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원 회장의 빅피처①] '전자제품 뼈대' CCL 지켜낸 두산, 반도체 '3대 축' 세운다
1974년부터 50년…국내 유일 CCL 공급사가 그룹 성장축으로
[도비라]
소비재, 중공업으로 명성을 떨쳤던 두산그룹이 새로운 사업 축으로 반도체를 꼽았다. 기존에도 반도체 소재 사업을 운영해왔지만 2022년 두산테스나 인수와 이번 SK실트론 인수를 토대로 반도체 생산 전후 과정에 꼭 필요한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다. 두산그룹의 사업구조가 성공할 경우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반도체 후공정과 웨이퍼 생산이 기업들의 새 먹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OB맥주로 시작해 대형 건설기계를 거쳐온 두산의 여정은 이제 초미세공정의 꽃인 웨이퍼와 반도체 검사로 이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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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인프라코어 등 건설기계 부문에서 굵직한 사업을 굴리던 두산은 채권단 관리 시절을 거치며 포트폴리오가 크게 뒤바뀌었다. 발전설비 중심이던 두산중공업은 두산에너빌리티로 사명을 바꾸고 원자력·가스터빈으로 무게중심을 옮겼으며, 두산건설 지분도 사모펀드에 넘겼다. 그 과정에서도 두산이 끝까지 지켜낸 사업이 있다.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용 동박적층판(CCL)을 만드는 두산 전자BG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두산 전자BG는 2분기 매출 6760억원, 영업이익 2014억원을 올리며 분기 최대치를 새로 썼다. 지난달 27일 공시된 실적으로, 영업이익은 IR 자료 기준이다. 매출 6173억원, 영업이익 1856억원을 기록한 1분기와 합치면 상반기 매출은 1조2933억원, 영업이익은 3870억원이다.
지난해 상반기 영업이익 2523억원(1분기 1161억원·2분기 1362억원)보다 53% 늘어난 수치다. 엔비디아 등 북미 빅테크 고객사에 납품하는 하이엔드 제품 비중이 71%에서 81%까지 확대되며 외형 성장과 수익성 개선이 동시에 이뤄졌다. 전자BG를 포함한 두산 자체사업의 2분기 영업이익률은 27.7%에 달했다.
두산이 실트론과 전자BG, 테스나로 이어지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와 테스트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던 배경에 전자BG가 반도체 산업을 꾸준히 이끌어줬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두산 전자BG는 1974년부터 50년 넘게 CCL을 생산해온 국내 유일 공급사다. CCL은 전자제품의 '뼈대' 역할을 하는 인쇄회로기판(PCB)의 핵심 소재다. 유리섬유에 에폭시 수지를 입힌 절연 기판(코어) 위에 얇은 구리 막(동박)을 접착해 만든 복합 소재로, PCB를 만들기 위한 '원판' 역할을 한다.
CCL에 회로 패턴을 새기고 구멍을 뚫고 도금하는 후속 공정을 거치면 비로소 완제품인 PCB가 된다. 두산 전자BG는 CCL을 만들어 대만 PCB 제조업체에 넘기고, 이 업체가 PCB로 가공해 엔비디아 등 빅테크에 납품하는 구조다.
전자BG는 그동안에도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반도체 패키지용 CCL을 만들어왔지만 AI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CCL의 위상은 훨씬 커졌다.
