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잃은 소녀여, 희망은 아직 있다

이태훈 기자 2026. 8. 2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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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만에 ‘니나’로 돌아온 전미도
김정 연출 체호프 연극 ‘갈매기’
연인 뜨레쁠레프가 총으로 쏜 갈매기를 안고 있는 니나(전미도). 자유와 생기를 잃고 박제당하는 갈매기는 극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이다. /뉴시스

“나는 갈매기예요. 아니, 나는 배우예요.”

인기 소설가를 향한 사랑과 배우의 꿈을 좇아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던 ‘니나’(전미도)가 옛 연인 ‘뜨레쁠레프’(임철우) 앞에서 오열할 때, 객석도 속절없이 흐느낌으로 함께 출렁인다. 여름 햇빛처럼 반짝였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빛났던 소녀는 “배우의 꿈을 이룰 수 있다면 먼지투성이 다락방에 살며 곰팡내 나는 빵을 먹더라도 행복할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험한 세상에 이리저리 채이고 배신과 풍파를 겪으며, 몇 년 만에 그 생기와 빛을 모두 잃었다. 자유롭게 호숫가 하늘을 날다 인간의 총에 맞아 땅으로 떨어진 뒤 박제된 갈매기의 이미지가 흐느끼는 니나의 어깨 위로 겹쳐 보이는 듯하다.

고단한 무명 여배우가 된 '니나'(전미도·왼쪽)가 수 년 만에 옛 연인 '뜨레쁠레프'(임철우)와 다시 만날 때, 객석은 눈물 바다가 된다. /극단 맨씨어터

체호프의 걸작 ‘갈매기’의 주인공은 통상 아르까지나. 하지만 지금 서울 광진구 티켓링크 1975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갈매기’에선 각광받는 중견 연출가 김정이 극단 맨씨어터와 함께 ‘니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시 풀어냈다. 초연 뒤 15년 만에 다시 ‘니나’를 맡은 배우 전미도가 그 중심에 있다. 아찔하고 서늘한 젊은이의 영락(零落), 그 정서적 낙차를 온몸에 담는 무대 위 전미도의 모습은 자체로 배우의 연기가 그려낼 수 있는 하나의 절경이다.

러시아 시골 아름다운 호숫가 영지, 옛 시대에 집착하고 현재를 권태롭게 여기는 영지의 여주인이자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유명 여배우 ‘아르까지나’(우현주·양소민)가 잘나가는 소설가인 젊은 애인 ‘뜨리고린’(이동하)과 함께 여름 한철을 나러 온다. 아르까지나는 새로운 연극을 꿈꾸는 젊은 작가 지망생 아들 뜨레쁠레프와 사사건건 부딪치고, 아들의 ‘뮤즈’이자 연인인 배우 지망생 소녀 니나는 뜨리고린에게 끌린다. 사소한 감정의 충돌과 작은 사건의 연쇄가 소용돌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연극 '갈매기'에서 시골의 배우 지망생 소녀 '니나'(전미도·왼쪽)에게 모스크바에서 온 유명 여배우 '아르까지나'(우현주)는 선망의 대상이다. /뉴시스

1막 도입부, 매너리즘에 빠진 현재의 예술을 비웃는 뜨레쁠레프의 극중극 공연은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 커다란 보름달을 배경으로 니나가 독백을 시작하면, 젊은 예술가의 치기와 배우를 꿈꾸는 소녀의 해맑은 재능이 만나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시작된다.

닿을 듯 말 듯한 마음의 거리, 아슬아슬한 풋사랑을 드러내는 김정 연출 특유의 ‘움직임 언어’도 연극의 매력을 더한다. 뜨레쁠레프를 짝사랑하는 ‘마샤’(이은)와 마샤를 사랑하는 ‘메드베젠꼬’(권경민)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뜨레쁠레프와 니나의 가슴 뛰는 아슬아슬한 풋사랑을 드러낼 때 특히 그렇다. 뜨레쁠레프를 향한 짝사랑의 고통을 고백하는 ‘마샤’(이은)에게 평생 ‘한량’처럼 세상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살아온 의사 ‘도른’(박호산·이정열)이 안타까워하며 손을 내밀고, 마침내 일어나 함께 춤추는 장면도 인상 깊다. 결국 우리 인생을 버틸 만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아플 때 내밀어주는 누군가의 손길, 슬픔을 밀어내며 함께 추는 춤 같은 것이다.

"검은 옷은 내 인생의 상복"이라고, "고통스러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는 '마샤'(이은·왼쪽 검은 옷)을 의사 '도른'(이정열)이 다정히 위로한다. 마샤를 짝사랑하는 박봉의 교사 '메드베젠꼬'(권경민·오른쪽)에겐 그런 마샤를 지켜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극단 맨씨어터

약 1000석 규모 대극장 무대 위는 하얀 자작나무숲이 펼쳐진 러시아의 호숫가. 깊어진 이야기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이면 관객들은 어느새 무대의 절반 이상에 호수의 물이 차올라 있음을 깨닫는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는 시대적 공기의 변화처럼, 극중 인물들의 사랑과 좌절, 방황과 선택, 절망과 희망이 마법처럼 아름다운 호수의 물처럼 관객을 향해 젖어들어온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체호프의 연극엔 늘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일어날 법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대 뒤에서 벌어지거나 대화 속에서만 드러나기도 한다. 괴로워하고, 체념하고, 질투하거나 전전긍긍하는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쯤은 관객 자신 혹은 주변의 누군가를 닮아 있다.

초췌하고 어두운 얼굴로, 다시 찰박찰박 호숫가 물을 밟으며 돌아가는 니나의 뒷모습에서 희미한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것, 앞선 세대의 성취를 천박하고 얄팍하다 비웃지만 그걸 넘어서지 못한 채 모든 걸 포기하는 뜨레쁠레프의 마지막에서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이다. 공연은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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