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파일] 미스터 션샤인처럼 성조기 달고 돌아온 여자, 미셸 스틸

김태현 기자 2026. 8. 18.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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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와 평양에서 온 실향민의 딸,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평범한 주부에서 '900만 납세자의 어머니'를 지나 한국계 첫 여성 주한 미국대사가 되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한 여성의 귀환

[우먼센스] 2026년 7월 30일 저녁, 인천공항에 내린 한 여성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관저도 대사관도 아니었다. 해방 이듬해, 월남한 피란민들의 손으로 일군 서울 저동의 영락교회였다. 방명록에 미셸 스틸은 이렇게 적었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여정을 기도로 시작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여기 있는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사진 주한 미국 대사관

그 교회는 반세기도 더 전, 그의 부모가 예배드리던 곳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역시 부모 손을 잡고 이 교회를 다녔다. 부임 후 첫 주일인 8월 2일에도, 그다음 주인 9일에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다시 이 교회를 찾았다. 공식 일정보다 먼저 부모의 교회를 찾는 것으로 대사로서의 첫걸음을 뗐다.

미셸 스틸(한국명 박은주)은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임명한 첫 주한 미국대사이자, 한국계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주한 미국대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한국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 다시 서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조선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간 이가 성조기를 달고 고국으로 돌아온 유진 초이의 이야기다. 미셸 스틸의 한국 귀환은 유진 초이를 떠오르게 한다. 유진 초이의 귀환에 고국을 향한 애증과 냉소가 배어 있었다. 반면 박은주의 귀환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 정면으로 끌어안는 방향이다. 스틸 대사는 태어난 나라를 '친정'이라 부른다.

신의주와 평양에서 온 실향민의 딸

박은주의 이야기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 부모의 실향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의 원적은 평안남도, 태어난 곳은 중국 상하이였다. 어머니의 고향은 평안북도 신의주. 6·25전쟁이 두 사람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 공산 정권 아래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난 부모는 각기 다른 곳에서 피란해 부산에서 만나 가정을 이뤘다. 

사진 미셸 스틸 X

부산에서 만난 두 사람 사이에서, 1955년 서울에서 그녀가 태어났다. 2026년 5월 그녀는 미 상원 청문회에서 이 대목을 "부모는 북한의 각기 다른 곳에서 한국으로 내려왔고, 그 덕분에 그들이 만나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부모가 정착해 예배드린 곳이 바로 실향민들이 세운 영락교회였다. 그녀의 부임 첫 행보가 왜 이 교회였는지, 그 뿌리를 알고 나면 이해되는 대목이다.

성장기는 순탄한 정착과 거리가 멀었다. 서울 추계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아버지가 오사카교육문화센터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가족 전체가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서 중·고교를 마치고 일본여자대학에 다녔다. 서울에서 나고 일본에서 자란 그에게 일본어는 두 번째 언어가 됐다.

일본에서 보낸 시절, 아버지는 딸에게 늘 미국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청문회에서 "우리가 일본에 살던 시절, 아버지는 미국을 희망과 자유, 번영의 등대로 여기며 나를 미국에서 공부하도록 권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은 옳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1975년 스무 살의 그녀는 가족과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영어는 그의 '세 번째 언어'였다.

옷가게 수선대의 워킹맘,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미국에서의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가족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연 옷가게가 삶의 터전이었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 곁에서 그녀는 물건을 팔고 매장을 쓸었으며, 손님이 맡긴 남성복을 직접 손봤다. 훗날 그녀는 "수선이 필요하면 지금도 해줄 수 있다"고 농담할 만큼, 그 시절 몸으로 익힌 솜씨를 잊지 않았다. 학업과 생계를 함께 짊어진 시절, 그녀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온종일 일손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 미셸 스틸 X

미국에서 그녀는 페퍼다인대학교를 졸업하고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1981년 결혼한 남편 숀 스틸은 변호사이자 정치인이었다.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의장을 지냈고 2008년부터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온, 당내에서 이미 자리 잡은 인물이었다. 그런 남편과 결혼한 뒤로도 그녀는 오랫동안 캘리포니아의 평범한 주부로 살았다.

그를 정치로 이끈 씨앗은 뜻밖에도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이민 1세대인 어머니는 영어가 익숙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어느 날 부당한 세무조사가 들이닥쳤다. 세무서에서 온 편지 한 통에 공포를 느낀 어머니는, 따져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부과된 세금을 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영어를 몰라, 제도를 몰라 억울하게 당하는 이민자들을 위해 직접 목소리를 내겠다고 결심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1992년 LA 폭동이었다. 한인 상점들이 잿더미로 변하는데도, 그 억울함을 전할 통로가 동포 사회엔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한인 사회의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일이 절실하다 판단한 그녀는 공화당에 입당하며 주부에서 정치인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평소 내성적이던 성격을 스스로 깨부수며 뛰어든 길이었다.

'철의 여인', 900만 납세자의 어머니가 되다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1993년 리처드 리오단 LA 시장 후보 캠프에 합류한 것을 계기로, LA시 소방국 커미셔너·카운티 아동가족위원장을 거쳐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의장에까지 올랐다. 2006년, 세법을 몰라 억울하게 세금을 물던 한인 영세 자영업자들을 대변하겠다며 캘리포니아주 조세형평국 위원 선거에 출마해 한국계 최초로 당선됐다.

