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사기인 줄 몰랐다, 막아달라” 피싱범 2000만원 출금 직전 저지…고객 돈 지키는 500건의 통화

유혜림 2026. 8. 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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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점.

이날 해당 신한은행 고객은 사업자대출로 2000만원을 받았고 곧바로 A은행 계좌로 2000만원을 송금, 그 돈은 다시 B금고 계좌로 넘어간 상태였다.

"고객님, 신한은행 본점입니다. 오늘 대출금 2000만원 보내셨는데요. 어떤 사유로 보내셨어요?""물품 대금이요." "어떤 물품이요?" "멸균기요." "혹시 물건 받기 전에 먼저 돈 보내신 거예요?" "맞아요. 결제해야 물건이 들어오니까." O 팀장이 순간 머리를 부여잡았다.

오늘도 고객의 돈 단 1원이라도 더 지키려는 전화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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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과의 전쟁]
‘끝까지 추적’ 신한銀 소비자보호부 가보니
“막고 쫓고 돌려주고” 하루 500건 추적
“멸균기요?” 한마디에 노쇼사기 직감
금융사 ‘원팀’ 추격전 피해금 출금 막아
피싱범 지시에 ‘셀프 감금’ 경찰 불러 구조
사기 투자 믿는 고객 일주일 전화해 설득
피해금 환급부터 신종수법 분석까지 대응
11일 오후 서울 중구 신한은행 소비자보호부에서 한 직원이 이상거래 징후를 보이는 예금주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안내하고 있다. 유혜림 기자

[헤럴드경제=유혜림 기자] #. “고객님. 그쪽은 돈을 보내라는 쪽이고, 우리는 돈을 보내지 말라는 쪽이에요. 그럼, 어디를 믿으셔야겠어요?”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점. 이곳엔 욕을 먹어도 전화를 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일한다. 보이스피싱 의심 거래를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소비자보호부 직원들이다. 이들은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다 수상한 거래들이 탐지되면 전화기를 들었다. “오늘 대출받으신 2000만원 갑자기 왜 한 번에 보내신 거예요?” “그 사람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에요. 저희 믿고 그쪽 전화 더 받지 마세요.” 곳곳에서 은행 직원들의 목소리가 겹쳐 흘렀다.

본지는 지난 11·14일에 걸쳐 신한은행 소비자보호부의 주간 모니터링에 참관해 보이스피싱 의심 거래가 탐지되고 실제 피해를 막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했다. 고객정보보안 교육을 거친 뒤 고객과 직원 간 통화는 수화기에 연결된 이어폰을 통해 실시간 청취했다. 모니터링 직원의 신원이 노출돼 은행원 사칭 등 범죄에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사에 등장하는 직원 이름은 모두 익명으로 처리했다.

▶2000만원 쫓아 은행들이 뛰었다=11일 오후 3시 48분. “B금고에서 ○○님 계좌 확인 연락왔는데요.” 옆자리에서 외침이 들리자 7년차 베테랑 요원인 O 팀장이 “저요”하며 전화를 당겨 받았다. O 팀장은 곧 거래 내역을 빠르게 훑었다. 이날 해당 신한은행 고객은 사업자대출로 2000만원을 받았고 곧바로 A은행 계좌로 2000만원을 송금, 그 돈은 다시 B금고 계좌로 넘어간 상태였다. 계좌 하나에서 다른 계좌로, 다시 또 다른 은행으로, 석연찮은 흐름이다.

“고객님, 신한은행 본점입니다. 오늘 대출금 2000만원 보내셨는데요. 어떤 사유로 보내셨어요?”“물품 대금이요.” “어떤 물품이요?” “멸균기요.” “혹시 물건 받기 전에 먼저 돈 보내신 거예요?” “맞아요. 결제해야 물건이 들어오니까….” O 팀장이 순간 머리를 부여잡았다. 뭔가 짚인 모양이었다. “어디서 연락받으셨어요?” 고객이 그럴싸한 의료 공공기관 이름을 댔다. 그 말을 듣자 직원이 곧바로 잘라 말했다. “고객님, 이거 사기예요. 노쇼 사기.”

