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지리산 생태학교 산내중학교(상) [남도 학교기행]

며칠째 낮 최고 기온이 섭씨 37°를 웃돌았다. 계곡이 마른침을 삼키고, 콩잎과 들깻잎이 절망하고, 여름 열매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항온동물인 사람의 체온과 혈온을 넘나들었으니 가끔 제정신이 아닐 때도 있겠다 싶다. 지나친 섭생이나 과도한 활동을 삼가고, 청아증이 걸린 것처럼 쪼그려 앉아, 들숨과 날숨만으로 연명하며, 생존 활동을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할 판이다. 이러다 어쩌다 문명이 바뀌고, 지구의 주인 운명조차 바뀌는 게 아닐까, 괜한 우화적 가정을 했다.
회문산 자락을 찾았다. 이름만 들어도 순풍이 불어올 것 같은 순창을 거쳐, 전주로 뻗은 4차선 27호선 국도로 행로를 변경하였다. 임실군 경계인 덕치재 너머에서 빠져나와 섬진강 상류로 접어들었다. 회문리 일대 이곳 덕고개 옛 지명은 덕점(德岾) 또는 고덕치(高德峙)라고 하였다. 덕(德)은 '크고 높다'는 의미가 있는지라, 교통로로서는 제법 고지대이며, 주변의 높은 산지에서 흘러든 강줄기가 유려하게 돌아가는 곳이다.
한국전쟁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면서 남쪽에 고립된 남부군의 전라북도 도당(총사령부)이 덕치면 일대 이곳 회문산에 자리 잡기도 하였다. 지리산은 이현상, 회문산은 방준표, 하지만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경성사범을 졸업한 교사 출신 방준표(方俊杓, 1906~1954)를 비롯한 700~1,000명의 빨치산들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까지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 특별한 이념적 연고가 없었던 지역 주민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서늘하고 오싹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덕치초등학교
덕치면 물우리 두무마을에 덕치초등학교가 있다. '두 팔을 벌려 춤을 추는 형상'이라는 마을이다. 회문산(837m) 자락 깃대봉(775m)을 배경으로 섬진강을 바라보는, 그 학교이다. 3~4학년만 운영되어 학생은 모두 4명, 그리고 교장 1명에 교사 3명이니 교원 또한 4명이다. 분교장이 아닌 본교로서 전국에서 가장 소규모 학교가 아닐까. 유치원은 개설되었지만 3년째 원생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36년 6월 10일, 이 산골 마을에도 교육 열망이 일어 덕치보통소학교가 개교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덕치면의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90년을 거치는 동안 총 2,43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지만, 올해는 졸업생이 없었다.
이 학교는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의 모교이자 2008년 8월, 그가 38년간의 교직을 마무리한 학교이기도 하다. 1970년 순창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교사 공채 시험에 합격하여 스물두 살에 첫 발령을 받은 그의 근무지 대부분은 이곳, 섬진강 주변 덕치초등학교였다.
그의 대표적 연작시 〈섬진강〉은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올여름 더위나 가뭄과도 같은 고난의 역사, 산자락 골골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이 모여든 강의 생명력, 그 주변에 터전을 일구고 사는 주민들의 땀과 눈물, 마음에 쌓인 한(恨), 그리고 풀꽃 같은 아이들의 표정과 말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38년 중 26년은 유독 2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2학년 아이들이 자연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가장 순수한 동심을 표현하는 나이'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선생 김용택'을 통해 <섬진강>을 낳은 셈이다.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강 건너 장암리 진뫼가 김용택의 태생지이다. 2019년 임실군에서 진뫼마을 '용택이네 집'으로 불리던 회문재(回文齋) 건물을 매입하고 정비하여 '김용택의 작은 학교'가 운영 중이다. 덕치초등학교를 끝으로 퇴직한 김용택 시인이 관리인이자 '작은 학교' 운영자이다. 덕분에 마을 앞 섬진강 돌다리와 품이 제법 너른 느티나무 등 동네 전체가 학교가 되었고, 마을이 온통 서재이자 책이 되었다고 한다.
덕치초등학교 교육은 김용택 시인과 관련이 깊다. <섬진강 꼬마 작가 프로젝트>를 앞세워 작가와의 만남, 온날 책 읽기, 글 나눔 게시판, 학부모와 함께하는 문학 답사 등이 이어진다. 그 결과 『우리 형 새똥 맞았다』(2005)와 같은 문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교직원도 합세하여 글쓰기 연수를 진행하고, 마치 생리 현상을 해결하듯 매일 아침 기교 없이 짧게 글을 쓰는 '글 똥 누기 공책' 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바로 이웃, 섬진강댐을 끼고 있는 강진면(江津面)에 '다슬기 교육'을 주창하는 섬진중학교(학생 13명)가 있고, 지역성을 살려 특성화 교육으로 잘 설계한 한국치즈과학고(학생 105명)가 운영 중이다. 임실 치즈, 1964년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 신부(본명 디디에 체르스테반스 Didier t'Serstevens, 1931~2019)에 의해 자활산업으로 시작하여 지역 대표 브랜드가 된 얘기, 이런 걸 우리는 기적이라고 한다.

