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안 마시는 시대…한국 증류소는 왜 문을 열었나 [정보연의 시간을 마시는 기술]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지난 1일 찾은 열린 충북 충주 다농바이오 증류소의 비지터 센터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술병이나 증류기가 아니라 먹빛이 선명한 붓글씨였다. 술의 이름이 먹빛 글씨가 되어 새 공간의 문 앞에 걸리는 순간은 한 증류소가 자신의 이름과 제품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내보이는 선언처럼 보였다.
다농바이오의 비지터 센터는 충주시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조성됐다.
다농바이오가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생산의 변수를 하나씩 자신의 통제 안으로 가져오려는 태도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 증류주의 다음 시간

지난 1일 찾은 열린 충북 충주 다농바이오 증류소의 비지터 센터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술병이나 증류기가 아니라 먹빛이 선명한 붓글씨였다. 전찬덕 서예가는 이날 개관식이 열리기 전인 지난달 말일 ‘다농바이오’를 쓴 데 이어, 개관식 현장에서 이곳의 핵심 제품인 ‘수록’과 ‘가무치’를 힘찬 필치로 완성했다. 술의 이름이 먹빛 글씨가 되어 새 공간의 문 앞에 걸리는 순간은 한 증류소가 자신의 이름과 제품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내보이는 선언처럼 보였다.

술이 잘 팔리는 시대라면 증류소는 술만 만들면 된다. 그러나 전반적인 주류 소비가 줄어드는 시대에 증류소는 무엇을 더 만들어야 할까. 이날 새로 문을 연 비지터 센터를 둘러보고, 가무치 스피릿과 오크 숙성 소주 수록을 맛보며 그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발견했다. 이제 증류소는 술뿐 아니라 그 술이 태어난 장소를 사람들이 찾아야 할 이유까지 만들어야 한다.
술은 병 안에서 완성되지만, 브랜드는 그 술이 만들어진 장소를 경험할 때 비로소 입체적으로 이해된다. 스코틀랜드와 일본의 증류소가 생산 시설을 넘어 여행의 목적지가 된 것처럼, 국내에서도 여러 양조장과 증류소가 제조 현장을 방문객에게 열고 있다. 지역의 원료와 사람, 생산 방식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려는 움직임이다.
한국의 술은 오랫동안 가문과 지역의 제조법을 계승하는 전통을 중심으로 설명돼 왔다. 그런데 최근 한국 증류주의 변화를 이끄는 생산자 중에는 물려받은 양조장이나 제조법 없이 처음부터 자신의 기준을 세운 이들이 적지 않다. 문경의 오미나라는 오미자와 사과를 와인과 증류주로 확장했고, 김창수 위스키와 기원은 한국 싱글몰트 위스키의 가능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실험하고 있다. 다농바이오 역시 물려받은 양조장이나 제조법 없이 지역 농산물과 미생물, 발효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술의 기준을 세워왔다.
왜 새로운 사람들이 증류소를 세우기 시작했을까. 사람들은 술을 덜 마시지만, 한 병을 선택할 때는 더 많은 것을 묻기 시작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왜 이곳에서 만들었는지까지 살핀다. 오래된 역사 대신 분명한 제조 철학과 개선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다면 작은 증류소에도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다농바이오의 비지터 센터는 충주시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조성됐다. 한 기업의 제품만 진열하는 쇼룸이 아니라 충주의 특산주와 지역 농산물을 알리고, 시음과 공연을 통해 방문객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술 소비가 줄고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규모가 작은 증류소가 제품 판매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증류소를 개방하는 일은 단순한 홍보를 넘어,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관광과 교육, 구매 경험으로 확장하는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황동민 헤드 블렌더가 직접 이끈 투어는 옹기에서 증류식 소주가 익어가는 곳에서 시작됐다. 쌀에 균을 배양해 입국을 만드는 작업실과 발효조, 독일 코테(Kothe)의 하이브리드 증류기가 놓인 증류실을 지나 두 곳의 숙성고로 이어졌다. 기존 숙성고가 다농바이오가 축적해온 시간을 보여준다면, 새 숙성고는 방문객이 그 시간을 직접 경험하는 곳이다. 비지터 센터의 스토어와도 연결돼 있어 술이 만들어지고 숙성되는 과정을 살펴본 뒤 자연스럽게 한 병을 고를 수 있도록 설계됐다.
다농바이오는 충주시 농산물유통과의 중개를 통해 지역 농가와 쌀을 계약 재배한다. 한 번의 생산에 사용하는 쌀은 약 600㎏이다. 이 가운데 400㎏으로 고두밥을 짓고, 나머지 200㎏에는 ‘순창 1호 토종 백국균’을 배양해 쌀 입국을 만든다. 초창기에는 외부에서 입국을 구입했지만, 현재는 자체 입국만을 사용한다.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발효의 출발점까지 자신의 관리 안으로 가져온 것이다.

