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 뇌출혈에도 다시 일어난 ‘야구 거인’…불멸의 4할타자를 보내며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지난 13일 오후 4시께 김소식(83) 원로 야구인(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백인천 장례위원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야구선수로서의 삶은 경동고와 농업은행(농협 전신) 시절, 일본 프로야구 19년, 그리고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츨범한 1982년, 엠비시(MBC) 청룡 창단 감독 겸 선수로 세웠던 저 불멸의 기록 4할1푼2리의 타율, 엠비시 청룡 구단을 이어받은 엘지(LG) 트윈스의 창단 감독(1990년)으로 팀을 첫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의 정점에 섰던 것으로 뭉뚱그릴 수 있겠다.
고인은 그 후 롯데 오리온스(1977~1980년), 긴테쓰 버팔로즈(1981년)를 끝으로 일본 프로무대를 접고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 즈음해 귀국, 초대 엠비시 청룡(엘지 트윈스 전신)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고인보다 3년 앞서 도에이 구단에 입단했던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존재인 재일교포 장훈(86)의 회고에 따르면 '땜질용 포수'로 출발했던 '선수 백인천'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혈서 쓰고 일본 프로야구 밟은 첫 개척자
지독한 연습 19년간 2할7푼8리 1831안타

지난 13일 오후 4시께 김소식(83) 원로 야구인(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백인천 장례위원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백인천 전 감독이었다. “김 위원, 나야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 고마웠어. 나 지금 좋아.”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또렷했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힘을 내시라”는 김 부회장의 말을 끝으로 통화는 닫혔다.
다음날인 14일 새벽 5시, 충남 천안시 거주지에서 요양보호사 박정자(72)씨가 평소와 다른 거친 기침 소리를 듣고 백 전 감독의 상태를 급하게 살폈다. 9년 동안 백 전 감독을 정성으로 병 수발들었던 요양보호사였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있었는데 5시쯤 감독님의 기침 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따뜻한 물을 한 모금 삼키게 한 다음 눈동자를 보니까 초점이 없었다. 혼수상태였고 함께 있던 남자 요양보호사가 인공호흡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바로 119 구급대를 불러 인공호흡을 시도했으나 변화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 같다’는 말에 심정지 상태로 거주지에서 가까운 순천향병원으로 서둘러 갔다.”

그 뒤 백 전 감독이 별세했다는 언론 속보가 연이어 터졌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동안 치료를 받아왔던 단국대병원으로 이송한 뒤 그가 희미하게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아직 ‘의학적 사망’이 아니었던 것이다.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채 그는 삶의 마지막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었다. 14일 오후 10시께는 혈압이 117/70㎜Hg으로 정상인이나 다를 바 없는 ‘이상 현상’도 나타났다. 아마도 그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아니었을까. 그는 2년 전에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해 놓았던 터.
백인천 전 감독은 15일 새벽 6시41분에 운명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의 시계도 거기에서 멈췄다. 1997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 처음으로 찾아왔던 뇌경색, 그 뒤 5차례나 겪은 뇌출혈 때마다 초인적인 의지로 버텨내며 주위에 경이로움마저 안겨줬던 고인이 이번에는 꺾이고 말았다.
고인의 치열했던 한 삶은 오기와 도전, 그리고 개척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고인은 1942년 중국 장쑤성 우시에서 태어나 8·15 광복 뒤, 부친의 고향인 평안북도 철산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전에 월남했다.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고인은 빙상으로 운동에 눈을 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야구를 접했고 경동고 시절 포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야구선수로서의 삶은 경동고와 농업은행(농협 전신) 시절, 일본 프로야구 19년, 그리고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츨범한 1982년, 엠비시(MBC) 청룡 창단 감독 겸 선수로 세웠던 저 불멸의 기록 4할1푼2리의 타율, 엠비시 청룡 구단을 이어받은 엘지(LG) 트윈스의 창단 감독(1990년)으로 팀을 첫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의 정점에 섰던 것으로 뭉뚱그릴 수 있겠다.

