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화의 마지막 대가, 소치 허련

노성태 2026. 8. 19.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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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79> 소치 허련
소치 허련 초상화

- 궁벽한 진도에서 태어나다
19세기 예원의 총수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였지만,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를 그린 문인화가로도 유명하다. 추사는 칭찬에 박절한 인물이었다. 특히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에 대한 폄의(貶義)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추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따를 만한 사람이 없다”, “내 그림보다 낫다”며 엄청난 찬사를 받은 분이 있다.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과 함께 19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 소치 허련(許鍊, 1809-1892)이 그다. 허련이 남긴 대표작으로는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등이 있다.
소치 대표작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소치 대표작 ‘선면산수도’

허련의 본관은 양천,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이며, 다른 이름은 허유다.

허유는 당나라 수묵 산수화의 효시인 왕유(王維, 699-759)의 이름을, 자 마힐은 왕유의 자를 취한 것이다. 시인이자 수묵화가 왕유를 닮고 싶어서였다.

허련의 본관인 양천은 지금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 일대다. 양천 허씨로 가장 잘 알려진 가문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집안이다. 선조 때 동서 붕당에서 허균의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다. 슬하의 허성, 허봉, 허균, 허난설헌 4남매는 모두 시문에 뛰어났고, 허엽과 함께 ‘허씨 5문장가’라 불린다. 숙종 때 우의정에 오른 남인의 영수 허목은 송시열과 쌍벽을 이루던 학자로 학문이 높았고, 문장·그림·서예에 뛰어났다. 특히 전서(篆書)에 능해 동방의 제일인자로 일컬어졌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도 양천 허씨이다. 이렇듯 양천 허씨 가문은 정치가와 시인, 서화가, 명의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광해군의 즉위 후 임해군이 진도에 유배될 때 임해군의 처조카인 허균의 후손 허대가 임해군을 수행해 진도에 들어온 후 아예 눌러 앉았다. 양천 허씨와 진도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소치 허련이 1809년(순조 9) 진도에서 허각(許珏)과 경주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연유다. 허련은 스스로 인생을 문답식으로 정리한 글 ‘소치실록’에서 “궁벽한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의지할 곳도 없고 견문도 넓지 못했다”라고 쓰고 있다.

궁벽한 바닷가에서 태어난 허련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기 어렵다. 다만, 허련이 세곡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아들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다.

세곡을 서울에 납부하는 일은 고역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사회의 유력 인사가 아니면 담당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다. 허련 가문에서 세곡 운반 일을 언제부터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허련의 아들이 이 일에 종사하고 있음은, 진도에서 허련 집안의 위상과 경제력을 엿보게 해준다.

허련은 ‘견문도 넓지 못하였다’는 기록으로 봐, 유학 공부를 깊이 한 것 같지는 않다. 어린 시절 허련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허련의 재주를 알아본 숙부는 “내 조카는 반드시 그림으로 일가를 이룰 것”이라며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구해 준다. 1797년(정조 21) 왕명으로 편찬된 ‘오륜행실도’는 효자, 충신, 열녀의 행적을 기록하고 그림으로 그린 수양서였다. 허련은 ‘오륜행실도’의 그림을 모방하며, 화가의 꿈을 키운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만난 분이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였다.

-초의와 추사의 제자가 되다
1835년(헌종 1), 허련이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거처하던 초의를 찾는다. 당시 초의는 50세였고, 허련은 26살이었다.

허련은 저서 ‘몽연록’(夢緣錄)에서 초의스님과의 첫 만남을 “을미(1835)년 대둔사(대흥사) 한산전으로 초의스님을 찾아갔다. (나를) 따뜻하게 대해줬고, 방을 내줘 머물게 했다”고 회상했다.

오늘 초의는 차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진 다승(茶僧)으로 유명하지만, 초의는 시문과 그림에 뛰어난 승려였고, 당대 예림의 총수였던 동갑내기 추사 김정희와는 절친이었다.

초의가 시와 그림에 능했음은 다산 정약용의 분부를 받아 그린 ‘다산도’(茶山圖)나 ‘백운동도’(白雲洞圖)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특히 그의 불화 솜씨는 대단했다.

초의가 그린 불화의 격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1939년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소식이 끊기고 막혔다가 마침 종자(從者, 시중드는 자)로부터 그대(초의)가 그린 관음 진영을 얻어 친견하게 됐습니다. 정말 뛰어난 호상(好像)입니다. 관음 진영을 그린 필법이 언제 이런 단계에 이르렀습니까? 경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허련이 찾은 초의는 차로 유명한 초의스님이 아닌, 화가 초의스님이었다.

첫 만남 이후 허련은 초의의 제자가 됐고, 불화 특히 진한 먹을 사용해 그리는 초묵법(焦墨法)을 전수받는다.

