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이젠 안 먹어도 되는 약’[금주의 B컷]

정효진 기자 2026. 8. 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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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어느 날 이유를 모르는 환자들이 실려 온다, 알고 보니 전국적으로 비슷한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의사와 과학자들은 원인을 알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드디어 밝혀진 원인, 그 뒤에는… 어떤 재난 영화의 도입부로 어색하지 않다. 정체 모를 바이러스, 악당의 음모,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나서는 주인공이 나오는 이야기 말이다. 그다음에 어떻게 될지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모두를 낫게 하는 마법의 신약이 기적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던 주인공은 가족을 살리고, 나쁜 사람들은 죄다 감옥에 갈 것이다. 영화에서는 금방 그렇게 된다.

현실에서는 어떨까.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있었다. 1994년부터 판매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폐 손상 등 대규모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지난 11일 서영철 전국가습기살균제참사피해자연대 대표가 피해 신고자 가운데 1958번째로 숨졌다. 그는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말고 광화문광장에서 투쟁해달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피해자연대 관계자들은 “15년 동안 호소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다”며 농성에 돌입했다. 이처럼 현실의 피해자들은 법이 제정되길, 조사가 철저하게 진행되길, 소송이 끝나길 기다리며 거의 영원히 길에서 싸워야 한다. 대법원은 2024년에서야 참사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했고,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개정법은 오는 10월 시행된다.

지난 17일 광화문광장에 고 서영철 대표의 휠체어가, 휠체어 위에는 그가 생전에 먹던 약통이 놓였다. 플라스틱 통에 각종 약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호흡기, 알레르기, 심장과, 정신과… 평생 몇천알을 먹었을지 알 수 없는, 이젠 안 먹어도 되는 약들이었다.

사진·글 정효진 기자 hoh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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