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트레일 l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 ② 보이지 않기에, 더 멀리 걸을 수 있었다

서경석 객원기자 2026. 8.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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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지대의 지형과 호수 온도 차 바람 움직임들. 백패킹 살아있는 교육장

[<사람과 산> 서경석 객원기자]  

Vol.02  / Day 11-24
PCT 워싱턴 구간은 멀리 볼수록 더 깊어지는 길이었다.

Day 15 길 위에서 만난 끝과 시작

일요일 아침 7시. 이른 시간이라 마을을 빠져나갈 걱정을 조금 했는데 운이 좋다. 숙소 앞에 서 있자마자 바로 옆집에서 차 한 대가 나온다. 트레일헤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약 16km 정도를 보장받았다. 야호! 기분 좋은 출발이다.

중간에 내린 주유소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인도인 주인과 30분가량 담소를 나눴다. 타국에서 온 그와 길 위의 하이커인 나, 묘한 동질감을 느꼈는지 그는 나갈 때 바나나 몇 개를 덤으로 챙겨주었다. 이어지는 히치하이킹은 스키장에서 일하는 직원의 차였다. 겨울엔 스키장, 여름엔 산악자전거 트레일로 변신해 사람들로 붐빈다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오전 8시, 다시 트레일에 발을 들였다.

오후에 비와 뇌우가 예보되어 있어 오전에 최대한 많은 거리를 가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워싱턴의 가장 험한 고비는 넘겼다지만 트레일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당 약 4km 정도의 속도는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난이도였다. 예보대로 비는 오전 11시부터 쏟아지기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집중적으로 내렸다. 하지만 며칠 전 겪었던 차가운 비와는 달랐다. 한여름 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샤워 같은 비였다.

오늘 아주 특별한 하이커들을 만났다. 바로 2016년 PCT NOBO 종주자들 중 전체 1, 2, 3위이다. 처음에 만난 1위 하이커는 짐이 너무 없어 데이 하이커인 줄 알고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뒤이어 만난 2위 하이커에게 "축하한다, 네가 첫번째 NOBO인 것 같다"고 했더니, 방금 지나간 사람이 1위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장대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3위 하이커까지 마주쳤다.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올라온 그들은 이제 며칠 뒤면 캐나다 국경에 도착해 종주를 끝낸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서린 흥분과 기쁨을 보니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나도 언젠가 저 끝에서 저런 표정을 짓겠지.' 그들이 건네준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를 자극했고, 어느새 내 발걸음도 비를 뚫고 더 힘차게 빨라지고 있었다.
눈 녹은 계곡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길

Day 16  30마일 돌파와 하이커의 진정한 루틴

오늘 나는 PCT 종주 시작 후 처음으로 30마일(약 49km) 벽을 넘었 다. 이 정도 거리를 소화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49km를 걷고 난 뒤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여본다.

몸이 "OK"라고 답한다면, 앞으로 하루 평균 약 40km 정도는 무난히 지속할 수 있다는 신호다. 이렇게 조금씩 한계를 넓혀가는 것이 종주의 묘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전 11시가 되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우박을 쏟아냈다. 그러다 오후 3시쯤 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고산 지대의 지형과 호수, 여름철의 온도 차와 바람의 움직임들. 이 모든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백패킹이야말로 살아있는 교육이 아닐까. 언젠가 아이와 함께 이 길 위에서 바람의 온도 차를 설명해줄 날을 꿈꿔 본다. 식물에 대한 지식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겠다. 사실 오늘 30마일을 넘게 된 데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원래 계획했던 캠프사이트가 지도 앱에는 표시되어 있었으나, 막상 가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바로 옆 폭포 부근에서 큰 산사태가 일어난 흔적을 보니, 아마 캠프사이트 자체가 무너져 내린 듯했다. 만약 누군가 자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결국 다음 캠프사이트를 찾아 계속 걷다 보니 밤 9시가 되어서야 짐을 풀 수 있었다. 다행히 도착 한시간 전에 미리 저녁을 해결한 터라 텐트만 치고 바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종주에서 스토브를 쓰지 않고 음식을 물에 불려 먹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이 방식이 나만의 효율적인 루틴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이킹 종료 2시간 전에 음식을 물에 불리고, 1시간 후에 길가에 앉아 저녁을 먹은 뒤, 남은 1시간을 더 걸어 캠프사이트에 도착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캠프사이트에서는 물 외에 음식 냄새를 풍기지 않아 야생 동물이 접근할 확률도 줄어들고, 온전히 잠만 자면 되는 것이다. 하이킹 시간은 늘리고 캠프사이트에서의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종주자(Thru- hiker)의 루틴이 아닐까 싶다.
혼자만의 캠프사이트

Day 17 사망 직전의 신발과 트레일 위의 '카더라'

와, 정말 힘든 날이었다. 이제 이틀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짙은 안개는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쯤이야 익숙해졌으니까. 그런데 이 바닥에 깔린 돌들은 뭔가.
현재 내 신발은 검지손가락만한 구멍이 여럿 뚫린 것을 포함해 거의 사망 직전이다.

신발 밑창은 닳을 대로 닳아 지면의 모든 돌 표면이 발바닥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늘 마을에 도착하면 집에 전화해 다음 보급지로 새 신발을 보내달라고 할 계획이었는데, 이 상태로 걷다가는 마을에 가기도 전에 신발이 완전히 분해될 것만 같았다. 발바닥의 통증을 견디며, 조심조심 살금살금 26km를 걸어왔다.

물론 아무리 돌이 많다 한들 지난 AT종주 때 겪은 펜실베니아 구간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 사실에 위안을 얻으며 최대한 큰 돌만 골라 딛는 기술을 발휘해 무사히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 오늘 걸어온 길은 고저 차도 심하고 노면도 거칠어 현재까지 겪은 PCT 구간 중 가장 힘들었다고 생각된다. 지난 마을에서 "이제 힘든 구간은 끝났다"라고 말했던 그 사람을 찾아가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번 마을 사람들은 또 입을 모아 말한다. "진짜, 이번부터는 쉬워져!"

길 위에서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는 것은 중요하다. 날씨, 트레일 상태, 워러소스 정보 등은 생존과 직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정보에 너무 의지하거나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오늘 다시 한번 느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려는 자세가 훨씬 더 중요하다.

트레일에서 전해지는 정보들은 입을 거치며 과대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트레일이 너무 험하다고 겁을 주나? 생각해보라. 그 말을 전하는 사람도 결국 그 험한 길을 건너와 내 앞에 서 있는 것 아닌가. 정말 못 갈 길이라면 그는 이미 포기했을 것이 다. 1마일당 100개의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다 해도, 나는 이미 그보다 더한 곳도 뚫고 지나온 경험이 있다.

정보 교환은 필요하되,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참고용으로만 두자.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어떤 길이라도 결국 내 발로 직접 딛고 지나가야 하는 법이니까.
워싱턴이 끝나기도 전에 사망한 신발

글.사진 서경석 객원기자 ㅣ 미국 AT·PCT를 완주한 장거리 하이커. 해외 트레킹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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