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수치’였던 할아버지…손녀가 되살린 ‘독립운동가’의 삶 [플랫]
항일 동맹휴학·공산주의 비밀결사 활동
조부 사후 66년간 가족 생존 지킨 할머니
독립운동가 아내도 영웅이란 관점 담아
아무도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를 ‘범죄자’이자 ‘집안의 수치’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그렇게 잊혔다.
지금 할아버지 이철하(1909~1936)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그는 충남 공주 최초의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었고 이후 공산주의 계열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가입해 비밀결사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일본 경찰의 신문 조서 속 이철하는 공권력이나 수감 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이 당당하다.

한국계 미국인 기자·작가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한겨레출판·장상미 옮김)은 ‘손녀가 밝혀낸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요약은 앙상하다. 리의 야심은 가족사 안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는 동시에, 빈자리를 둘러싸고 할머니, 아버지, 자신으로 이어진 가족 3대의 역동을 그리는 것이었다.
리가 수많은 역사학자에게 묻고 국가기록원을 뒤진 끝에 한 출판사 대표가 법원 지하실에서 비공식적으로 입수해 간직했던 일본 경찰의 신문 기록을 구입한 것은 2000년이었다. 할아버지를 찾는 이야기는 사실상 여기서 끝나지만, 리가 이후 미국에서 <비밀의 들판>을 내기까지는 20년 넘게 걸렸다. 최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리는 “건조한 역사서가 아니라 문학적 회고록을 쓰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리의 가족은 1970년대 미국 휴스턴 교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아버지는 통계학 교수였고, 가족은 안정적인 생활을 누렸다. 리는 “안락한 가정에서 자란 미국인”이었다고 돌이켰다.

다만 리는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고 적었다. 집에서, 일자리가 있던 미국 서부와 동부에서, 가족과 함께 방문한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리는 “조부모님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그것이 나와 아버지의 삶에 거대한 구멍처럼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리는 이 정체성의 구멍을 ‘세대 간 트라우마’(intergenerational trauma)로 설명했다. “세대에 걸친 트라우마의 선상에 저희 아버지가 계신 거였어요. 제 자녀 세대에는 이 트라우마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이 책을 써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지만, 오랜 시간 남편의 삶에 대해 침묵했다. 남편이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됐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둘의 결혼 생활은 12년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의 세월 동안 남편은 학업으로 외지에 나가 있거나 수감 생활을 했다. 게다가 할머니는 한국전쟁으로 피란을 가기 전 남편의 책이나 편지 같은 소중한 유품을 모두 태웠다. 한국군이든 북한군이든, 유품을 손에 넣었을 때 남은 가족에게 닥칠 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뜬 이후로도 66년을 더 살았다. 리는 “할아버지는 27년을 사셨지만 할머니는 90년 넘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살며 가족들을 생존시켰다. 우리 가족의 삶에는 할머니가 더욱 중요했다”고 말했다. 짧고 굵게 살다 간 독립투사 못지않게, 한 세기 가까이 한 가족을 지켜낸 주부 역시 영웅이라는 관점이 책 속에 담겼다. <비밀의 들판>은 할아버지의 저항을 역사에 기록하고, 할머니의 생존을 기리는 노력이다.

<비밀의 들판>에는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국의 친척이나 학자들에 대한 인상도 적혀 있다. 모두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연구실에 찾아갔다가 대부분 중년 남성인 한국인 교수들에게서 ‘철없는 재미교포 여자애’로 냉대받은 경험도 담겨 있다. 리는 “내가 백인 여성이라면 달랐을 것이고, 백인 남성이라면 더 달랐을 것”이라며 “이후 통역사와 함께 찾아가 영어를 써서 ‘미국 주요 잡지사의 미국인 저널리스트’로 저 자신을 보여주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서부의 수많은 1세대 이민자는 살아남느라 바빠 자신의 가족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비밀의 들판>은 할머니와 한 3차례 인터뷰를 골자로 서술됐다. 현재 가족과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리는 아시아학 전공 학생의 워크숍, 관심 있는 독자와의 북토크에서 함께 책을 읽으며 가족사 서술 방식을 논하곤 한다. 리는 “‘가족 인터뷰하기’는 역사를 가장 개인적이면서 생생하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며 “특히 전쟁, 식민지 같은 가슴 아픈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어르신들에게 접근하는 실용적인 팁을 많이 공유한다”고 말했다. 명절이나 음식같이 편안하게 꺼낼 수 있는 소재에서 시작해 차츰 핵심적인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리는 “특히 아시아계 가정에서는 ‘이거 학교 과제 때문에 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거의 전적으로 협조해주신다”며 웃었다.
진공 상태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역사와 호흡한다. 리는 “당신의 가족 안에 역사가 숨 쉬고 있고, 바로 거기서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메시지를 젊은 독자에게 전할 수 있다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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