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엔 황무지였다…씨앗 하나로 일군 ‘제주의 야자수 천국’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6. 8. 1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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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오솔길 따라 쭉쭉 뻗어 올라간 워싱턴야자수.

제주시 한림읍 출신인 그는 가족들이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모래밭을 왜 사느냐"며 만류했지만, 전기도 상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움막 생활하며 지금의 정원을 만들었다.

송봉규 선생 아호를 딴 재암 수석관에서는 제주 현무암과 기괴한 형상의 용암석, 국내외에서 모은 진귀한 수석들이 자연이 빚은 예술품처럼 전시돼 눈길을 사로잡는다.

재암민속마을에는 사라져가는 제주 전통 초가와 돌담, 올레길이 그대로 옮겨져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옛 제주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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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림공원 3000여종 희귀식물 자라
50년전 모래밭에 야자수 씨앗 심으며 시작
하늘향해 쭉쭉 뻗은 워싱턴야자 장관
야열대식물원 등 9개 테마 볼거리 풍성

한림공원 워싱턴야자.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오솔길 따라 쭉쭉 뻗어 올라간 워싱턴야자수. 부채꼴로 넓게 펼쳐진 잎사귀들 저마다 손을 흔들며 바람에 넘실거리니 마치 유럽의 어느 휴양지에 온 듯 이국적 풍경 가득하다. 뜨겁게 내리쬐는 제주 한여름 태양도 울창한 야자수 그늘 아래서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한림공원. 이 아름다운 풍경이 반세기 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황무지 모래밭에서 시작됐다니,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감탄은 곱절이 된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이대용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이대용 기자
◆야자수 천국을 걷다

한림공원은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총면적 약 29만7000㎡이며 모두 9개 테마정원으로 꾸며져 천천히 둘러보려면 3시간 정도 걸린다. 야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입구 아열대식물원에서 시작된다. 온실로 들어서자 납작하고 이국적인 해안부채선인장 위로 터널을 이룬 짙은 분홍빛 부겐빌레아가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이 꽃은 화려한 색감으로 전 세계 열대·아열대 정원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덩굴성 관목. 빨강, 분홍, 보라, 주황 등으로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데 사실 꽃잎이 아니라 잎이 변형된 포엽이다. 중심의 작고 하얀 깔때기 모양 꽃이 진짜 꽃인데, 너무 작고 수수해서 벌과 나비 같은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포엽을 화려한 색으로 진화시켰다니 참 신기하다.

한림공원 아열대식물원 부겐빌리아.
식물들만 있으면 좀 심심할 텐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다양한 동물도 아열대식물원의 주인이다. 선인장에서 눈을 돌리면 안경카이만 악어가 유유히 물속을 헤엄친다. 눈과 눈 사이에 뼈로 된 가로 돌기가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안경테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머리 위에선 노란 볏이 화려한 큰유황앵무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지능이 아주 높아 사람 말 흉내를 잘 내고 평균 수명도 50∼70년에서 길게는 80년 이상까지도 사는 장수 조류다.
안경카이만 악어.
온실을 나와 야외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선 다섯 살배기 꼬마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엄마 이거 진짜 선인장이야?”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용설란과 무늬천수란 선인장 군락을 처음 본 꼬마는 봐도 봐도 신기한 듯, 정원을 떠날 줄 모른다. 다시 이어지는 온실에는 먹거리가 풍성하다. 삼척 바나나, 잭후르츠, 파파야가 주렁주렁 매달려 열대 과수원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제주에서만 자라는 재래종 감귤나무들도 은은한 향을 더한다.
한림공원 선인장 정원.
아열대식물원을 빠져나오면 비로소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야자수 군락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반기는 나무는 부채 모양의 거대한 잎을 펼친 비로야자로, 시원스레 뻗은 자태가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돋운다. 조금 더 걸으면 깃털처럼 갈라진 잎을 지닌 카나리아야자가 우아하게 늘어서 있고 마침내 길 끝에서 웅장한 워싱턴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1971년 처음 한림공원을 일군 송봉규 창업주가 손수 씨앗을 뿌려 가꾼 나무들이 반세기가 지나 웅장한 모습으로 자랐다.
한림공원 아열대정원 코끼리발 나무.
한림공원 카나리야자.
이 모든 풍경을 맨땅에서 일궈냈다니 대단한 열정과 뚝심이다. 제주시 한림읍 출신인 그는 가족들이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모래밭을 왜 사느냐”며 만류했지만, 전기도 상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움막 생활하며 지금의 정원을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한림공원은 현재 세계 각국에서 모은 3000여종의 희귀 식물이 살아 숨 쉬는 낙원이 됐다. 방문객은 연간 100만명이 넘는다. 송봉규 선생은 2023년 93세로 타계했지만 그가 씨앗 하나로 시작해 일군 이 초록빛 유산은 지금도 여전히 무성하게 자란다. 현재 한림공원은 그의 아들 송상섭 대표가 이끌고 있다.
한림공원 아열대정원 선인장.
한림공원 아열대정원 선인장.
야자수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개척관은 송봉규 선생 일생을 잠시 돌아보는 공간. 벽면을 채운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는 지금의 울창한 정원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담겨 있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던 황량한 벌판, 돌멩이와 가시덤불만 무성했던 옛 모습이다. 전시물도 예사롭지 않다. 송봉규 선생이 손수 흙을 나르고 나무를 심을 때 사용했던 낡은 농기구와 장비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반질반질 닳은 손잡이와 녹슨 날에서는 반세기 전 이곳을 일구던 손길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림공원 연못정원.
한림공원 연못정원.
◆연못정원부터 산야초원까지 아홉 빛깔

개척관을 나서면 천연 용암 암반 위에 조성된 연못정원이 나타난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아래로 홍련과 백련이 피어오르고, 그 옆으로 열대수련과 거대한 잎을 자랑하는 빅토리아수련이 수면 위에 떠 있는 모습은 마치 모네의 정원을 보는 것 같다. 또 수변을 따라 자라는 이국적인 수생식물 파피루스와 연보라꽃 워터칸나 사이에서 물고기들이 요리조리 헤엄치는 모습은 한참을 쳐다보게 만든다.