‘노쇼 사기’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최근엔 공공기관이나 의료재단을 사칭해 특정 업체의 물품을 대신 구매해달라며 선입금을 요구하는 신종 수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피해 소상공인들은 큰 계약을 따냈다고 생각해 자기 돈부터 보낸다. 주문도, 소개받은 업체도 가짜다. O 팀장의 말이 빨라졌다. 책상 밑 타행 콜센터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꺼내 들고 “A은행에 전화해서 공공기관 사칭 노쇼 사기로 신고하세요. 그 계좌 지급정지해 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경찰 신고 빨리 하셔야 합니다.”

O 팀장은 최초 피해자의 신고를 서두르고 A은행은 중간에 거쳐 간 돈의 흐름을 확인하고, B금고에선 가까스로 2000만원 출금을 붙잡아 뒀다. 문제의 B금고 사기의심계좌 명의인은 갑자기 돈을 찾지 못하게 됐다며 한창 항의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정지는 풀지 않기로 했다. 곧이어 피해 고객은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는 소식에 안도하며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판단을 머뭇거리는 사이 돈은 또 다른 계좌로 흩어진다. 반대로 멀쩡한 거래를 사기로 판단해 막아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의심 징후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우선 거래를 임시 제한하고 고객을 설득한다. 고객에게 왜 돈을 보냈는지 묻고, 돈을 받은 상대방 계좌에서는 자금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다시 살핀다. 필요하면 고객에게 영업점을 방문하도록 요청한다.

그래도 끝내 믿지 않는 고객도 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눈앞에 나타나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최근에는 검찰 등을 사칭한 피싱범이 피해자를 에어비앤비 숙소에 홀로 머물게 하며 외부와 고립시키는 수법까지 등장하면서 은행 직원이 직접 경찰에 신고해 피해자를 숙소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최근 검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조직은 피해자를 에어비앤비 등 숙소에 홀로 머물게 해 외부와 고립시킨 뒤 대출과 송금을 유도하는 수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은행 직원과의 통화마저 차단하자 신한은행 직원이 문자로 피해자를 안심시켜 숙소 밖으로 나오도록 설득(사진)하고 직접 경찰에 신고해 구조한 사례도 있었다. 유혜림 기자

▶피싱 조직도 속인 은행원의 ‘기지’=돈이 들어오면 인출책이 움직인다.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은 피해금을 계좌로 재이체하거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찾는 대신 상품권으로 바꿔 빼돌리기도 한다. “평소 거래 없던 사람들이 2000만원, 3000만원씩 보내잖아요. 그러고 바로 마트에서 빠져나가요.” 모니터를 보던 ㄱ선임이 거래 내역을 가리켰다. 불특정 다수에게 갑자기 1억원 상당의 돈이 들어온 뒤 20~30분, 짧게는 수십 초 간격으로 돈이 빠졌다. 한 시간 만에 ○마트에서 체크카드로 8000만원이 결제됐다. 상품권을 산 흔적이다.

특히 피싱 조직은 저축은행 등을 사칭해 저신용자에게 “상품권 구매를 도와주면 대출이 나오게 해주겠다”며 통장과 체크카드를 넘겨받는다. 대출을 받으려던 사람의 계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의 돈을 받는 대포통장이 된다. 14일 오후, ㄱ선임이 상품권 구매 대포통장로 신고된 명의인에게 전화를 걸어 “영업점에 방문하지 않아 비대면 거래는 제한된다. 은행 업무를 보려면 창구로 와야 한다”고 안내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대출 나온다고 해서!”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높아졌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피해를 막아야 하는 절박한 순간엔 기지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다. 지난 3월에도 여느 때처럼 수상한 거래를 확인하던 ㄱ선임이 계좌 명의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를 주고받던 ㄱ선임의 귀가 번쩍 뜨였다. 전화를 받은 남성은 은행 직원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윗선’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마침 상품권을 다른 수거책에게 넘기기 위해 만나던 참이었다고 한다.

