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째 소리 빚은 황병준 “좋은 음악은 자꾸 크게 듣고 싶어져요” ①
공대생서 음악인으로…’좋은 소리’ 좇아온 28년
“시간 갈수록 이 일 하길 잘했다는 순간 많아져”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듣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찾는지, 그것을 업으로 삼는 삶은 어떤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좋은 소리'를 좇다가 레코딩 엔지니어가 된 황병준 사운드미러코리아 대표는 그 질문에 답을 들려줄 만한 사람이다. 전기공학 박사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던 그는 결국 공대를 떠나 버클리 음대로 향했다. 살림살이보다 먼저 CD 200장을 챙겨 유학길에 오를 만큼 음악과 소리에 빠져 있던 '오디오 마니아'였다.
혹독한 훈련 끝에 음악의 세계에 들어선 뒤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상인 그래미상을 두 차례 거머쥐었다. 클래식과 공연 녹음을 넘어 영화와 전시, 무용, 미디어아트 등으로 활동 영역도 넓혀왔다.

사운드엔지니어, 프로듀서… 수식어가다채롭다
보통 사운드 만드는 사람을 레코딩 엔지니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녹음기사'다. 나는 소리 중에서도 주로 음악이 레코딩, 믹싱, 마스터링을 거쳐 결과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듀서/엔지니어'로표기돼있는데차이가무엇인가
영화로 치면 총감독과 촬영감독이랄까. 기획도 하고 음악에 간섭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가장 큰 차이다. 오랫동안 촬영감독으로 일하다 영화감독이 되는 경우가 있듯 뮤지션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이렇게 됐다.
레코딩, 믹싱, 마스터링이란단어도생소하다
요리에 비유한다면 레코딩은 재료를 구하는 일, 믹싱은 그걸 다듬어서 요리하는 일, 마스터링은 완성된 음식을 플레이팅하는 일이다. 종종 마스터링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는데,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웍째로 내놓는 일은 없지 않은가. 그릇에 예쁘게 옮겨 담고 테이블에 꽃병도 놓아두고, 좋은 술까지 곁들여 세팅하는 것처럼 소비자와 만나기 위해 거치는 최종 단계다.
전기공학박사유학길에올랐다가음악에빠지게된계기는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항상 음악에 둘러싸여 있었다. 옛날 사진들 보면 늘 피아노 치고 있거나 성가대 활동하고 있거나… 외가에서 살았는데 음악을 좋아하던 이모들 덕분에 늘 전축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클래식이며 6070 팝송을 배경음처럼 들으며 자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다 내 안에 남아 있더라. 그래도 음악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해봤다. 공대 가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서울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나는 박사 학위를 따고 교수나 연구원이 되겠구나.' 그런데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았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민족과 역사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게 있었는데, 막상 가 보니 미국은 완전 딴 세상이었다. 다들 너무 자유로우니까 나조차도 뭔가가 확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휴학을 하고 거의 6개월간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고민했다. 매일 아침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무릎 꿇고 성경책 보면서 기도하고. (웃음) 3개월쯤 지나니 제일 생각나는 게 음악이었다.

뮤지션이아닌레코딩엔지니어를선택한이유는무엇인가
대학 때부터 밴드부와 학내 음악감상실 DJ 활동을 하면서 늘 궁금했다. 왜 국내에서 만든 클래식 음반은 해외 라이선스 음반이랑 사운드 차이가 클까. 왜 내가 녹음한 밴드 음악은 일반 가요랑 사운드가 다를까. 그런데 마침 미국에 그런 걸 배울 수 있는 1년짜리 직업 학교가 있다는 거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몇 달 더 고민하다 결국 거기에 들어갔다. 부모님께는 "미국에 정말 끝내주는 신기술이 있는데 그걸 배워야겠다"고 둘러댔다.
그곳에서초석을다진건가
사실은 4개월 정도 다니다 그만뒀다. 뮤지션을 구해야만 실습이 가능했는데 주변에 뮤지션은 한 명도 없고, 이론 수업도 전기공학 전공자인 내겐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보스턴에 버클리 음대가 있단 걸 알게 됐다. 거긴 커리큘럼도 4년 과정이고 뮤지션들도 많다고 하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막상 가보니 버클리에선 레코딩을 배우려면 먼저 뮤지션이 돼야 했다. 어릴 때 체르니 치던 실력으로 피아노를 선택했는데 거기에 날고 기는 애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연주 실력을 평가하는 오디션 최고점이 999라면 나는 010 수준이었다. (웃음) 성적이 나쁘면 레코딩과에 들어갈 수도 없는데,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더라. 아무리 준비를 해도 레슨만 받으러 가면 선생님 앞에서 덜덜덜 떨었다.
꼬박앉아서피아노연습을하느라속옷이닳아버렸다는일화가유명하다
피아노만 20시간 친 적도 있다. 너무 열심히 하니까 불쌍해 보였는지 A를 주더라. 겨우겨우 레코딩과에 들어갔는데 세상에, 그토록 동경했던 스튜디오 소리가 별로였다. 일반적인 스튜디오 모니터는 그렇게 좋은 스피커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사운드미러와의인연이시작됐나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듣는데 홀딱 반해버렸다. 다른 인턴들이 학점만 따고 갈 때 계속 주변을 기웃거리니까 하루는 대표님이 "내일 필드 레코딩 같이 가겠냐"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수업까지 제치고 따라갔더니 교회 리트릿 센터에서 피아노 3중주를 녹음하는 현장이었는데, 별다른 작업 없이 마이크만 갖다 댔는데도 소리가 CD 그 자체였다. 순간 뭔가 북받치면서 '드디어 찾았다, 이게 내 길이구나' 싶었다.
대표님도 그걸 느끼셨는지 그때부터 나를 매일같이 데리고 다니셨다. 보스턴 심포니 홀이며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 피아니스트 앙드레 프레빈…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다. 마지막 학기였는데 잠도 안 자고 일하러 다니느라 결국 졸업은 못했다.
바로다음해한국으로돌아와사운드미러코리아를설립했다
한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CCM 그룹의 미국 투어를 도와주다가 제안을 받았다. 같이 한국으로 들어가자고, 미국에서 하던 일을 모두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고민이 됐다. 당시 카페 아르바이트 시급이 5달러 정도였는데 나는 오케스트라 녹음 아르바이트 한 번에 300달러를 받고 있었다. 우연히 회사 급여명세서를 봤더니 프리랜서로 일하던 버클리 교수님의 급여가 내 아르바이트비보다 적기도 했다. 기회가 있을 때 잡자 싶어 대표님께 여쭤봤다. "여기서 하던 일을 한국에서 하고 싶은데 회사 이름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폐는 안 끼치겠습니다." 그랬더니 흔쾌히 "갔다가 별로면 다시 오라"시더라. 그렇게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28년이 됐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