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필선, 네 번 나눠 쓴 글, 인장 15개…추사가 ‘서체로 그린’ 하나뿐인 난초[붓 끝의 美학]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2026. 8. 1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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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김정희 ‘불이선란도’
대립하지만 조화로운 ‘불이’의 경지
소장욕 자극해 ‘억지 써서’ 빼앗기도
김정희 ‘불이선란도’(1852~1856), 종이에 먹, 보물, 2018년 손세기·손창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의 풍속화는 흥미로워 관람객이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는 작품이다. 반면 잘 모르겠지만, 오묘한 매력에 발걸음을 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그러한 작품 중 하나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이다. 이 작품은 제목부터 관람객을 난감하게 만든다. ‘난초 그림’인데, ‘불이선’은 무슨 뜻인지. 난초 주변 빼곡한 한자는 무슨 내용이며, 인장이 왜 이렇게 많이 찍혀 있는지. 그림을 볼수록 궁금증이 샘솟는다.

난초를 그렸다는데, 난초의 형상과 닮지도 않았고, 짙은 먹으로 난잎을 부드럽게 친 조선의 난초 그림과도 다르다. 이 난초의 필선은 옅고 메마르다. 난잎을 치는 방식도 낯설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 선들이 왼쪽을 향해 비스듬히 올라오다 각기 다른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서 난잎들이 뻗은 반대쪽에 자리한 난초 꽃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붓끝에 힘을 거의 주지 않고 길게 빼낸 잎과 달리 꽃잎 한 잎 한 잎 힘을 조절해 세심히 그렸다. 옅은 꽃잎 사이 진한 먹으로 점을 찍어 표현한 화심에 시선이 모이는데, 화심 앞의 붉은색이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는 김정희의 ‘묵장’(墨莊) 인장으로, 그가 쓴 세 번째 글의 시작을 알리는 두인(頭印)이다.

그가 네 번에 나눠 적은 글에 그림 제작 동기, 그림에 대한 자평(自評)과 그림 주인이 바뀐 사연이 담겨 있다. 난초 위쪽 글이 첫 번째로, 특이하게 왼쪽부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문인화가 정섭(1693~1765)의 난초 그림에 보이는 방식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스무 해, 우연히 본성의 천진함을 그려내었네. 문을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것이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일세”라고 쓰고, 이어서 작은 글씨로 “만약 어떤 사람이 (난 그림을 그려달라고) 강요하여, (이것을) 구실로 삼는다면,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거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절하리라”고 적었다.

고대 인도의 지혜와 신통력을 지닌 유마거사가 ‘불이라는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길’(不二法門)을 보살들에게 묻자, 문수보살 등이 ‘선과 악’ ‘생과 멸’ 등 대립적 개념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답했다. 이에 유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보살들이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내용이 <유마경>의 ‘불이법문품’이다. 여기서 ‘불이’는 단순히 둘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불이’는 두 개념이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즉 대립의 양상은 없어지지 않는 절대 조화를 뜻한다고 한다.

김정희는 “난을 치는 법 역시 예서(隷書)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어야 한다”고 아들에게 당부했다. 그가 추구한 책을 읽어 쌓은 학식과 글씨가 ‘불이’하고,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가 ‘불이’한 경지가 ‘불이선란도’에서 표출됐다. 그림 왼쪽에 쓴 “초서·예서·기자의 필법(草隷奇字之法: 한자의 서체)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겠는가?”라는 글에서 이 그림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렸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예언하듯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그림이 풍기는 예사롭지 않은 ‘문기’(文氣)에 스며들게 된다. 이 그림의 가치를 과천에서 그의 말년을 지켰던 사람들이 알아보았다.

그림 왼쪽의 두 글 “처음에 달준(시동)에게 주려고 붓 가는 대로 그린 것이니, 이런 그림은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와 다음 줄의 “오소산(전각가 오규일)이 보고 억지를 써서 빼앗아 가니 우습도다”로 달준을 위한 그림이 오규일에게 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은 20세기에도 이어졌다. 화면 곳곳에 찍힌 인장들이 이를 말해준다. 김정희의 인장 5과(개) 외에 그의 말년 제자이자 중국어 통역관 김석준, 정치인 장택상, 서예가 손재형의 인장 10과가 찍혀 있다. 20세기 후반 손세기가 이 걸작을 소장했고 그의 장남 손창근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다시없을 이 명작을 9월13일까지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반자’ 주제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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