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발포사건’ 지휘관 첫 증언…“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 비판도

고경태 기자 2026. 8. 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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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시절 삼청교육을 받은 뒤 군부대에서 보호감호 수용 중이던 민간인들에게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한 1981년 육군 5사단 사건과 관련해 당시 발포에 참여한 장교가 공개 증언을 하고 사건 전면 재조사를 요구했다. 삼청교육대 사건에 관해 군 지휘관이 증언에 나선 첫 사례로, 20여년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조사보고서에는 시위를 촉발한 감호생 폭행 당사자로 나와 논란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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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 사상자 낸 81년 5사단 사건
‘중대장으로 발포 참여’ 한동철씨
본인 강제예편 피해도 규명 요구
당시 피해자는 “처벌부터 받아야”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가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연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 증언 기자회견’에서 당시 삼청교육대 제3중대장이었던 한동철 예비역 중위(오른쪽)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은 기자회견을 주선한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이만적(이적) 이사장.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전두환 정권 시절 삼청교육을 받은 뒤 군부대에서 보호감호 수용 중이던 민간인들에게 발포해 사망자가 발생한 1981년 육군 5사단 사건과 관련해 당시 발포에 참여한 장교가 공개 증언을 하고 사건 전면 재조사를 요구했다. 삼청교육대 사건에 관해 군 지휘관이 증언에 나선 첫 사례로, 20여년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조사보고서에는 시위를 촉발한 감호생 폭행 당사자로 나와 논란이 예상된다.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는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1981년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에 대한 현장지휘관 공개증언 기자회견을 열었다. 증언에 나선 한동철(72)씨는 당시 제5보병사단 36연대 삼청교육대 제3중대장(중위)으로서 감호생들의 시위에 대응한 발포가 일어났을 때 사격개시 명령 계선에 있었다고 한다. 이날 한씨는 당시 감호생들이 시위에 나서게 된 과정과 발포 경위,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환영에 시달리고 좌천을 거듭하다 강제 전역당한 일을 설명한 뒤 진실화해위 19층 민원실에 “사건을 전면 재조사해달라”는 취지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2000년 출범한 대통령 직속 의문사위와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5사단 발포사건은 1981년 6월20일 오전 경기 연천에 있던 제5사단 36연대 전투지원중대에 수용된 보호감호생들이 술 반입 등으로 인해 장교들에게 폭행당하자 이에 항의하다가 기간병들의 소총 및 기관단총 공격을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열 앞에 있던 감호생 전정배씨가 후송 중 사망하고 송아무개씨 등 5명이 다리 관통상 등의 중상을 입었다는 게 두 위원회 조사 결과다.

1981년 5사단 36연대 삼청교육대 중대장이었던 한동철 예비역 중위(오른쪽)와 이만적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장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피해자들은 1980년 8월부터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한 삼청교육대에 끌려와 순화교육을 받고 근로봉사(강제노역)에 이어 사회보호법에 따른 별도의 보호감호 처분으로 군부대에 수용돼 있었다. 당시 민간인 3만9742명이 적법한 절차 없이 군부대에서 삼청교육 훈련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이중 5사단 피해자들처럼 사회보호법에 따라 감호처분까지 받은 사람은 7578명에 이르렀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씨는 “당시 가혹 행위와 폭언에 항의하던 감호생들이 ‘삼청교육대 즉각 중단하라’며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벌이자, 연대장이 ‘실탄 장전! 사격개시’를 명령했고 뒤따라 대대장과 중대장들이 ‘일제사격’을 복창하며 군인들의 사격이 이루어졌다. 30~40명이 쓰러지면서 유혈이 낭자했다”고 발포 상황을 설명했다.

이는 “중위 고아무개씨가 부대장에게 실탄사격 허가를 받지 못하자 공포탄을 쏜 뒤 일제사격이 이뤄졌다”는 의문사위 조사와 다소 차이가 있다. 또한 의문사위는 “2중대장이었던 한동철씨가 감호생을 폭행한 장교 3명 중 하나였다”고 했다. 한씨가 감호생 시위를 촉발한 폭행 당사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씨는 “본인은 3중대장이었고 폭행에 가담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의문사위 조사보고서에 적힌 사건일도 6월20일인 반면, 한씨는 8월의 어느 날로 기억했다. 피해자연합회 윤태일 자문위원은 “의문사위 조사에 문제가 많다. 부대대장이었던 고아무개 소령의 진술에만 의존했고 한동철씨는 조사도 하지 않았다. 사망자가 1명이라고 하는데 신뢰할 수 없다. 재조사를 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씨 기자회견을 주선한 피해자연합회 이만적(이적) 이사장은 한겨레에 “이 분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로서 양심선언과 속죄를 한 것이다. 중대장으로서 강제명령에 따라 총을 쐈는데,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전가돼 강제 예편당했다”고 말했다. 한씨가 낸 진실규명 신청서에도 본인의 강제예편 피해 규명이 포함됐다고 한다. 기자회견에서도 “제1의 피해자는 그날 총탄에 쓰러진 삼청교육대 입소자들과 가족”이라면서도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었던 군인도 2차 피해자”라며 본인이 피해자임을 분명히 했다.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가 20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연 ‘5사단 삼청교육대 일제사격 살상사건 증언 기자회견’에서 당시 삼청교육대 중대장이었던 한동철(가운데) 예비역 중위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5사단 발포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신덕기(69)씨는 20일 한겨레에 “가해자의 반성과 양심선언은 좋은데 불명예 제대한 것을 가지고 피해자 코스프레하면 안 된다”며 “뒤늦게 나타나 양심선언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총을 겨눈 장교가 어떻게 피해자냐. 합당한 처벌부터 먼저 받으라”고 잘라 말했다. 신씨는 1980년 8월에 끌려가 순화교육과 근로봉사, 감호처분까지 받고 수용돼 있다가 이듬해 11월 풀려났으며, 2기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피해 인정) 결정을 받았다.

의문사위 조사에 따르면, 한동철씨는 5사단 사건으로 1개월간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상부로부터 지휘책임을 추궁당한 감호대대장 중령 윤아무개씨는 직무유기로 불구속 입건돼 무혐의 처리됐다. 5사단 사건 관련해서 가해자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셈이다. 대신 시위를 주도한 10여명의 감호생들은 초병 집단 협박, 초소 침범, 군용시설 손괴, 특수 공무집행방해로 군법회의 회부돼 청송보호감호소 등에 수감됐다.

삼청교육대 감호생들에 대한 발포는 5사단뿐 아니라 화천 27사단과 홍천 11사단, 화천 15사단에서도 벌어졌다. 2기 진실화해위의 경우 27사단 발포사건(보호감호 중 사회보호법 위반 사건)을 진실 규명하고 27사단, 5사단, 11사단, 15사단 발포사건 당시 초병 협박 등으로 처벌된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재심을 권고한 바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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