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단풍인 줄 알았는데…” 붉게 타들어가는 천년고도 경주의 소나무

황기환 기자 2026. 8. 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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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월지·월성 곳곳 고사목…핵심 사적지까지 재선충병 확산
관광객 탄식 속 ‘신라의 풍경’ 위기…10월 대대적 방제 예고
▲ 경주 월성 언덕을 따라 길게 이어진 푸른 숲 사이로 재선충병에 감염돼 타들어가는 소나무들이 흉물스럽게 방치돼 관광객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 황기환 기자

매년 수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 경주.

그 심장부인 도심권 핵심 사적지가 때아닌 붉은빛으로 신음하고 있다. 마치 가을 단풍이 일찍 물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소나무 에이즈'라 불리는 소나무재선충병이 할퀴고 간 참혹한 상흔이다.

외곽 산림과 국립공원을 초토화시킨 재선충병의 마수가 이제는 수많은 인파가 몰리는 시내 유적지까지 여지없이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지난 17일 찾은 경주의 야경 명소 동궁과월지의 풍경은 경탄 대신 짙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화려한 궁궐터와 인공 호수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경관으로 이름을 떨치는 이곳이지만, 낮에 마주한 주변 호위림의 상태는 처참했다. 짙은 녹음을 뽐내야 할 소나무 군락 곳곳에서 붉은빛과 누런빛으로 말라 죽어가는 고사목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사적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이곳 동궁과월지에서만 30여 그루의 소나무가 감염된 것으로 파악된다. 듬성듬성 병색이 완연한 붉은 소나무들은 아름다운 누각과 대비돼 호수 수면에 비치며 병마의 심각성을 거울처럼 보여줬다.

인근에 위치한 신라 옛 왕궁터인 월성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관광객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출입구에서부터 좌우측으로 늘어선 소나무들이 일제히 재선충에 감염돼 붉은색을 띠며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언덕을 따라 길게 이어진 푸른 숲 사이로 타들어 간 고사목 소나무 10여 그루가 흉물스럽게 방치된 광경은 뼈아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참담한 광경을 지켜보는 시민과 관광객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가족과 함께 온 관광객 김모 씨는 "처음엔 나무 색깔이 붉어서 벌써 단풍이 들었나 싶어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소나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어우러진 풍경이 망가져 가슴 아프다"고 탄식했다.

▲ 경주의 관광명소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동궁과월지에 재선충병이 덮쳐 곳곳에 붉게 물든 소나무들이 보인다. 황기환 기자

매일 아침 월성 주변으로 운동을 나온다는 시민 최모 씨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최근 벌겋게 죽은 나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 출입구부터 보기 흉하다"며 "천년고도의 상징인 도심 소나무들이 전부 사라질까 봐 밤잠을 설칠 지경"이라고 우려했다.

경주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방재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적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상반기에 월성 일대에 예방을 위한 나무주사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극심한 폭염 등 기후적 요인으로 인해 확산이 가속화됐다"고 밝혔다.

감염목이 급증하면서 사적지 자체 정비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상태다. 이에 경주시는 관련 부서와 협조해 오는 10월부터 대대적인 고사목 제거 및 일괄 방재 작업에 돌입한다는 계획이다.

도심 유적지까지 깊숙이 파고든 재선충으로부터 신라의 풍경을 지키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획기적인 대책과 집중적인 예산 지원이 시급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