이다. 주민들도 "소소한 전기료 보조 수준"이라고 했다.

지원금보다 주목할 점은 반도체 산업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원전 재가동 찬성으로 표출됐다는 사실이다. 난완 해변에서 만난 헝춘 주민 첸신위(66)는 원전 재가동에 찬성하는 이유를 묻자 망설임 없이 '거시 상황'에 대한 설명부터 꺼냈다. 첸은 "대만 산업에는 전기가 많이 필요한데, 화력 발전은 수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고, 태양광 발전은 태풍과 비가 많아 적합하지 않다"며 "결국 원전 없이는 막대한 산업용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원전 가동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분명 존재하지만, 대만 내 반도체 산업의 상징성과 '정부가 하는 일이니까 도와줘야 한다'는 인식에 묻혀 선명하진 않다. 익명을 요구한 한 주민은 "대만은 연료봉 같은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기술이 없어 발전소 안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후쿠시마 같은 원전 사고를 우려하는 주민들도 있지만 외부에 적극 개진하진 못한다"고 전했다.

마안산 원전에서는 재가동 가능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시설 성능 점검이 진행되고 있다. 지역에선 재가동 시점을 이르면 2028년으로 보고 있다. 마안산 원전의 설비용량은 1902메가와트(MW·1, 2호기 합산)로, 재가동될 경우 TSMC의 최첨단 2나노 팹 8개를 1년 내내 쉼 없이 돌릴 수 있다.

7월 22일 대만 최남단인 핑둥현 헝춘진의 원자력발전소 인근 산등성 곳곳에 송전탑과 송전선이 설치돼 있다. 마안산 원전이 작동하던 당시 원전에서 만들어진 전기들은 이 송전선을 타고 북쪽으로 공급됐다. 핑둥=나광현 기자

한국 변전소 부지에선 시작부터 잡음

7월 22일 전남광주 장성군 동화면 구룡리 신장성변전소 예정지 입구에서 마을 주민들이 동기조상기 확장공사 반대 현수막을 걸었다. 장성=장련성 기자

대만은 TSMC에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산'(호국신산)이라는 별칭을 붙여줄 정도로 반도체 산업 의존도와 국민 수용성이 유별날 정도로 높지만,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당장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에 필수적인 변전소 설치를 놓고 한국전력(한전)과 주민 간 갈등이 불거지는 분위기다.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장성군에 위치한 신장성변전소 설치 사업이 대표적이다. 전남광주 지역의 전기 수요 증가에 대비해 2016년부터 추진됐지만, 최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계획 발표에 따라 영광의 한빛원전, 신안 해상풍력, 서남권 재생에너지에서 생산된 전력을 모아 산업단지에 공급할 '핵심 시설'로 떠올랐다.

7월 22일 전남광주 장성군 동화면 구룡1구 마을회관에서 구룡리 신장성변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성=장련성 기자

한국일보가 7월 21일과 22일 부지 인근 구룡1구 마을을 찾았을 때, 현장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마을 초입에서 변전소 부지까지 '주민을 우롱하고 멸시하는 한전을 규탄한다' 등의 현수막이 줄줄이 걸렸고, 마을회관에는 '결사반대' 머리띠를 두른 주민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주민들이 변전소 설치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반도체로 우리 애들(호남 청년들)이 먹고살 게 있어야 어깨 펴고 당당히 살 거 아녀. 그니까 얼른 사업이 진행되게 협조해야제"(전계화 전 구룡1구 주민대책위원장·농부)라며 대부분 찬성 입장을 보였다. 주민들을 뿔나게 한 건, 어렵게 합의해놓고 추가 소통 없이 사업 계획을 바꿔버린 한전의 일방적 조치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픽=이지원 기자

구룡1구 주민들과 한전에 따르면, 양측은 2022년 6월 ①사업 면적 2만1,840㎡ 부지에 변전소 설치 ②345kV 4회선 송전선로 설치 ③154kV 2회선 송전선로 설치를 골자로 하는 합의서를 작성했다. 한전이 주민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최초로 '주민공모제' 도입을 시도한 사례로, 송전선 지중화 등 주민들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며 합의해 값진 성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한전이 합의 후에 일방적으로 사업 면적을 6만3,986㎡로 늘리고, 송전선로와 동기조상기(전기가 안정적으로 흐르도록 전압을 조절하는 장치)를 추가로 설치하려 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속도전의 기반은 투명성과 민주적 절차"

그래픽=이지원 기자

한전은 사업 부지 면적 변경에 대해선 "2022년 6월 합의한 '정지 면적'(실제 변전 핵심 시설이 올라가는 부지) 자체는 지금도 동일하다"고 해명했다. 다만 여느 사업처럼 부지 특성(경사면·배수로 등 조성 여건)을 확인한 뒤 확정되는 사업 면적이 늘어났을 뿐이란 설명이다. 송전선로와 동기조상기 설치에 대해선 "제10차 장기 송·변전 설비 계획 발표에 따라 추가된 것으로, 기존 합의 범위와는 별개 사업이 맞다"면서도 "한전 건설지사장이 4월에 구룡1구를 방문해 신설 계획을 주민들에게 설명했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그러나 기존에 어렵게 합의한 내용을 큰 폭으로 바꾸었는데도 소통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송영선 구룡1구 이장은 "한전은 최근 주민들과 소통하지 않고 정보 제공도 안 해주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21일 전남광주 장성군 동화면 구룡리 345kV 신장성변전소 건설 현장에서 터를 다지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장성=장련성 기자

향후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확보를 둘러싼 갈등이 더욱 확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이 클러스터 내 신설할 반도체 팹의 수를 당초 예고된 '4기'에서 '9기'까지 늘리는 방안을 언급하면서다. 추가될 반도체 팹의 종류 등 구체적 내용은 아직 알려진 바 없지만, 이 확장 계획이 실현될 경우 기존 계획에서도 막대했던 전력·용수 수요가 더욱 늘어나는 셈이라 추가 진통이 불가피해 보인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인프라 확충 속도전'에 따른 갈등을 줄이려면 민주적 절차가 담보돼야 하는 만큼 주민들과의 소통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변호사는 "독립된 입지 선정 기구를 설치하고, 의사결정 과정도 더욱 투명해져야 한다"며 "특히 금전적 보상만을 내세워 주민 갈등을 키우는 행태는 지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핑둥= 나광현 기자 name@hankookilbo.com
타이베이=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장성= 문지수 기자 do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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