CCL은 반도체 패키지 안에서 전기 신호가 흐르는 통로이자 칩을 보호하는 방패, 기판 전체를 지지하는 뼈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AI 가속기나 고성능 서버용 반도체는 발열량과 전류 밀도가 매우 높아 열팽창이 작고 열을 효율적으로 분산시키는 저유전율·고내열 CCL이 필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CCL 품질이 낮으면 기판이 휘거나 신호가 왜곡돼 칩 설계가 뛰어나도 반도체 성능 자체가 제한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AI 서버용 CCL 시장은 소재와 인증, 설비 모두 진입장벽이 극단적으로 높아 신규 업체가 들어오기 어려운 시장으로 꼽힌다. 소재 기술력이 단순 부품 수준을 넘어 시스템 성능을 가르는 핵심 변수가 됐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와 두산의 인연은 2023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신증권은 보고서에서 "두산은 2023년 하반기부터 N사(엔비디아)의 AI 서버향 CCL 납품을 위한 퀄리티 테스트를 진행했고, 2024년 하반기 B100(블랙웰) 제품에 단독으로 납품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올해 1분기부터 반도체용 CCL 매출이 증가하면서 전자BG 사업부문의 영업이익률이 한 자릿수 후반 수준으로 회복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제품 납품이 본격화된다면 외형 확대와 수익성 개선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두산 전자BG는 2024년 4분기 출시된 엔비디아 GPU B100용 CCL 공급을 확정했고, 같은 해 11월 양산 공급을 시작했다. 세계 1위 CCL 업체인 대만 EMC를 제치고 블랙웰 아키텍처 기반 컴퓨트 트레이용 CCL을 단독 공급한 것이다. EMC는 글로벌 CCL 시장 점유율 60%를 쥔 선두 업체지만, AI 반도체가 요구하는 하이엔드 CCL의 기술 장벽은 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LG이노텍과 삼성전기 등에도 패키지솔루션 원재료로 CCL을 납품하고 있다. LG이노텍은 올해 1분기 분기보고서에서 패키지솔루션 사업부 원재료 주요 공급처로 두산 전자BG를 기재했다. 두 부품사를 거쳐 엔비디아와 애플, 테슬라 등에도 두산의 소재가 간접 전달되는 셈이다.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 같은 반도체 기판을 만드는 데도 CCL이 쓰인다. 이때 CCL은 기판 전체의 기계적 강성과 치수 안정성을 담당하는 뼈대 역할을 한다. 고부가로 꼽히는 AI GPU용 FC-BGA는 크기가 크고 두꺼워 열이 발생하면 기판 전체가 함께 팽창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코어에 들어가는 CCL이 열팽창을 최소화하면서 신호 손실을 줄이는 저유전율 특성까지 갖춰야 하는 까닭이다.
수요가 몰리자 두산은 증설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2027년 초까지 CCL 생산능력을 50% 확대하고, 약 1800억원을 들여 태국 아마타 산업단지에 신규 CCL 공장을 짓는다. 상업생산 목표 시점은 2028년 하반기다.

두산의 유연한 사업 정리와 신설은 박정원 회장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이전부터 두산은 특정 업종에 고착되지 않고, 원천기술과 수익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움직여왔었다. 반도체 산업 진출 역시 그 일환이라는 해석이다.
올해 신년사에서 박 회장은 "한 세기 넘게 수많은 대전환기를 겪으면서 쌓은 경험은 누구도 갖지 못한 자산"이라며 "기존 리소스만으로 성장에 어려움이 있다면, 외부에서 기회를 찾는 것을 포함해 신속하게 보완책을 마련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를 내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검토하면서도 빠른 AX 추진과 사업 전환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포트폴리오 확장을 도모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유연한 두산의 움직임은 현재 두산의 주력 사업에서도 엿보인다. 현재 두산은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커지는 전력 수요를 대응하기 위해 두산에너빌리티를 중심으로 가스터빈과 소형모듈원전(SMR) 등 에너지 솔루션 사업을 중점으로 그룹을 재건 중이다. 피지컬AI를 위해선 두산밥캣, 두산로보틱스 등 건설기계와 로봇에 AI를 접목하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수십년 전 OB맥주를 비롯한 소비재,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공업을 중심으로 움직여왔던 지향점과는 거리가 있다.
특히 두산건설을 비롯해 상징성이 크던 일부 적자 계열사를 단숨에 정리한 점은 박 회장의 결단으로 여겨진다. 두산은 2010년대 재무위기에 빠져있던 두산건설을 2021년 11월 매각한데 이어 두산그룹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인프라코어까지 HD현대에 매각하는 초강수로 IB업계와 산업계를 놀라게 했다.
두산은 향후 박 회장의 리더십 아래 반도체 산업 매출과 영향력을 키울 예정이다. 일례로 박 회장은 지난 6월 젠슨 황 엔비디아 회장 방한 당시 직접 잠실을 찾아 CCL, 로보틱스 등 피지컬AI를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키움증권 권민규 애널리스트는 "메모리 반도체 패키징 CCL이 서버 메모리 수요 증가 및 GDDR 등 고부가 물량 중심 믹스 개선으로 견조한 성장을 기록했다"며 "4분기부터 중국(창수) 생산능력 증설분이 실적에 반영되며 수요 호조로 인해 가동 직후 풀 가동률에 도달, 높은 이익 기여를 전망한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