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작가 개인전 ‘물:집’… 사적 서사로 읽어낸 국가 폭력의 기억
31일까지 ‘이씨! 표류기’ 등 총 5점 전시
용기와 화해, 새로운 역사 써 내려가

“가장 가까운 가족의 아픔조차 함부로 가져다 쓸 수 없었어요. 피하고 싶었던 아킬레스건이었지만, 이젠 세대를 거쳐 흘러내린 그 쓰라린 기록을 어루만지고 싶습니다.”
말해지지 못한 사적 서사와 국가 폭력의 기억을 어루만지는 이현정 작가의 개인전 ‘물:집’이 오는 31일까지 부산문화재단 홍티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26년 홍티아트센터 제14기 입주 작가 연작전 ‘이음(∑Mmm)’의 세 번째 무대로, 생애 처음 부산에 머물게 된 작가가 오랜 세월 집안을 눌러온 침묵과 상처의 실체를 추적하며 완성한 전시다.


전시장 입구 통로에는 작가의 작업 과정이 담긴 아카이브 테이블이 마련됐다. 2023년 ‘이씨! 표류기’를 처음 제작하며 기록한 자료부터 이후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오류를 바로잡은 기록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단기 4256년(1923년)생 할아버지와 1975년생 남동생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1949년 ‘예비검속’ 사건으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할아버지(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 규명 결정)의 죽음, 부산 ‘문현동 소년기술원’에서 남동생이 겪은 인권 유린의 기억이 그것이다. 작가는 교차 검증 과정에서 확인한 명칭의 오류나 정보의 혼란조차 삭제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2023년 ‘이씨! 표류기’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작가, 남동생을 위한 다섯 권의 책이었다면, 이번 ‘물:집’에서는 세 권이 더해져 모두 여덟 권으로 늘었다. 하지만 책 수가 늘었다고 가족의 이야기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새롭게 추가된 세 권에는 글을 넣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작가가 감히 대신 공개하거나 설명할 수 없어서다. 아직 묻지 못한 것, 물어도 답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작가라도 함부로 가져다 쓸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백 겹의 거즈에 직접 손바느질을 해 제본한 신작은 겹겹이 쌓인 잔혹한 시간성을 형상화한다. “200겹가량의 거즈를 잘라 직접 수를 놓았어요. 물이 흘러내리듯 고통과 슬픔이 세대를 넘어 아래로 흡수되며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표현했죠. 그 축적된 고통 자체가 하나의 물질인 셈입니다.”
전시명 ‘물:집’은 흘러넘치고 쌓이는 ‘물’의 속성이자, 쉼 없는 마찰과 압력으로 피부에 생겨 건드리지도 터뜨리지도 못하는 아픈 상처인 ‘물집’을 중의적으로 뜻한다. 작가는 언어를 차단당한 채 사회적 외곽으로 밀려나야 했던 가족의 삶을 온전히 끌어안는다.

특히 '2026년에서 부르는 1983'은 작가의 개인사가 국가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1973년생인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전국 웅변대회에서 ‘이승복 어린이’ 연설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국가 폭력 희생자의 손녀가 국가 주도의 반공 연설을 했던 아이러니”를 작품으로 풀어냈다.

작가는 덧붙인다. “과거엔 가문의 흑역사라 숨기고 싶었고, 가족의 아픔을 함부로 가져다 쓰는 게 도덕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해 주저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남겨진 삶을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대신, 주도적으로 씨앗을 심으며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책 위에는 작은 씨앗들이 흩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전시장 내에 드러난 현상들 사이에 관객이 머물고 이동하는 동안, 말로 다 설명되지 않은 것들의 크기와 무게를 스스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 문의 051-263-8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