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넘치는데 추억은 줄었다, 카메라롤 시대의 기억법[IT 칼럼]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방대하고 선명하게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 내면에 새겨진 진짜 추억의 밀도는 그 어느 때보다 빈약해졌다. 사진으로 완벽히 저장했다고 믿는 순간, 진짜 경험이 신기루처럼 흩어지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에서는 인간의 기억 과정을 크게 부호화(Encoding), 저장(Storage), 인출(Retrieval)의 3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 문제는 부호화 단계에서 발생한다. 무언가를 사진으로 남기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기기가 나 대신 이 순간을 기억해줄 것이라 믿게 된다. 뇌의 입장에서는 굳이 에너지를 들여 눈앞의 정보를 뇌세포에 각인할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린다 헨켈이 명명한 ‘사진촬영장애 효과(Photo-Taking-Impairment Effect)’는 이를 정확히 꼬집는다. 피사체를 향해 셔터를 누르는 행위가 시각적 집중력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뇌가 스스로 기억하려는 인지적 노력을 중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신경학적인 관점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뇌에 ‘이제 잊어버려도 좋다’고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두 번째 문제는 기억의 저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소외 현상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기억은 결코 2D 평면의 JPEG 파일처럼 단편적이지 않다. 진짜 추억은 그날 불어오던 바람의 습도, 귓가를 스치던 낯선 언어의 억양, 함께 걷던 사람의 미세한 체향, 그리고 내 마음속에 일던 묘한 떨림 같은 다감각적 정보들이 시냅스를 통해 복합적으로 얽히며 형성된다.
피사체를 담아내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안, 우리의 뇌는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의 스위치를 꺼버린다. 스마트폰 화면의 좁은 시야에 갇힌 채 현실과 단절된 경험은 결코 뇌의 깊은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눈을 감았을 때 나를 그 시간으로 다시 데려다줄 감각적 단서가 상당 부분 휘발돼버리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AI가 기억의 마지막 단계인 인출 과정마저 우리 뇌로부터 강탈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신 스마트폰은 AI 기술로 위치 정보와 안면 인식 데이터 등을 분석해 ‘1년 전 오늘’, ‘잊지 못할 여름휴가’라는 이름으로 정교하게 편집된 기억의 하이라이트를 떠먹여준다. 그러나 기억은 머릿속에서 정보를 끄집어내기 위해 애쓰는 ‘능동적 회상의 수고스러움’을 거칠 때 비로소 강화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이 기억의 적이라는 성급한 결론이 아니다. 사진은 망각에 맞서는 가장 오래되고도 다정한 기술이다. 오래된 가족사진 한장은 이미 사라진 목소리와 집의 냄새, 그 시절의 자신을 되살린다. 사진은 기억을 호출한다. 다만 호출되는 기억이 풍성해지려면, 사진이 경험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경험으로 되돌아가는 입구여야 한다.
문제는 카메라롤이 입구가 아니라 창고가 될 때 시작된다. 창고에는 너무 많은 것이 쌓여 있고, 너무 많은 것은 곧 너무 적은 것과 비슷해진다. 추억은 주의의 깊이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모든 순간을 보존할 수 없다. 하지만 몇몇 순간을 충분히 살아낼 수는 있다. 그 차이가, 사진은 넘쳐도 추억은 메말라가는 시대에 인간의 기억을 다시 인간의 것으로 돌려놓는다.
류한석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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