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힘들 때 제도 밖으로 밀려나는 예술가들···‘증명’ 대신 ‘등록’ 목소리[예술이 노동이 되기 위해]

노정연 기자 2026. 8. 20.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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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선별 지원에서 보편적 안전망으로
2012년 도입된 예술활동증명
서류 미비 등 이유 잇단 ‘반려’
신진 비제도권 예술인 소외
‘생존권 보장’ 애초 취지 퇴색
개별 지원사업·심사 분리해야
정부, ‘기본소득’ 검토 공식화
‘누가 예술인가’ 기준 필요
지난해 1월 인사동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글로벌 아티스트들과 전시를 진행한 김감구 작가.(가운데) 이 전시는 전시장이 정식 예술 공간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활동증명 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감구 작가 제공

미디어 아티스트 김감구씨는 올해 초 5년 만에 ‘예술활동증명’을 갱신하면서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혔다. 개인전과 기획전 등 그동안의 활동 실적을 제출했지만 증빙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려된 것이다. 김 작가가 지난해 1월 인사동의 한 복합문화공간에서 글로벌 아티스트들과 진행한 전시는 전시장이 정식 예술 공간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사유로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공공기관에서 진행한 전시 실적을 다시 제출한 뒤에야 심사를 통과했다.

5년 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한 차례 증빙이 반려됐던 경험이 있는 김 작가는 “대안공간이나 길거리, 카페 등 관객과 가까운 공간에서 다양한 작업을 하는 현대미술가들이 많다”며 “‘화이트 큐브’(전통적인 갤러리)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예술 활동일수록 제도권 안전망에 포함되지 못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연극 연출가 홍예원씨는 지난해 10월 예술활동증명 갱신을 하라는 안내에 따라 참여한 공연에 대한 증빙자료를 제출했지만 지난 2월 서류가 반려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증빙자료에 공연의 러닝타임 또는 관람료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전에 증명을 받은 시기(2014년부터 2020년)에는 공연 포스터나 리플릿만으로도 증빙에 문제가 없었기에 혼란스러웠다.

홍 연출가는 “정확한 일자와 장소, 주최·주관이 명시된 공연 포스터를 제출했음에도 관람료와 러닝타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완 요청이 이뤄졌다”며 “그 사이에 관련 규정이 바뀐 것인지, 어떤 근거로 반려된 것인지 문의했지만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올해 초 문화예술계의 화두로 떠오른 예술활동증명은 예술인이 직업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제도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운영하며 예술활동준비금과 예술인 주택, 생활안정자금 융자, 심리·법률 상담 등 여러 복지사업의 자격 요건으로 활용된다.

예술활동증명은 생활고와 지병 속에서 숨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 사건을 계기로 예술인의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도입됐다. 2011년 제정돼 이듬해 시행된 예술인복지법에 따라 예술인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확인하고 각종 복지사업과 연결하는 기초 장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지난해 신청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59.4%가 미승인됐고 심사에 넉 달 이상 걸리는 등 현장의 불만 사례가 터져 나오며 제도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됐다.

시혜적 지원에서 고용보험까지…한국 예술인 복지의 현주소
지난 4월 국회에서 열린 ‘예술활동증명, 현장의 언어로 묻다’ 토론회에 참석한 김감구 작가. 이날 토론회에서는 예술활동증명 제도의 실효성 개선 방안이 논의됐다. 김감구 작가 제공

국내 예술인 복지는 지난 10여 년간 빠르게 확대됐다. 예술인복지법이 예술인의 직업적 지위와 권리를 처음 법률로 명시했고, 산재보험 지원과 창작준비금, 생활안정자금 등 여러 지원 사업이 도입되며 예술인의 생존과 창작활동을 사회 안전망 안에서 보호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2020년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은 예술인을 일회성 지원 대상에서 사회보험 가입자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문화예술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노무를 제공한 예술인이라면 일정 자격을 충족해 구직급여와 출산 전후 급여 등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진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예술노동을 담아내지 못하는 사각지대와 행정적 문턱이 존재한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문화예술 용역계약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계약서가 없거나 창작 준비 기간이 계약에 포함되지 않은 경우, 특정 고용주 없이 작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독립 창작자의 노동은 포착하기 어렵다. 예술활동증명은 이런 예술가들을 각종 복지사업과 연결하는 역할을 하지만, 까다로운 증명 기준과 제도의 경직성 때문에 예술인들의 복지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술가들은 현재의 예술활동증명 제도가 ‘지원’보다 ‘검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입을 모은다. 홍 연출가는 “처음 제도를 도입할 때에는 예술인을 사회안전망 안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철학적 고민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기계적인 서류 평가와 형식적인 민원 처리로 다뤄지는 인상이 강하다”고 비판했다.