사진 미셸 스틸 X

조세형평국은 미국에서 유일한 선출직 조세기구다. 900만 캘리포니아 납세자를 관할한다 하여 그에게는 '900만 납세자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루 두세 시간만 자며 유권자를 직접 만나러 다닌 투혼의 결과였다. 억울한 어머니 한 사람을 위해 시작한 일이, 선출직 당선까지 이어진 셈이다.

그녀는 이후 4년마다 선거에서 승승장구하며 당선됐다. 2014년 오렌지카운티 수퍼바이저에 한국계 최초로 당선됐고, 2020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캘리포니아 제48구에서 현역 민주당 의원을 1.8%포인트 차로 꺾은 근소한 승리였다. 남편의 성 '스틸(Steel)'에 빗대어 '철의 여인'이라 불린 그녀는, 영 김·메릴린 스트릭랜드와 함께 미 의회 최초의 한국계 여성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첫 패배는 2024년에 찾아왔다. 3선에 도전한 그녀는 민주당의 데릭 트란에게 약 600표 차로 석패했다. 정치 인생 첫 낙선이었다. 하지만 이 패배는 그녀를 워싱턴 정가 밖으로 밀어낸 대신, 서울로 가는 길을 열었다. 낙선 직후부터 그녀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한 미국대사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의정 활동에서 그녀가 유독 목소리를 높인 지점은 '여성'과 '한국계'가 만나는 자리였다. 2021년, 하버드대 로스쿨 마크 램지어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자발적 계약을 맺은 매춘부'로 왜곡한 논문을 내자, 그녀는 트위터에 "역겹다"며 강경하게 비판하고 한국계 의원들과 함께 미 의회 차원의 대응을 촉구했다. 파장은 즉각적이었다. 이튿날, 잡혀 있던 주미 일본대사와의 자리가 일본 측 통보로 돌연 없던 일이 됐다. 에둘러 드러낸 불쾌감이었다. 같은 해 애틀랜타 총격 사건이 아시아계를 겨냥하자, 그녀는 하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아시아계 의원들과 함께 희생자를 추모하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실향의 상처는, 입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024년 그녀는 '한국계 미국인 이산가족 국가등록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전쟁으로 북녘에 가족을 두고 온 동포들의 사연을 국무부가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하며 상봉을 뒷받침하자는 취지였다. "수만 명의 한국계 미국인이 여전히 가족과 생이별 상태입니다. 더 늦기 전에 가족 재회를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피란 가정에서 자란 딸이었기에 나올 수 있는 문장이었다.

반세기 만의 귀환, 성조기와 태극 사이에서

그의 곁에는 늘 남편 숀 스틸 변호사가 있었다. 캘리포니아 공화당을 이끈 이력에 더해 전국위원회의 당내 큰손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말을 넣을 수 있는 인물로 통스틸 한다. 대사가 중앙 정치로 발돋움하는 데 남편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정설이다. 두 사람은 부부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40여 년을 함께 걸어왔다.

사진 청와대

부임 이후에도 동행은 이어졌다. 인천공항 입국, 외교부 방문, 8월 1일 남대문시장 나들이까지 부부가 함께였다. 상인과 호떡을 든 인증샷, 남대문 배경의 손하트 사진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됐다. 

2026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은 오랜 인연이 있던 그를 주한 미국대사로 전격 지명했다. 그녀는 트럼프 1기 시절 대통령 직속 아시아·태평양계 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지냈고, 2024년 총선에서는 트럼프의 공개 지지를 받았다. 6월 17일 상원은 찬성 55표, 반대 39표로 인준안을 가결했고, 7월 30일 그녀는 인천공항에 내려섰다. 미국 땅을 밟은 지 오십 년 만의 귀향이었다.

실향민 부모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가, 반세기 만에 미국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태어난 나라에 돌아온 것이다. 여성 주한 미국대사로는 2008년 캐슬린 스티븐스에 이어 두 번째, 한국계로는 성 김에 이어 두 번째, 그리고 한국계 여성으로는 최초다.

마침 워싱턴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주미대사도 여성인 강경화 대사다. 공교롭게 두 사람은 1955년생 동갑이다. 두 나라가 나란히 여성 대사를 두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다시 이 땅에 서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물론 그의 귀환을 따뜻한 서사로만 읽을 수는 없다. 그의 앞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현안들이 놓여 있다. 인준 청문회에서 그녀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쿠팡에 가하는 규제를 두고 미국 기업이 부당하게 차별받고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에 대해서도 재원과 집행 방식을 따져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북·대중 강경 노선 역시 뚜렷해, 부임을 앞두고 국내 일각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사진 청와대

그녀가 취임 초부터 '정서적 유대'를 앞세우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 외교가 인사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임기 초반부터 한국과의 정서적 거리를 좁히는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8월 12일, 이재명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그의 신임장을 받으며 "한국 문화와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스틸 대사가 한미 동맹의 든든한 가교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정치와 외교를 걷어내고 미셸 스틸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 여성의 이야기가 남는다.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세 나라를 거친 이민자 소녀는, 옷가게 수선대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워킹맘으로 자랐다.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겠다는 마음 하나로 정치판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태어난 나라로 돌아왔다.

그 궤적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늦은 출발은 없으며, 어디서 왔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은주라는 이름의 소녀가 미셸 스틸이라는 이름의 대사가 되어 돌아온 이 긴 여정이 증명하고 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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