#산내면 이야기
회문산에서 지리산으로 지역을 옮겼다. 내령, 뱀사골, 달궁계곡 그리고 평지 사찰이 있는 산내면 이야기로 이어가겠다.
산내면은 어느덧 내가 집착하는 곳이 되었다. 남원 인월에서 출발하여 경남 함양군 금계마을에 이르는 약 24km,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연결 지점이라서 그렇다. 열대여섯 번은 걸었을 이 길, 지리산 품에 깃든 고즈넉한 마을과 그 주변 풍경 산자락 논밭에 꽃이 피고, 지고, 열매 맺고 하는 경관을 보며 걷는 시간은, 달콤한 순례이고 수행이라면 수행이었다. 하체 근력이 다하고 숨이 차오를 무렵, 그 요소에 참샘처럼 자리한 미인가 주막, 차점,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거점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는 것은 참으로, 참으로 아쉽고 애통한 일이다.
특히 춘추 계절이 좋았는데, 이 길을 걷는 동안에는 세상의 시름을 떨칠 수 있거나 새로운 삶의 투쟁력을 얻을 수 있어서 힘이 되었다. 마을에서 숲으로, 다시 숲에서 마을로 이어진 길을 걸으며 스스로 성찰하거나 참선에 들어선 적적삼매(寂寂三昧)의 경지를 맛보기도 하였다.
'산내(山內)'라는 지역은 전국에 더 있다. 앞서 언급한, 섬진강댐이 가두고 있는 옥정호 상류 구절초 공원으로 이름난 정읍시 산내면, 영남 알프스라고 일컫는, 얼음골이 있는 해발 고도 1,000m 지점 운문산 자락의 밀양시 산내면, 그 옛날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의 수련 장소로서 하늘만 보인다는 단석산(827m) 일대 경주시 산내면,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동 그리고 경기도 파주시 산내마을이란 곳도 있다. 각지의 산내마을이 모여 품평회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 보기도 하였다. 지명에 얽힌 사연과 역사는 다르겠지만, 산내라는 이름만으로도 왠지 선계(仙界)의 정취가 느껴지곤 하였다.

#운봉 목기
알려진 바대로, 실상사는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효시였다. 828년(흥덕왕 3) 증각대사 홍척(證覺大師 洪陟, ?~?)이 주도하여 남원경 관할인 무진주 운봉현에 실상산문을 개창하였고, 이어 839년(신무왕 1) 무진주 수인군(장흥군 유치면)에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 804~880)이 앞장서서 가지산문 보림사를 개창하였다. 9개 산문 중 가장 늦은 황해도 해주 수미산문 광조사는 932년 고려 태조(15년) 왕건의 후원으로 승려 이엄(利嚴, 870~936)이 창건했다.
통칭 남원 목기는 오늘날 인월, 산내, 운봉에서도 맥을 이어 제작, 판매되고 있다. 더 나아가 예전에는 장수나 무주지역에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작의 중심은 산내지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실상사 창건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산문 불교(山門 佛敎)의 효시였던 실상사는 창건 이후 승려가 3,000명이 넘었던 대규모 도량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당시 남원경 지역 호족뿐만 아니라 경주의 흥덕왕(42대)과 흥덕왕의 5촌 조카이자 조카사위이기도 했던 선강태자(43대 희강왕)로부터 적극적인 지지와 경제적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거대한 수요 시장, 실상사 운영에 필요한 각종 목기를 맞춤형으로 제작하여 공급원 역할을 했던 것이 남원 목기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실상사 승려들에 의해 사내수공업 형태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분업화되어 발우(발우때) 등 목기 제작 기술이 인근 주민들에게 전수되면서 전문적 제조업자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실상사를 비롯한 지리산 일대 절집의 주문에 맞춰 납품하거나 시주 형태로 목기를 공급하는 목기 전업 생산자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산내면이지만 과거 실상사 일대가 운봉현이었기에 예전에는 '운봉 목기'라고 하였다.
오늘날 산내면 일대가 목기 주산지가 된 이유는 또 있다.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수목 중, 최고의 자재로 취급되던 물푸레나무를 비롯하여 오리나무, 고로쇠나무 등은 무늬가 아름답거나 향이 좋아 목기 가공에 최적의 수종이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식 상례와 제례를 치렀기에 목기 수요는 사찰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조선에 들어 가문을 중심으로 조상을 섬기거나 상·제례를 행하는 유교적 풍습이 정착되면서 목기, 특히 제기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재질이 단단하고 옻칠 기술이 우수했던 탓에 조선시대 500년간 궁궐에서 사용한 제기류 상당수가 남원 목기, 즉 운봉 목기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남원장 목기점은 유명세가 있었고, 현재까지도 남원공설시장 목기점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전라도 각지의 장시에 널리 유통되거나 보부상들의 호가별 방문 판매도 활발하였다. 여기에 경상도 함양, 산청, 진주까지 아우르는 광역 상권으로 확대되어 남원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운봉 목기, 실상사 인근 산내 목기가 어떻게 근대교육과 접점을 이루어 전수되고 있는지, 더 상세한 이야기는 <하>편에 이어가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