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천년 남도, 미완의 문화기술연구원을 다시 세우자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의 초기 구상은 2002년 '문화수도 광주' 의제에서 시작해 2004년 이후 본격화되었다. 2006년 9월 27일 제정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은 문화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아시아 문화자원의 교류·연구·창조·활용을 촉진하고, 국가균형발전과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을 표방하였다.
2007년 10월 확정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종합계획」에는 문화콘텐츠 기술연구원 설립·운영이 포함되었다. 이때의 설계는 분명했다. ACC가 시민과 세계가 경험하는 문화발전소라면 CT연구소는 새 기술과 인재를 장기 축적하는 R&D 엔진이었다. 두 기관은 별개 시설이 아니라 연구, 창작, 제작, 실증, 향유, 산업화가 순환하는 생태계의 쌍두마차였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독립연구원이 아닌 '연구주관기관'으로 대폭 축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2012년 1월 「문화산업진흥 기본법」이 개정되면서 광주과학기술원(GIST)이 문화산업 복합기술을 연구·개발하는 문화기술 연구주관기관으로 지정되었다. 시행령 개정이유에는 GIST 지정과 주관기관의 조직·사업계획·예산 승인 절차가 명시되어 있다. 이 법적 근거에 따라 2013년 4월 1일 GIST 한국문화기술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이 조치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문화기술 연구를 중단시키지 않고 제도적 거점을 만든 현실적 진전이다. 실제로 연구소는 AI 기반 예술융합, XR·미디어아트, 문화유산 실감콘텐츠,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변환, HCI와 정책연구 등 의미 있는 성과를 축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 국책연구기관을 대학 부설 연구주관기관으로 대체한 제도적 축소였다. 200명에서 400명 넘게 거론되던 규모가 불과 10여 명 남짓한 대학 내 연구소로 존속하게 되었다. 참고로 국립생태원은 650명 규모,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은 200여 명 규모다.
2017년 문체부는 「콘텐츠 산업 중장기 정책 비전」에서 문화가치를 중심으로 기술을 융합할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을 다시 검토하겠다고 했다. 나아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주한 「(가칭)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 및 운영방안 연구」가 2019년 2월 공개되었다. 327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는 기능·조직·인력·예산·시설·법률·운영모형을 종합 검토했고 콘텐츠연구소·전통문화산업연구소·개방형 연구본부·전략본부 등을 둔 오픈 이노베이션형 기관을 제안했다(연구책임자 이칠우). 당시 보도된 완성 규모는 총원 450명, 연간 약 1,016억 원이었다.
문체부의 제4차 문화기술 연구개발 기본계획(2023~2027)은 AI·확장현실·문화데이터·저작권 보호·문화소외계층의 창작·향유 기술을 핵심 의제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독립된 국책연구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2025년 4월 21일 민형배 의원 등 13인은 「문화산업진흥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2209977)을 발의했다. 안 제31조의2 등에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의 설립 근거를 두고 AI·메타버스와 문화콘텐츠의 융합연구를 활성화하려는 법안이었다.

CT연구원 추진 내력과 한국문화기술연구원 설립 포럼을 통해 강조된 것들
2026년 8월 19일 광주문화도시협의회 생통포럼 주관 CT포럼을 개최한 것도 이러한 노력 일환이다. 기조 발표에 나선 김혜선(GIST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노무현 대통령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구상과 국책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미완의 국가 약속, 국가적 기억장치, ACC와 연구원의 순환, 문화AI실증 도시 등에 대해 분석했다.
2007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는 ACC와 문화기술연구원이 연구, 창작, 제작, 산업, 향유를 순환시키는 두 축으로 설계되었으나, ACC만 건립되고 연구원은 미완으로 남았다는 것, AI시대에는 문화가 핵심 데이터이자 국가 지식자산이므로, 연구원을 분산된 CT연구를 축적하는 '국가적 기억장치'이자 문화AI R&D 컨트롤타워로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를 ACC-GIST-연구원-예술계-산업계가 연결된 국가 문화AI 실증도시로 만들자는 제안이다. 이지현(GIST AI학과 교수)은 'AI시대, 문화기술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AI Space, 관계와 생성, 새로운 문화, 융합설계, 광주에서 미래를 만드는 청년 등에 대해 발표했다.
새로 설립될 CT연구원이 문화, 예술, 인문, AI, 공학 기술, 그리고 이들을 잇는 문화기술 융합설계를 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향준(전남대 철학연구센터 전임연구원)은 '백년 국가론: 국가, 도시, 문명'이라는 주제로, 광주문명도시에 대해 발표했다. 국가가 정권의 임기를 넘어 문명의 지식과 언어를 세대 간 순환시키는 '지속 가능한 문명행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로 언어모델을 사례 삼아 얘기했지만 ACC와 AI, 예술, 언어, 지식순환을 결합한 국가적 프로토타입을 제시하는 등 CT연구원 추진에 힘을 보탰다. 이외 나를 포함한 토론에 대해서는 지면상 생략한다. 발표를 종합해보면 2007년의 미완성 기관을 복원하는 데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AI Space의 새로운 문화를 연구하는 공간으로, 적어도 향후 100년의 지식, 언어, 문명을 설계하는 국가기관으로 전환하자는 제안들이었다. 아쉬운 점은 지금의 움직임이 전남광주통합특별시의 발족에 따른 국가적 관심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CT연구원의 출처와 내력에 대해 살펴본 바와 같이, 왜 지금 시점에 이 논의가 다시 일어나고 있으며 이재명 대통령은 남도에 진 빚을 갚겠노라고 공언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천년 전라에서 천년 남도로', 인수위 해단식에서 왜 이 케치프레이즈를 내 걸었겠는가. 광주를 품고 광주를 넘어서야 할 시점이다.
남도인문학팁
한국문화기술(CT)연구원,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근자에 이재명 대통령이 민형배 통합특별시장을 만나 "광주에 아시아문화전당 건물 하나 짓고 말겠소?"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간의 이런 내력을 함축한 발언이었다고 본다. 내가 '아시아문명원'이라는 큰 그림의 컨트롤타워 혹은 헤드쿼터를 제안했던 까닭이 여기에 기반한다. 기왕의 CT연구원을 AI문명원 수준에서 재구성하고 미래를 준비해나갈 필요를 말하는 까닭 말이다.
AI문명원은 기왕의 CT연구원 전략과 비전을 포섭하고, AI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의미·규범·문화적 조건을 다루어나간다는 취지다. 벼락처럼 다가온 AI시대의 문명론적 전환이 그 배경이며 CT와 AI가 이제는 기술적으로 거의 분리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CT가 AI에 온전하게 포획된 것은 아니다. 지면상 나열할 수는 없지만, AI가 오늘날 문화기술을 움직이는 범용 엔진이라면, CT는 그 엔진에 문화적 목적과 맥락과 윤리를 부여하는 영역일 것이기 때문이다.
AI는 더 빨리 더 많이 생성할 수는 있지만,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정의로운가, 무엇이 우리 공동체에 이로운가를 결정할 능력이 없다. 이 판단의 층위는 사실 CT(문화기술)를 넘어서는 '문명기술(Civilization Technology)'의 영역이다. 시대는 이미 문화기술에서 문명기술로 나아가고 있다. 다만, 정책적으로 CT연구원이라는 이름을 밀고 나갈 필요는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