허련이 초의에게 초묵법을 전수받았음은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대개 초묵법은 전하기 쉽지 않은 오묘한 진리인데, 우연히 허소치(허련)가 이어 드러냈으니, 전해지고 전해진 초묵법이 또 그대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여겨집니다”고 한 평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허련은 초의의 소개로 해남 녹우당에 있는 해남 윤씨 가문이 보관하고 있던 ‘공재화첩’과 ‘고씨화보’(顧氏畵譜)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었다. 실제로 허련은 윤두서와 윤덕희 등의 화보를 본 후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고 감동하고 있다.

허련을 추사 김정희에게 소개한 분도 초의다. 초의는 1838년(헌종 4) 금강산을 유람한 후 이듬해에 추사를 만나 허련의 그림을 보여준다.

허련의 재주를 한눈에 알아본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 이만한 그림이 없다(鴨綠以東 無此作矣)”면서 “허군(허련)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뤘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할 뿐입니다”고 평가한다.

또한 초의에게 “이 같은 출중한 인재를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서울에서 지낸다면 그의 향상은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마음 가득 기쁨으로 넘치니 즉시 서울로 올라오게 하십시오”라고 재촉하는 편지를 보낸다. 초의는 서둘러 이 사실은 허련에게 알린다.

초의의 편지를 받은 허련은 재종형과 함께 급히 상경, 초의의 편지를 품에 안고 서울 추사 댁에 도착한다. 허련은 초의의 편지를 올리고 추사에게 인사를 드린다. 예원의 총수 추사 김정희의 제자가 된 것이다.

허련의 호 ‘작은 바보’ 라는 뜻의 ‘소치’(小痴)도 추사 김정희가 지어준 이름이다. 원나라의 문인화가 황공망의 호가 ‘큰 바보’라는 뜻의 ‘대치’(大痴)였다. 추사는 황공망의 화풍을 좋아했고, 그래서 제자가 된 허련에게 조선의 황공망이 되라며 ‘소치’란 호를 지어준 것이다.

허련은 초의와 추사, 두 스승을 극진히 모신다.

소치 허련이 헌종을 만났을 때, 헌종은 소치에게 “호남에 초의라는 승(僧)이 있다던데, 그 지행이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이에 소치는 “세상에서 고승이라 일컫습니다. 내외전(內外典)에 정통하며 사대부와 종유(從遊)가 많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헌종은 초의에게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 艸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내린다. 왕사 제도가 폐지된 조선 중기 이후에 시호를 받은 스님은 초의가 유일했다.

추사가 정치적 모함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자, 허련은 해남까지 스승을 따라가 배웅했고, 제주에서 아홉 해 동안 유배살이할 때 세 번이나 바다를 건너 스승 곁을 지킨다.

초의는 제주도로 가는 허련 편에 차를 보냈고, 차를 받은 추사는 허련 편에 ‘일로향실’(一爐香室)이라는 다실(茶室)의 현판을 써 보낸다. 지금 대흥사 동국선원에 걸려 있다.

운림산방 전경(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다
추사는 유배지 제주도를 세 번이나 찾아 준 소치 허련을 진정으로 아꼈다.

허련은 추사의 소개로 전라우수사 신관호,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 그리고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민영익 등과 교류한다. 신관호는 1876년 조선의 전권대사가 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신헌이다.

영의정 권돈인의 도움으로 40살이 되던 1848년(헌종 14), 허련은 왕이 내린 붓으로 다섯 달 동안 다섯 번이나 임금을 만나 그림을 그려 바치는 영광을 누린다. 그 덕으로 허련은 왕의 총애를 얻어 무과 시험에 합격한 후 훗날 명예직이지만 정2품 지중추부사에 오른다. 붓 하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치 허련은 더 이상 궁벽한 유배지 출신의 시골뜨기가 아닌, 조선 최고의 남종화가였다.

그런 소치 허련을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은 삼매(三昧)라 평했다. 삼매란 모든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소치의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소치 허련이 무과에 급제한 다음 해인 1849년, 헌종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어 1856년(철종 7), 스승인 추사마저 세상을 뜨자, 소치 허련은 이듬해인 1857년(철종 8) 고향 진도에 낙향,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며 그림에 몰두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소치 영정을 모신 사당 ‘운림사’

‘운림’(雲林)은 ‘구름이 가득한 숲’이라는 뜻이고, ‘산방’(山房)은 ‘산속에 지은 작은집’이니, 소치의 사랑채인 화실의 당호(堂號) ‘운림산방’은 ‘구름 숲속의 작은집’이라는 뜻이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운림’은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 1301-1374)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니, 운림산방에는 그가 닮고자 했던 왕유도, 대치 황공망과 운림 예찬의 혼도 깃들어 있다.

운림산방은 사랑채, 안채, 작은 정원으로 이뤄진 전통 정원 겸 화실로, 오늘날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진도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다. 그러나 운림산방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소치 허련의 화맥이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4대 임전 허문, 5대 허진 등 5대째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현장이라는 점이다. 허련 가문으로 인해 남도는 예향으로 불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소치 허련, 그는 궁벽한 유배의 땅 진도에서 태어났지만, 초의와 추사를 만나면서 조선 최고의 화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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