예술활동증명의 쓰임이 본래 취지를 넘어 지나치게 확장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일부 지자체의 문화재단 공모사업, 공공 공연장 대관 등 각종 사업에서 증명 완료 여부를 지원 자격이나 가산점으로 활용하면서, 복지 대상 확인을 위한 장치가 사실상 ‘예술인 자격증’처럼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안전망이 가장 절실한 현장의 약자가 제도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경력이 적은 청년·신진 예술가나 비제도권 공간에서 활동하는 창작자, 활동 중단으로 생계·심리 지원이 필요한 예술가일수록 최근 실적을 서류로 입증하기 어렵다. 홍 연출가는 “이제 막 활동을 시작했거나 위기에 놓인 예술가는 증명할 실적이 없어 복지에 접근하지 못한다”며 “정작 제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을 품지 못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등록제’ 전환과 현장 중심 분업…구조 변화해야

현장 예술가들은 한국의 예술인 정책이 지속 가능한 궤도에 오르려면 선별과 검열 중심의 틀을 벗어나 보편적 사회정책으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장 먼저 제기되는 대안은 일정 기간마다 주기적으로 갱신하도록 한 예술활동증명을 등록제 형태로 전환하는 방안이다. 현행 방식을 수정해 등록 절차를 간소화하고, 건강검진·심리상담·긴급자금 융자 같은 기본 복지의 접근 문턱을 낮추자는 취지다. 홍 연출가는 “수십 년간 쉬지 않고 연극을 한 사람이 몇 년간 작품 활동을 쉬었다고 해서 예술인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지 않나”라며 “활동 확인 절차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복지재정이 투입되는 만큼 최소한의 확인과 부정수급 방지 장치는 필요하다는 데에도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기본 복지 접근권은 일단 조건 없이 열어두는 포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복지 안전망과 개별 지원사업 심사를 분리하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복지는 예술인의 기본적 생존을 지원하는 사회보장 차원으로 다루고, 창작 지원금이나 재정 지원이 필요한 개별 사업은 각 공모 취지에 맞게 별도의 심사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활동증명이 지자체나 기관의 지원사업 가산점 등 자격 심사 수단으로 변질되는 관행 역시 끊어내야 제도 본래의 목적을 회복할 수 있다.

단일 행정기관이 수십만 명의 활동을 일일이 서류로 판별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현장과의 접점을 넓히는 분업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기준 올해 예술활동증명 신청 건수는 8만2212건으로, 이미 지난해 전체 신청 건수(6만6456건)를 훌쩍 넘어섰다. 코로나19 시기 한시적으로 연장됐던 예술활동증명의 유효기간이 잇따라 만료되면서 갱신 신청이 한꺼번에 몰린 영향이다. 재단은 급증한 신청을 처리하기 위해 기존 담당 인력 10명에 한시적 단기 인력 8명을 추가로 채용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창작물이 빠르게 늘어나는 등 예술활동의 형태가 복잡해지고 신청량까지 증가하는 상황에서 제한된 인력만으로 충실한 심사가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 작가는 “장애인 등록 과정에서 전문 의료기관이 판단을 내리듯, 예술 현장을 잘 이해하는 민간 전문 단체나 장르별 기구에 검증과 지원 판단 권한을 분배해야 한다”며 “현장의 맥락을 읽을 수 있는 유연한 거버넌스가 마련되어야 행정 편의주의를 걷어내고 실효성 있는 정책을 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본소득’ 카드 꺼낸 정부…안전망 제대로 작동하려면
지난 4월 국회에서 열린 ‘예술활동증명, 현장의 언어로 묻다’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김감구 작가 제공

예술활동증명을 둘러싼 실효성 논란이 커지자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제도 개선을 위한 개편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심사 기준과 운영 방식 정비를 논의하고 있다.

정부는 예술인 산재보험 당연가입 전환 등 사회보험 중심의 안전망 확대를 추진하는 동시에 예술계의 고질적인 소득 불안정을 보완하기 위한 중장기 대안으로 ‘예술인 기본소득’ 도입 검토를 공식화했다. 올해 연구 용역에 착수해 내년 초까지 구체적인 소득 지원 모델을 연구·검토한다는 계획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기본소득을 포함해 예술인 소득을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단계”라며 “아일랜드 등 해외 주요국의 예술인 기본소득 시범 사업 사례 등도 참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예술활동증명 제도를 운영하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도 개선 작업에 착수했다. 재단 관계자는 “현재 시스템은 제도 도입 당시의 틀을 거의 그대로 사용해 노후화된 상태”라며 “올해 처음 관련 예산을 확보해 ‘예술인 경력정보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예술활동증명 제도 자체를 정비하기 위한 연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청 절차를 간소화하고 누적된 활동 정보를 활용해 처리 기간을 줄이는 것이 개편의 주요 목표다. 재단은 인력 확충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시스템 고도화와 심사 기준 개선을 병행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새로운 시스템이 장르별 창작 방식과 비정형 예술활동까지 얼마나 폭넓게 반영할 수 있을지가 향후 개편의 관건이다.

기본소득 역시 지급 규모나 방식에 앞서 ‘누구를 예술인으로 보고 포괄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먼저 정립돼야 한다. 기존의 증명 방식을 답습하면 사각지대가 재현되고, 문턱을 낮추면 한정된 재원을 어떻게 배분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예술인 복지정책이 실질적인 안전망으로 작동하려면 예술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유연한 기준 마련과 다변화된 예술 현장의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포용적 제도 설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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