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골 박물관에 방치된 한글불화?…뉴욕 메트에도 전시됐었다

2026. 8. 18. 06:1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본 고치현 사가와초립 세이잔문고가 소장한 조선시대 불화 ‘안락국태자경변상도’의 일부. 화면 아래쪽에 이야기를 설명하는 초기 한글이 적혀 있다. /보배드림 게시판 캡처

“일본이 절대 공개하지 않는 한글불화가 고치의 시골 박물관에 방치돼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확산된 한 게시물의 주장이다. 이 게시물에 등장하는 그림은 일본 고치현 사가와정의 사가와정립 세이잔문고가 소장한 조선 불화 ‘안락국태자경변상도’로 확인된다. 작품의 존재와 소장 장소, 문화재적 가치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이 작품을 공개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온라인에서 확산한 이미지 글도 최근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현재 검색으로 확인되는 가장 이른 게시물은 2024년 5월 19일 보배드림에 올라온 ‘일본이 절대 공개 안하는 한글불화’다. 원영상은 2021년 11월 5일 방송된 KBS ‘다큐ON-임란포로 진주시마의 후예들’이다. 2021년 방송 장면이 2024년 여러 장의 이미지 글로 재구성됐고, 이 게시물이 광복절을 전후로 최근 다시 온라인을 도는 것으로 보인다. ‘임란포로, 진주시마의 후예들’ 방송에서는 작품이 일본의 한 도서관에 잠들어 있다고 소개했다. 이후 온라인에서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시골 박물관에 방치됐다”는 표현이 강조돼 퍼졌다.

안락국태자경변상도는 ‘월인석보 권8’에도 수록된 안락국태자 설화를 여러 장면으로 나눠 그리고, 각 장면의 설명을 한글로 적은 불화다. 비단에 색을 칠한 약 1m 크기의 족자로, 한글이 사용된 현존 회화 가운데 가장 이른 사례로 평가된다.

하지만 “세종이 한글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작됐다”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 현존 작품의 제작 시기는 1576년으로, 훈민정음 창제보다 130여 년 뒤다. 작품의 화기에는 비구니 혜원과 혜월이 먼지가 쌓이고 벌레가 먹어 형상을 알아보기 어려워진 옛 불화를 발견해 새로 그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지금의 그림은 이전부터 전해지던 불화를 1576년에 다시 제작한 작품인 셈이다.

작품이 일본에 건너간 경위에는 임진왜란이 자리 잡고 있다. 세이잔문고에 전해지는 기록을 분석한 노성환 울산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임진왜란에 참전한 도사 지역의 왜장 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전리품으로 가져와 부하에게 하사했고, 이후 후손과 일본 정치인 다나카 미쓰아키를 거쳐 세이잔문고에 기증됐다. 약탈 문화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연구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일본이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일본 미술사학계에서는 1969년 이 작품을 처음 논문으로 소개했고, 세이잔문고도 1997년 자체 연구지에 관련 논문을 실었다. 작품은 1996년 서울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국보전’에 출품됐고, 2009년에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한국 르네상스 미술 1400∼1600’전에 대여됐다. 메트 전시 도록에도 1576년 작품으로 사진과 소장처가 수록돼 있다. 국내에서도 관련 논문과 국립한글박물관 공개 강연이 이어졌다.

세이잔문고 역시 개인 도서관이 아니다. 세이잔문고를 소개하는 사가와정 공식 홈페이지는 “이름에 문고가 붙어 도서관으로 오해받지만 역사자료와 미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라고 설명한다. 1992년부터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립박물관으로 개관 시간과 관람료, 전시 일정도 공개하고 있다.

현재 세이잔문고 홈페이지에서 이 작품의 고해상도 이미지나 상세한 보존 상태를 확인하기 어렵고, 상설전시 작품으로도 소개돼 있지 않다. 공개 접근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은 가능하다. 그러나 오래된 비단 회화를 수장고에 보관하고 제한적으로 교체 전시하는 것은 손상을 막기 위한 통상적인 보존 방식이다. 공개 자료에서 작품이 훼손된 채 놓여 있거나 관리되지 않는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치현의 작은 공립박물관이 조선의 희귀한 한글불화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일본이 존재를 숨기고 있으며 작품이 방치돼 있다”는 주장은 과장됐거나 근거가 부족하다. 정작 따져야 할 문제는 ‘방치’ 여부가 아니라 임진왜란 때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의 정확한 유래와 소유권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