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폭탄보다 먼저 책 든 청년…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가다

구희언 기자 2026. 8. 15.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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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26년 언론진흥기금 기획취재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세계 속의 대한독립: VR로 찾아가는 항일독립운동의 현장' 기획 취재를 진행한다. 국내외 항일독립운동 관련 기념관을 3D VR 디지털트윈으로 기록하고 기사와 영상 해설을 함께 제작해 시공간의 제약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념관은 한 청년이 농촌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에서 출발해 식민지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독립운동에 생명을 바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교육으로 농촌을 변화시키려 했던 청년과 일제 침략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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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특별기획] 농촌 깨우고 상하이에서 역사 바꾼 윤봉길

● 야학 열고 ‘농민독본’ 편찬한 농촌계몽운동가
● 한시 짓고 시문 필사한 문학청년
● 훙커우공원 의거로 임시정부 위상 되살려
●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지원 확대…카이로선언 ‘한국 독립’ 명시
● 실감영상·AI 디지털 휴먼으로 만나는 독립운동

‘신동아'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26년 언론진흥기금 기획취재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세계 속의 대한독립: VR로 찾아가는 항일독립운동의 현장' 기획 취재를 진행한다. 국내외 항일독립운동 관련 기념관을 3D VR 디지털트윈으로 기록하고 기사와 영상 해설을 함께 제작해 시공간의 제약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편집자 주>

서울 서초구 매헌시민의숲에 자리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홍중식 기자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매헌윤봉길의사 기념관 3D VR] 바로가기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시민의숲 안에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윤봉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장면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기념관에서 만나는 윤봉길 의사의 삶은 의거보다 훨씬 앞에서 시작된다.

그는 글을 모르는 농민을 가르치기 위해 야학을 열고 직접 교재를 만든 교육자였다. 농촌의 경제적 자립을 고민한 계몽운동가였고, 한시를 짓고 여러 시문을 옮겨 적은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기념관은 한 청년이 농촌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에서 출발해 식민지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독립운동에 생명을 바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순으로 보여준다. 그의 삶은 훙커우공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윤봉길 의거는 침체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중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전환점이 됐다. 그로부터 11년 뒤 카이로회담에서는 한국 독립 문제가 연합국 정상들의 전후 구상에 포함됐다.

농촌 깨우고 시를 쓴 청년

기념관에 들어서면 중앙홀의 윤봉길 좌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을 만든 조각가 김영원의 작품이다. 윤봉길은 의자 끝에 걸터앉아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오른손을 가슴에 얹은 채 정면을 응시한다. 좌상 아래에는 그가 야학 교재로 편찬한 '농민독본'의 내용이 펼쳐져 있다. 좌우 벽면에는 고향에서 농민들을 가르치는 모습과 훙커우공원 의거 장면을 그린 대형 기록화 두 점이 마주 보고 있다. 1992년 상하이 의거 60주년을 맞아 이종상 화백이 제작했다. 교육으로 농촌을 변화시키려 했던 청년과 일제 침략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윤봉길의 생애를 이루는 두 장면이 한 공간에 펼쳐졌다.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 자는 용기, 호는 매헌이다.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그만뒀다. 이후 유학자 성주록이 운영한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과 한시를 배웠다.

농촌계몽운동에 나선 계기로는 이른바 '묘표 사건'이 전해진다. 글을 읽지 못하는 농부가 아버지 묘를 찾기 위해 주변 묘표 여러 개를 뽑아 윤봉길에게 가져왔지만 묘표가 뒤섞이면서 다른 묘의 위치까지 알 수 없게 됐다. 윤봉길은 농촌의 가난이 경제적 빈곤뿐 아니라 문맹과 교육 부재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고 판단했다.

윤봉길 의사의 출생과 성장 과정부터 농촌계몽운동, 중국 칭다오에서의 생활까지 소개하는 제1전시관. 홍중식 기자
18세 때 친구들과 야학당을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과 우리 역사, 생활 예절을 가르쳤다. 활동은 농촌 생활 전반을 개선하는 운동으로 확대됐다. 농법 개선과 양돈·양계 등 부업을 장려하고 농산물 공동판매와 생필품 공동구매를 추진했다. 황무지를 개간해 운동장을 만들고 수암체육회를 조직해 청년들의 체력과 협동심도 길렀다.

윤봉길은 야학에서 사용할 '농민독본' 세 권을 편찬했다. 제1권 '조선글'은 한글 학습, 제2권 '계몽'은 예절과 인사법 등을 담았고, 제3권 '농민의 앞길'에는 농민의 자세와 공동체 정신, 경제적 자립에 관한 생각을 실었다. 1929년 4월 23일에는 월진회를 창립해 문맹 퇴치와 강연회, 공동 경작, 축산, 소비조합, 위생·보건사업 등을 추진했다.

