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과 ‘즐거운 딴짓’ 허락하는 야구장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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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경기에 몰입하는 게 야구장 가는 목적이지만, 시선과 관심은 자주 그라운드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야구장은 목적지가 목적을 잊게 만드는 공간이다.
현대 도시에서 평일 저녁에 수만명이 모여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같은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는 장소가 야구장 말고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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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 목적 잊고 느긋한 시공간의 여유
수만명이 같은 시간 같은 감정의 파도
느슨한 자유·끈끈한 연대 누리는 공간

5년 만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노래방’에 다녀왔다. 부산 사직야구장 가는 길은 전철역부터 공기가 다르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인파에 몸을 맡기면 된다. 흰색 홈 유니폼뿐만 아니라 하늘색 올드 유니폼, 1992년 마지막 우승 때의 유니폼, 밀리터리 시리즈, 피카츄 콜라보, 동백 유니폼을 다양하게 걸친 팬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이미 긴장과 흥분이 전염된다. 아이들은 제 얼굴보다 큰 글러브를 끼고 종종걸음으로 뛴다. 야구장 광장의 최동원 동상 앞은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팬들로 북적인다.
내가 야구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경기 시작 한시간 전이다. 선수들은 타격 훈련을 마무리하느라 분주하고, 관중석은 절반쯤 차 있다. 맥주와 치킨, 갖가지 ‘야푸’(야구장 푸드)를 양손 가득 든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는다. 부모 손에서 탈출한 꼬마들이 계단을 뛰어다닌다. 넋 놓고 타격 연습을 지켜봐도 되고, 내야 그라운드 가까운 곳까지 다가가 좋아하는 선수를 사진에 담아도 된다. 단체 응원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선수별 등장 응원가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외야의 초원 위로 여름 저녁의 긴 햇살이 천천히 번져간다.
야구는 선발투수의 1회 첫 투구부터 9회 마지막 타자의 아웃까지 유장한 리듬을 타며 진행되는 스포츠다. 멈춤 없이 공을 주고받는 축구나 농구와 달리, 야구는 대부분 정지 상태다. 세시간을 훌쩍 넘기는 경기 중 실제로 공을 던지고 받고 치고 잡고 뛰는 시간은 놀랄 만큼 짧다. 15분 정도다. 중계 영상으로 보는 ‘집관’과 야구장에서 직접 보는 ‘직관’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경험이다.

영상은 최선의 구도로 순간을 포착하고 결정적인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투수의 미세한 그립과 타자의 표정까지 잡아낸다. 화면을 분할해 타자의 스윙과 주자의 도루를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슬로모션은 포크볼 투구의 궤적과 홈런 타구의 포물선 궤도까지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영상으로 집관 하는 야구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긴박감의 연속이다.
반면 직관 야구는 느슨하게 흐르며 오르고 내리는 야구 특유의 리듬 속에서 관중에게 자유와 여백의 시간을 허락한다. 여유로운 빈틈과 즐거운 딴짓을 허용한다. 무사 만루의 위기만 아니라면 언제든 떡볶이를 먹으며 맥주를 들이켤 수 있다. 평소에는 꿈도 못 꿀 크기로 소리 지르며 온몸을 흔들 수 있다. 처음 만난 옆 사람과 투수 교체 시점을 예측하고 상대 팀 인기 선수를 험담하기도 한다. 비용을 지불하고 경기에 몰입하는 게 야구장 가는 목적이지만, 시선과 관심은 자주 그라운드 바깥으로 미끄러진다.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며 어둑해지면 조명탑에 하나둘 불이 들어온다. 후끈한 열기와 땀 냄새로 진동하는 관중석 위로 아늑한 밤바람이 스친다. 내야 상단의 빈자리를 찾아 몸을 눕히고 ‘하늘멍’을 즐겨도 된다. 야구장은 목적지가 목적을 잊게 만드는 공간이다.
야구장은 빈틈과 딴짓을 마음껏 누리는 자유의 공간일 뿐 아니라 공감과 연대의 기쁨을 체험하는 공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현대 도시에서 평일 저녁에 수만명이 모여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같은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는 장소가 야구장 말고 또 있을까. 구원투수가 삼진을 잡아 위기에서 탈출하는 순간, 끝내기 안타로 경기를 뒤집는 순간, 모두가 동시에 일어나 뛰며 환호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같은 동작으로 춤추며 목이 쉬도록 떼창을 부른다.
경기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응원 구호를 반복해 외친다. 스마트폰 속 세계에서 각자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도시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감정의 파도를 타는 경험은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은 야구보다 야구장이라는 공간을 기억한다. 경기의 승패와 기록은 잊어도 그날 야구장의 빛과 함성은 기억한다.

마케팅 전문가 정은우는 한해 입장객 1천만명을 넘기는 최근 프로야구 흥행의 이유를 관계 갈증, 경험 자산, 공간 경험에서 찾는다(‘당신의 고객은 왜 야구장에 있을까?’, 수오서재, 2026). 야구장의 주인공은 분명 야구지만, 사람들이 소비하는 건 경기만이 아니다. 야구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어지는, 누군가를 만나고 시간을 나누는 모든 공간 경험이 야구장의 콘텐츠다. “많은 경험을 온라인으로 외주화”하는 시대에 “도심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음식을 먹고,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리얼 타임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인 야구장. 시간을 한껏 낭비할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외로움이 선명하게 증발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야구장은 틀에 박힌 도시의 일상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할 수 있는 장소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는 집(제1의 장소)과 일터(제2의 장소)에 묶인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과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느슨하게 교류하며 재미를 느끼는 곳, 이를테면 동네 술집과 카페, 서점 같은 곳을 ‘제3의 장소’라고 부른다(‘제3의 장소’, 풀빛, 2019). 그의 목록에는 없지만, 야구장만큼 느슨한 자유와 끈끈한 연대가, 개인의 추억과 공동의 기억이 공존하는 제3의 장소가 또 있을까. 제3의 장소에서 “목적 없는 접촉이 만들어내는 비공식적 공공 생활”은 건강한 사회의 기반이다.
폭염으로 모든 야구 경기가 닷새간 취소되기 직전, 운 좋게 사직야구장 직관을 했다. 늘 그렇듯 롯데 자이언츠는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패배의 쓰라림은 오래가지 않는다. 야구장이 승패를 가르는 격전장인 것만은 아니다. 야구장은 목적 없는 시간을 마음껏 흘려보내며 나와 우리의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다.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 간 날의 추억, 어설픈 첫 데이트의 설렘, 처음 만나 친구가 된 이들과 보낸 여름밤, 연장전 끝내기 홈런의 감격, 은퇴 선수의 마지막 인사가 모두 오늘의 야구장에 포개져 있다.
배정한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교수·‘공원의 위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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