한림공원 플라워가든.
한림공원 공작새.
이어지는 플라워가든은 사계절 내내 꽃이 지지 않는 광장이다. 봄에는 튤립과 유채꽃, 여름에는 수국과 칸나, 가을에는 핑크뮬리와 국화, 겨울에는 수선화와 동백꽃이 차례로 대지를 물들이며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송봉규 선생 아호를 딴 재암 수석관에서는 제주 현무암과 기괴한 형상의 용암석, 국내외에서 모은 진귀한 수석들이 자연이 빚은 예술품처럼 전시돼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파리조류원에서는 화려한 깃털의 백한과 황금계 등 꿩들과 거대한 몸집의 타조도 만난다. 특히 화려한 공작새들이 도망가지도 않고 여행자 사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어슬렁거리는 풍경도 재미있다.
한림공원 재암민속마을 돌하르방.
한림공원 재암민속마을.
재암민속마을에는 사라져가는 제주 전통 초가와 돌담, 올레길이 그대로 옮겨져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옛 제주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울창한 송림 사이로 난 트로피컬 둘레길은 유료 관람차로만 들어갈 수 있다. 2㎞ 둘레길 탐험은 15분 정도 걸리는데 제주의 자생 나무들과 공원 측이 반세기 넘게 가꾼 원시림 형태의 조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짙은 그늘 아래로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가 가득해, 걸어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깊은 숲의 정취를 차 안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한림공원 트로피칼 둘레길 투어 용설란.
한림공원 석분재원.
수백 년 수령의 소나무와 매화나무 분재가 현무암 위에서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절경을 빚어내는 제주석분재원을 지나면 협재굴과 쌍룡굴이 만난다. 석회 동굴에서만 볼 수 있는 황금빛 종유석과 석순이 용암 동굴 안에서 자라나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복합 동굴이다. 1971년 협재굴이 처음 문을 연 뒤 1983년 쌍룡굴까지 개방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한림공원 마지막은 산야초원이 장식한다. 제주의 자생 야생화와 들풀들이 오솔길을 따라 소담하게 피어나며, 하루 종일 감탄으로 채워졌던 발걸음을 차분하게 다독여 준다.
금능해수욕장과 비양도.
◆금능해변서 물놀이할까 비양도 탐험할까

한림공원 정문을 나서자 나란히 붙은 협재해수욕장과 금능해수욕장이 펼쳐진다. 한없이 맑고 푸른 바다에선 피서객들이 시원한 물놀이를 즐긴다.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수심 덕분에 한여름 물놀이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썰물 때가 되면 광활하고 평평한 은모래 대지가 바다 쪽으로 길게 드러나며, 수심이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않을 만큼 얕아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피서객들의 발길이 유독 잦다.

특히 금능해수욕장과 협재해숙욕장 백사장 안쪽으로는 야자수와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잠시 쉬어가기에도 그만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바다 빛깔. 탄산칼슘 성분의 하얀 조개모래가 얕은 수심의 투명한 바닷물과 만나 강한 제주 햇살을 반사하는 덕분에 옥빛과 에메랄드빛이 겹겹이 번지는 이국적인 색조를 빚어낸다.

협재·금능해수욕장과 야자수.
바다에 봉긋 솟은 신비로운 섬 비양도는 두 해변을 예쁜 수채화로 만들어 버린다. 한림항 도선 대합실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면 15분 만에 닿는 비양도는 제주에서 가장 최근에 형성된 막내 섬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목종 5년인 1002년 무렵 이 일대에서 화산이 분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연유로 비양도 주민들은 ‘천년의 섬’이라 부른다. 섬 전체가 해발 114.1m의 기생화산 비양봉으로 이뤄져 있으며 다양한 기암괴석을 만난다. 특히 북쪽 해안에서는 용암 속 가스가 뿜어져 나오며 굳어진 굴뚝 모양의 희귀한 용암기종, ‘애기 업은 돌’을 만나는데 아기를 등에 업은 여인의 형상을 똑 닮았다. 동남쪽 펄랑못은 지하로 스며든 바닷물과 빗물이 뒤섞여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염수호로, 밀물 때는 짠물이 밀려들고 썰물 때는 다시 민물에 가까워지는 독특한 생태를 간직하고 있다.

해 질 무렵 협재와 금능의 바다는 또 한 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하루 종일 옥빛으로 반짝이던 물결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그 위로 비양도는 검은 실루엣처럼 떠오른다. 섬 너머로 해가 잠기는 순간, 하늘과 바다는 온통 주황빛으로 타올랐다가 서서히 보랏빛으로 저물어가며 가슴에 잔잔한 제주 풍경 한 장 남긴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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