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개혁·사회참여 앞장선 ‘행동하는 수행자’ 명진스님 입적

박경은 기자 2026. 8. 2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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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1000일 기도부터 민주화·통일운동까지
제적 무효 판결 뒤 올해 종단과 9년 갈등 마무리
이 대통령 등 정치권·시민사회 각계서 추모
22일 입적한 명진스님. 연합뉴스

한국 불교의 행동하는 수행자 명진스님이 22일 입적했다. 세수 76세, 법랍 52년이다. 1980년대 불교계 민주화운동과 1994년 조계종단 개혁의 한복판에 섰던 스님은 이명박 정부와 조계종 지도부를 공개 비판했고 국정원 불법 사찰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2017년 종단에서 제적된 뒤 9년 가까이 이어진 갈등이 법원의 무효 판결, 종단과의 화해로 마무리 된 지 반년 남짓 만의 입적이다.

조계종에 따르면 명진스님은 이날 오전 9시38분쯤 제주 서귀포시 하예포구 인근 바다에서 물에 떠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10시28분쯤 사망 판정을 받았다. 해경은 스님이 착용하고 있던 장비 등을 토대로 프리다이빙 연습 도중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명진 스님의 지인은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스님은 평소 무릎이 불편해 육상 운동 대신 프리다이빙을 최근 5년간 해 오셨다”고 설명했다.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 불교계와 정치권, 시민사회에서 애도가 이어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22일 페이스북을 통해 “대한민국 불교계의 큰 어른을 떠나보내게 된 슬픔을 온 국민과 함께 나눈다”며 추모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23일 “스님의 수행은 실천이자 행동이었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었다”고 애도했다. 명진스님이 공동후원회장을 맡았던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은 “명진스님이 사회적 약자 보호와 비정규직·산업재해 문제 해결을 위해 최근까지 함께했다”며 그의 사회정의를 위한 한결같은 행보를 기렸다.

1950년생인 명진스님은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했다. 성철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했으며 군 복무 당시인 1972년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1974년 탄성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이후 송광사, 봉암사, 상원사 등 여러 선방을 돌며 여름과 겨울 석달씩 참선에 전념하는 안거를 50차례 넘게 했다.

선방 수행에 매진하던 스님이 세상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담은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2017년)에서 “광주항쟁을 폭도의 소행으로 알았는데 국가권력의 탄압임을 알게 됐다”면서 “이럴 때 중은 혼자 수행만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고 말했다. 1986년 정치권력으로부터 불교의 자주성을 요구한 ‘9·7 해인사 전국승려대회’에 참여했고, 이듬해 불교탄압대책위원장을 맡았다. 1994년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의 3선 연임에 반대하며 벌어진 조계종 개혁 때는 개혁회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통일과 남북교류에도 관심이 컸다.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에서 활동했고 2005년에는 본부장을 맡았다. 통일전문지 <민족21>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남북 민간교류에도 관여했다. 노동 현장과 사회적 참사 현장을 찾는 일도 잦았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농성장, 세월호 참사와 촛불집회 등을 찾아 사회 현안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불교계 안에서 종단개혁의 주역으로 이름을 알렸던 스님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였다. 2006년 당시 총무원장 지관스님에 의해 서울 강남 대형사찰인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뒤 그 해 12월부터 산문을 나서지 않는 1000일 기도에 들어갔다. 2007년에는 사찰의 예산과 재정을 외부에 공개했다. 당시 종단 내 분규로 얼룩졌던 봉은사의 운영을 투명하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등록 신도와 재정 규모가 크게 늘면서 봉은사는 도심 포교와 사찰 운영의 모범 사례라는 평가를 받았다. 1000일 기도 중 산문을 나선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참석 때가 유일했다. 기도를 끝낸 뒤 처음 찾은 곳도 용산참사 현장이었다.

그러나 봉은사는 갈등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2010년 조계종이 봉은사를 총무원장 직할 직영사찰로 전환하기로 하자 명진스님은 정치권의 외압 의혹을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그는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자승 총무원장에게 자신의 퇴출을 요구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고 안 원내대표는 이를 부인했다. 봉은사 직영 전환을 둘러싼 공방은 수개월간 종단과 정치권을 뒤흔들었고, 명진스님은 그해 11월 임기를 마치며 봉은사를 떠났다.

그가 당시 정권의 감시대상이었던 사실은 뒤늦게 드러났다.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는 2017년 이명박 정부 청와대가 2010년부터 명진스님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른바 ‘좌파 활동 경력’을 온라인에 확산하도록 국정원에 지시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공개된 국정원 문건에는 그의 봉은사 주지 연임을 막고 온라인에서 비판 여론을 조성하는 방안 등이 담겨 있었다.

봉은사를 떠난 뒤에도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 체제의 종단 운영과 재정 문제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2017년 4월 조계종으로부터 최고 수위의 징계인 제적 처분을 받았다. 종교·시민사회 인사들이 징계 철회를 요구했으나 갈등은 오래 이어졌다. 명진스님은 2023년 제적 결정이 무효라며 조계종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지난해 명진스님의 손을 들어줬다. 조계종과 명진스님은 올해 2월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기로 하면서 오랜 대립을 화해로 마무리했다.

장례는 종교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23일 봉은사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25일 봉은사에서, 다비식은 출가본사인 법주사에서 봉행될 예정이다.

2017년 8월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린 ‘명진스님 승적박탈 규탄 시민사회 1천인 선언’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징계 철회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박경은 선임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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