윤봉길은 농촌계몽운동가인 동시에 문학청년이었다. 14세 무렵에는 한시 '학행(學行)'으로 장원을 차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옥타' '명추' '임추' '염락' 등 친필 자료에는 직접 지은 한시와 여러 시문, 중국 한시 등을 행초서로 옮겨 적은 글이 담겼다. 기념관에 따르면 자작시와 필사한 시를 포함해 이렇게 남은 한시는 모두 334수다. '동아일보'와 '개벽' 같은 신문·잡지를 읽고 일본어와 신학문도 익혔다. 1929년에는 일상과 농촌계몽 활동을 '기사년일기'에 기록했다.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식민지 현실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다. 농촌계몽운동에 힘을 쏟던 윤봉길은 점차 국내 활동만으로는 식민지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나라와 겨레 사랑이 우선

1930년 3월 6일 윤봉길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고향을 떠났다. "대장부가 집을 나서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만주와 다롄을 거쳐 중국 칭다오에 도착한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상하이로 갈 여비를 마련했다.

그해 10월 18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망명길에 오른 이유가 담겼다. 그는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부모의 사랑보다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라는 취지로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이성섭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상임이사는 "이 편지에는 윤 의사가 품었던 대의와 강의한 조국애가 깊이 배어 있다"며 "그의 애국·애족 정신이 오늘날 청소년들에게도 깊은 울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윤봉길은 1931년 6월 23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인삼을 팔고 종품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공장을 찾던 김구와 인연을 맺었다. 1932년 4월 훙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자 김구를 찾아가 의거를 준비했다. 4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했다. 자필 이력서에는 가족이 아니라 '유족'이라고 적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이미 각오한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김구와 마지막 식사를 했다. 며칠 전 6원을 주고 산 새 회중시계를 꺼내 자신에게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 필요하지 않다며 김구의 낡은 2원짜리 시계와 바꾸자고 했다. 그날 훙커우공원에는 수많은 일본 군·관·민이 모였다.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과 도시락형 폭탄을 지닌 채 행사장에 들어갔다. 오전 11시 40분경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약 19m 떨어진 단상을 향해 수통형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단상 중앙에 떨어졌다.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일본 측 주요 인사들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의거 소식은 한국과 중국,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는 한국이 사라진 나라가 아니며, 한국인이 여전히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윤봉길 의거 직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내부 분열과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상하이 의거는 이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기념관 자료는 장제스가 "중국의 4억 인구와 10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윤봉길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고 설명한다.

1933년 5월 장제스는 김구를 만났고,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뤄양군관학교에는 한인특별반이 설치됐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인물들은 이후 한국광복군의 인적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됐다.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의 관계도 한층 가까워졌다. 그 흐름은 11년 뒤 이집트 카이로까지 이어졌다. 1943년 11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중국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는 카이로에서 대일전 수행과 일본 패전 이후의 질서를 논의했다. 장제스는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 결과 12월 1일 공표된 카이로선언에는 한국을 적절한 절차를 거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겠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한국 독립이 미국·영국·중국 세 연합국 정상의 공동선언에 명문화된 것이다.

순국 14년 만에 돌아온 조국

기념관은 윤봉길 의거와 카이로선언 사이의 역사적 연결에 주목한다. 1946년 출간된 '도왜실기(屠倭實記)' 국문판 서문에서도 이승만은 한국 해방의 단서는 카이로선언이며, 한국 독립 조항이 들어가는 데 윤봉길 의거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취지로 평가했다.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은 카이로선언의 조항이 이행돼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1932년 훙커우공원에서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린 의거는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끌어내는 전환점이 됐고, 11년 뒤 한국 독립은 연합국의 전후 구상에 명문화됐다.

일본 상하이 파견군 군법회의는 1932년 5월 25일 윤봉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해 11월 일본으로 압송된 그는 오사카를 거쳐 가나자와 제9사단 위수구금소로 이감됐다.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24세였다.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인근 통로에 봉분도 없이 암매장했다. 광복 이후 박열과 이강훈 등이 참여한 유해발굴단이 1946년 3월 6일 유해를 찾아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7월 효창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고향을 떠나며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던 청년은 순국한 지 14년이 지나서야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삶과 독립정신을 기리는 선양사업이 이어졌고, 1988년 국민 성금 등을 바탕으로 서울 양재동에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세워졌다.

디지털 가상 기술을 통해 복원된 AI 디지털 휴먼 윤봉길 의사. 홍중식 기자
기념관은 2018년 전시 시설 현대화 작업을 거쳐 재개관한 뒤 인공지능(AI)과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전시를 확충했다. 제2전시관의 실감영상실에서는 윤봉길이 농촌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향하는 과정부터 훙커우공원 의거까지를 디지털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이성섭 상임이사는 "그날의 긴박함과 숭고한 결기를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어 관람객들에게 가장 깊은 감명과 여운을 남기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AI 디지털 휴먼으로 구현된 윤봉길 의사에게 직접 질문하고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기념관 밖 매헌시민의숲에는 윤봉길 의사 동상과 숭모비, '장부출가생불환'을 새긴 어록비, 한시 '학행'을 담은 시문비가 자리한다. 한 농촌 청년이 글을 가르치기 위해 들었던 책에서 시작된 길은 상하이를 지나 카이로까지 이어졌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은 그 긴 여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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