발효조 안에서는 쉽게 말해 막걸리와 비슷한 쌀 발효액인 ‘술덧’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만 그대로 마시는 막걸리가 아니라 증류를 위한 원료다. 약 일주일간 발효한 술덧의 알코올 도수는 약 16%에 이르며 단맛은 거의 남지 않는다. 잔당이 남으면 상압 증류 과정에서 바닥에 눌어붙어 탄맛이나 쓴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도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당을 충분히 소진해 깨끗한 증류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완성된 술덧은 코테의 하이브리드 증류기에서 증류된다. 단식 증류기의 솥 위에 여러 단의 정류판과 환류 장치를 결합한 설비다. 증기가 정류판을 통과하며 응축과 기화를 반복하기 때문에 알코올과 여러 향미 성분을 보다 정교하게 분리할 수 있다. 상압 증류로 쌀에서 비롯된 향과 질감을 충분히 끌어내면서도, 정류의 정도를 조절해 원하는 풍미와 순도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증류기에 폭넓게 사용된 구리는 발효 과정에서 생긴 황화합물을 줄여 향을 한층 깨끗하게 다듬는다.
다농바이오가 술을 만드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생산의 변수를 하나씩 자신의 통제 안으로 가져오려는 태도다. 개관식에서 한경자 대표는 어려움을 겪었던 순간과 그때마다 무엇을 바꾸었는지를 과장 없이 설명했다. 사용하는 물에서는 염소를 제거하되 미네랄은 남겨 지역의 물이 지닌 성격을 살리고자 했다.
오크 숙성에서는 원액과 나무 향의 균형을 잡는 데 시행착오를 겪은 뒤, 통 안쪽을 깎고 굽고 다시 태우는 STR(Shaved, Toasted, Re-charred) 방식의 캐스크를 도입했다. 초기에는 직원들이 직접 캐스크를 해체하고 토스팅한 뒤 다시 조립하는 작업에도 나섰다. 한경자 대표가 직원들이 “눈썹을 태워가며” 일했다고 표현할 만큼 시행착오가 뒤따랐다. 캐스크 역시 완성된 자재로 받아들이기보다 원하는 숙성의 방향을 찾기 위한 실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숙성고에는 버번과 포트, 페드로 히메네스, 올로로소, 맥주, STR, 국내산 참나무 등 다양한 캐스크 약 1,000개가 놓여 있다. 옹기에서 쉬게 한 증류식 소주는 ‘가무치’로, 여러 캐스크의 특성을 활용한 오크 숙성주는 ‘수록’으로 이어진다. 다농바이오는 앞으로도 캐스크의 수와 종류를 꾸준히 늘려갈 계획이다. 캐스크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생산량이 증가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훗날 블렌딩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향미의 선택지가 함께 늘어난다는 의미다. 좋은 캐스크는 부족한 원액을 감추는 화장이 아니라, 좋은 원액의 시간을 확장하는 도구여야 한다.


투어를 마친 뒤 알코올 도수 65도의 가무치 스피릿을 맛봤다. 가수와 숙성을 거치기 전의 원액이었지만, 높은 도수에 비해 알코올의 자극이 도드라지지 않았고 질감도 매끄러웠다. 쌀에서 비롯된 향은 또렷했으며, 숙성을 전제로 한 중간 단계의 원액이 아니라 스피릿 자체로 마셔도 충분할 만큼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황동민 헤드 블렌더는 계절에 따라 발효와 증류 결과가 달라지는 만큼 배치마다 변화를 살피며 공정을 조정한다고 설명했다. 매번 같은 결과를 기계적으로 복제하기보다, 달라지는 조건 속에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맛의 일관성을 찾아가는 일에 가까웠다. 숙성 전 스피릿의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은 STR 캐스크를 비롯한 이후의 숙성 실험까지 기대하게 했다.
여러 해외 증류소를 방문해온 일행들도 시음이 끝난 뒤 제품을 구매했다. ‘국산이니 한번 마셔보는 술’을 넘어 경험 많은 애호가의 선택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품질의 변화를 보여주는 현실적인 평가였다.
다농바이오의 계획은 술에서 끝나지 않는다. 발효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을 활용한 뷰티 제품도 준비하고 있다. 지역의 쌀이 입국과 술덧을 거쳐 증류주가 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기술이 또 다른 제품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하나의 증류소가 농업과 제조, 관광과 연구를 연결하는 지역 산업의 작은 거점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지터 센터 개관은 증류소가 완성됐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닫힌 공간에서 이어온 시행착오를 공개하고, 방문객의 평가를 다음 생산에 반영하겠다는 약속에 가깝다. ‘한국에서 만든 술’이라는 사실만으로 선택받는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한 병을 산 사람이 다음 배치를 궁금해하고, 한 번 방문한 사람이 달라진 술을 맛보기 위해 다시 찾아오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 번의 인상적인 한정판을 넘어 다음 병도 신뢰할 수 있는 품질, 가격을 설명할 수 있는 서사, 생산지를 여행의 목적지로 만드는 경험이 함께 필요하다. 지역 행정 역시 시설 지원에 그치지 않고 농산물과 술, 관광이 실제로 순환하는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좋은 증류소는 문을 여는 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으로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닷컴 버블처럼 터진다" 섬뜩한 경고…삼전닉스 개미들 '초비상'
- "주말엔 50만원 넘었는데"…2030 떠나자 골프업계 '초비상' [프라이스&]
- '혼자 살면 생활비만 더 나가요'…비명 터진 이유 있었다 [김익환의 부처 핸즈업]
- "코스피 다시 오른다"…간 큰 개미들 '18조 아찔한 베팅'
- "한국 경험 직접 할래요"…유럽서 韓 여행이 '대세' 된 이유
- "또 일본 갈 줄 알았는데"…5월 황금연휴 1위 여행지 어디?
- CIS, 첨단 정밀 장비로 日 배터리 업체도 홀렸다
- "한국에 최우선 공급하겠다"…중동 6개국 '깜짝 선언'
- "호텔서 커피 마셨더니…" 조회수 '300만' 대박 영상의 비밀 [현장+]
- "32만전자 간다"…삼성전자, 역대급 잭팟 예고에 주가 '들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