무엇보다 고인의 일본 프로야구 무대는 한국에서 건너간 첫 개척자로서의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됐다.
고인은 1962년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 1974년 니혼햄 파이터스, 1975년 다이헤이요 라이온스로 이적했고, 그해에 퍼시픽리그 타격왕(3할1푼9리2모)에 올랐다. 고인은 그 후 롯데 오리온스(1977~1980년), 긴테쓰 버팔로즈(1981년)를 끝으로 일본 프로무대를 접고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 즈음해 귀국, 초대 엠비시 청룡(엘지 트윈스 전신) 감독 겸 선수로 뛰었다.
고인보다 3년 앞서 도에이 구단에 입단했던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존재인 재일교포 장훈(86)의 회고에 따르면 ‘땜질용 포수’로 출발했던 ‘선수 백인천’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열등감을 이겨내기 위해 백인천은 지독한 연습에 매달렸다. 당초 일본 구단과 계약할 즈음 일본 매스컴은 고인에 대해 “강견, 강타, 준족을 갖춘 몸무게 20관(75kg)의 백(白)은 다리도 빠르고 탄력도 있다”고 평가했지만, 고인은 스스로 ‘노력형’이라고 겸양했다.
고인이 일본 프로야구에 정착하기까지 겪은 숱한 고난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장훈도 마찬가지였지만 고인 역시 “조센징”소리를 듣는 것은 보통이었다. 민족적인 멸시와 천대, 모욕과 괄시가 다반사였다. 오죽했으면 상대 투수의 빈볼성 투구에 대비해 일부러 투수에게 배트를 던지는 연습을 장훈과 할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고인은 일본에 갈 때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쓴 혈서 두장을 들춰보며 각오를 다졌다. “1군 선수로 뛰지 못하면 죽어도 귀국하지 않는다, 성공할 때까지 내 조국은 없다”
당시 일본 매스컴에도 대서특필됐던 고인의 ‘프로복서 출신 일본 심판 구타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1970년 5월23일, 도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렸던 도에이-긴테스전에 고인은 2번 타자로 출장했다. 볼카운트 0-2에서 3구째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낮은 공을 주심이 스트라이크로 선언, 억울하게 삼진을 당했다. 고인은 평소 제스처가 크기로 소문났고 편파판정이 심한 주심을 향해 “쿠소야로(똥 같은 놈이라는 일본 말)!, 그렇게 낮은 볼이 왜 스트라이크냐”며 오른손으로 그의 배를 쿡 찔렀다. 주심은 지체 없이 왼손을 높이 치켜들며 “퇴장”을 선언했다. 순간 고인은 ‘목 감아치기’로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몇대 쥐어박았다. 더그아웃에서 심상치 않은 상황을 지켜보던 선배 장훈 등 선수들이 득달같이 뛰쳐나와 뜯어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심 쓰유사키 모토미는 78전 53승11패의 전적을 보유한 전직 프로복서 출신이었던 것이다.
1981년 고인은 부친의 별세로 야구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된다. 한국에서 확실하게 야구가 프로화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뛰었다. “너희 나라에 가서 야구를 해라”라는 일본 관중들의 야유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러던 참에 부친의 타계와 장훈의 권유로 귀국, 이용일(작고) 초대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의 주선으로 문화방송(MBC) 감독을 맡게 됐다. 고인은 “프로야구는 이런 것”이라는, 후배들에게 시쳇말로 본때를 보여주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마침내 1982년 3월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던 개막전에서 고인은 홈런도 날렸고 이종도의 역전 결승 만루홈런으로 한국 프로야구의 미래에 청신호를 켰다. 감격에 북받쳐 경기 후 고인은 울먹였다. ‘시대와의 불화’를 마다치 않았던, 마냥 모질 것만 같았던 고인의 다른 성정이었다.
사생활 논란, 재계약 분란, 배트 시비 등 선수 은퇴 후 고인을 따라다닌 일화는 그의 후반기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 할지라도 “야구를 안 하면, 못산다. 단순히 좋아한다, 미칠 정도로 좋다를 넘어서 중독자가 돼야 한다”는 그의 ‘야구 중독론’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021년 어느 날, 그가 머물고 있던 경기 평택에 찾아갔을 때 옛일을 돌아보던 고인이 자신의 사인과 좌우명이었던 ‘노력자애’(努力自愛), 그리고 ‘Bic 0.412’를 써넣은 공과 소형 기념 배트를 건네주던 모습이 선연하다.
두차례 이혼으로 고인은 모든 재산을 상대에게 넘겨주고 빚도 떠안았지만, 주변에 자신의 아픈 가정사를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말년에 병마와 싸우며 2017년부터 부자유스런 몸을 이끌고 경기 일산을 떠나 강원 삼척, 평택, 천안으로, 월셋집을 전전하며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는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고인은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사인 공을 건네며 오로지 야구 얘기로 일관했다. 옹색했던 삶도 결코 그의 야구 사랑은 막지 못했다.
고인은 몇년 전 “나이 먹고 갈 때가 되니 요즘 하느님한테 드리는 기도는 모든 사람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스르륵 조용히 떠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면서. 고인은 지난 17일 화장 후 수목장으로 경기도 용인에 누웠다.
한국 프로야구 유일한 4할대이자 한 시즌 최고 타율인 4할1푼2리, 일본 프로야구 19년간 세운 통산 2할7푼8리의 타율, 1831안타, 209홈런, 776타점이 고인이 남겨놓은 기록이다.
홍윤표 오센(OSEN) 선임기자·초대 야구기자회 회장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종합특검, 김건희 ‘수사 무마’ 의혹 이창수 전 지검장 등 5명 기소
- 광주서 무릎 꿇었던 김종인 “이진숙 같은 사람 말 들으면 국힘은…”
- 안규백 “북 핵무기 80∼120개…정확한 수치 언급은 제한”
- 김윤덕-오세훈, ‘용산공원 청년주택’ 입장차만 확인…다음주 다시 회동
- “밥 먹여야지” 평교사로 돌아온 교장선생님, 5명 살리고 떠나
- ‘장미란씨 실종’ 3시간 만에 종결시킨 경찰…3개월 뒤에야 집중수색
- 트럼프의 인간 ‘애착 담요’ 35살 보좌관…“백악관 진짜 문고리”
- 세계 첫 암백신 임상 3상 성공...개인맞춤형 항암치료 시대, 한 발짝 앞으로
- 8월 말 ‘처서 매직’ 없다…당분간 33도 더위와 소나기 계속
- [단독] 학대 가해자에 “아이 잘 있나요?”…교회 사망 11살, 못 지킨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