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약속은 지켜질 때 약속이다

이규호 기자 2026. 8. 2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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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의 라틴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는 것만은 아니다. 서로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다음 약속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민이 국가와 한 합의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국가가 개인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절차와 약속을 책임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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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의 라틴어다. 오늘날 국제법과 계약관계를 떠받치는 오래된 원칙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는 것만은 아니다. 서로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다음 약속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약속의 무게는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친구가 약속을 어기면 우정을 잃을 수 있고 기업이 계약을 어기면 신뢰와 돈을 잃는다. 그렇다면 국가가 국민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무엇을 잃게 될까. 아마 ‘신뢰’일 것이다.

최근 양구에서는 춘천~속초 동서고속화철도 용하~야촌리 구간 교량화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업은 주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들고나온 요구와는 성격이 다르다. 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 현장조정회의를 통해 정부 관계기관과 양구군, 주민들이 교량화 추진에 뜻을 모았다. 양구군의 재정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업비를 분담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사업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원점 재검토되며 재원 분담 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양구군민들이 답답해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교량화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다. 정부기관과 주민들이 한자리에 앉아 어렵게 만들어낸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접경지역 주민들에게 국가와의 약속은 더욱 남다르다. 양구는 수십 년 동안 국가안보를 위해 많은 것을 감내했다. 군사시설과 각종 규제 속에서 재산권 행사와 지역개발에 제약을 받았고, 군(軍) 개편이라는 국가정책의 변화가 지역경제에 가져온 충격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그때마다 국가가 지역에 요구했던 것은 이해와 양보였다. 그렇다면 국가 역시 주민과 한 약속에는 그만큼의 책임을 보여줘야 한다.

더욱이 지역 주민과 정부기관 사이에는 힘의 크기부터 다르다. 주민이 국가와 한 합의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국가가 개인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절차와 약속을 책임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행정의 연속성도 그래서 중요하다. 담당자가 바뀌고 정책 환경이 달라졌다고 과거의 합의까지 가벼워진다면 주민에게 공식적인 협의 절차는 더 이상 신뢰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

물론 국가사업에는 예산이 필요하다. 사업비가 늘어나면 타당성을 따져야 하고 기관별 분담도 협의해야 한다.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꼼꼼하게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산의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정부기관이 주민들과 공식적인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 합의했다면 그 과정 자체가 행정에 대한 신뢰가 된다. 어렵게 만들어낸 합의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주민들은 다음 정부의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지방소멸 시대 정부는 지역을 살리겠다고 말한다. 접경지역의 희생에는 합당한 보상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이재명 대통령도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쩌면 거창한 정책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미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양구군민들이 바라는 것도 특별대우가 아니다. 국가가 스스로 한 말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 2,000여년을 건너온 이 오래된 원칙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는 간단하다. 약속은 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켜지는 순간 완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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