‘이대로 놓쳐선 안 된다.’ 은행 직원은 순간 상선인 척 “어디예요?”라고 물었다. “○마트 앞입니다. 앞에 계세요.” “앞에 사람한테 봉투 넘기지 마세요. 근처 신한은행으로 작전 위치 바꿀게요.” 은행 직원의 목표는 하나. 상품권을 다른 수거책에게 넘기기 전에 신한은행 영업점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 은행 안에 우리 사람이 있어요.” 창구 직원을 자신이 미리 심어놓은 조직원인 것처럼 둘러댔다.

상선을 연기하는 모니터링 요원, 아무 일 없는 척 수거책을 붙잡아두는 창구 직원, 상품권 피해자를 찾아 신고를 독려하는 또 다른 은행원. 같은 시각 세 갈래 일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러자 곧 창구에 앉아 기다리던 수거책도 낌새를 알아챘다.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 수거책과 창구 직원 간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마침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수거책을 긴급체포했다. 수거책이 갖고 있던 상품권도 압수됐고 해당 수거책은 구속됐다.

사기범의 한발 앞을 막기 위한 ‘수싸움’이 모니터 앞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사진은 신종 피싱 수법에 대응하기 위해 신한은행 소비자보호부 직원들이 타행 계좌로 이어지는 이체 흐름과 거래 특징을 하나씩 맞춰보며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다음 자금 이동 경로를 짚어보는 모습. 유혜림 기자

▶가짜 수익 믿는 고객, 일주일 설득해 신고=이곳에서 막아야 하는 건 수상한 송금만이 아니었다. 이미 사기범의 말을 믿어버린 사람의 마음까지 돌려세워야 한다. 한숨 돌린 O 팀장이 지난주 투자 사기 가능성을 안내했던 고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고객은 아직 신고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입을 꾹 닫았던 고객을 설득하자 “원유 선물 거래를 하고 있었고, 보증금 명목으로 2000만원을 권유받았다”고 했다. 유튜브에서 투자 관련 영상을 본 뒤 연락이 왔고, 소개받은 거래소 프로그램을 보니 그럴듯해 투자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제는 돈을 보낸 사기의심계좌였다. 이미 다른 투자 사기 피해자들의 신고가 들어가 지급정지된 계좌였다. “그 거래소는 가짜”라며 조금은 단호해진 O 팀장의 말에도 고객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했다. 여전히 “아직 손해를 본 건 없다”고 신고를 주저했다. 가짜 투자 애플리케이션에 보이는 투자금이 남아 있으니 피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O 팀장이 말했다. “그 계좌에는 이미 투자 사기 신고가 여러 건 들어왔어요. 그쪽은 돈을 보내라고 하는 쪽이고요. 우리는 돈을 보내지 말라고 하는 쪽이에요. 어디를 믿으셔야겠어요?”

이어 신고 절차를 차근차근 알려줬다. 먼저 송금 은행 콜센터에 전화해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은행에서 송금 내역을 발급받아 경찰서를 찾도록 했다. 이후 피해 사실을 진술해 사건사고사실확인원을 발급받은 뒤 다시 은행에 피해구제를 신청하면 지급정지된 상대 계좌의 잔액을 토대로 환급 절차가 진행된다. 3일 뒤인 14일 O 팀장은 고객이 실제 신고까지 마친 것을 확인하고서야 ‘처리 완료’ 버튼을 눌렀다. 고객 한 명의 모니터링이 그렇게 약 일주일 뒤에야 끝났다.

소비자보호부 관계자는 “한 사건을 막기 위해 며칠에 걸쳐 고객을 설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모니터링 시스템에 포착되는 의심 거래는 통상 하루 400건 안팎, 많을 때는 500건에 달한다. 오늘도 고객의 돈 단 1원이라도 더 지키려는 전화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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