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모되지 않는 얼굴, 박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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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박해일에게는 '배우의 얼굴'이 있다. 선한 사람도, 서늘한 사람도, 지적인 인물도, 어딘가 위태로운 사람도 어색하지 않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는 끝내 속을 알 수 없는 용의자가 됐고, <은교>(2012)에서는 칠십대 노시인으로 변신했다. <관상>(2013)과 <한산: 용의 출현>(2022)에서는 시대극의 한가운데 섰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에서는 사랑에 흔들리는 형사의 미세한 감정을 그려냈다. 어느 한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얼굴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긴 시간 수많은 작품을 거쳤음에도 좀처럼 소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 수를 무리하게 늘리지 않았고, 익숙한 캐릭터를 반복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한국 영화의 중요한 순간마다 굵직한 감독들은 박해일을 찾았다. 봉준호, 박찬욱, 한재림, 김한민, 허진호 감독까지. 장르도 시대도 다른 감독들의 영화 안에서 박해일은 번번이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냈다. 20년 넘게 스크린을 지켜왔지만, 여전히 다음 얼굴을 궁금하게 만드는 배우다.
4년 만의 복귀, "큰 호기심이 생겼다"
그가 4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다. 2022년 <헤어질 결심>과 <한산: 용의 출현> 이후 선택한 작품은 허진호 감독의 신작 <암살자(들)>이다. 1974년 8월 15일 벌어진 영부인 저격 사건을 모티브로, 남겨진 기록과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허진호 감독과는 <덕혜옹주>(2016) 이후 10년 만의 재회다.
이번에 박해일이 입은 얼굴은 진실을 좇는 기자다. 무수한 검열과 외압에도 물러서지 않고 사건의 의문을 파고드는 신문사 사회부 부장 재환을 연기한다. 현장을 목격한 형사 철구 역의 유해진, 열정적인 신입 기자 영일 역의 이민호와 함께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의 사건을 좇는다.
1974년은 박해일이 태어나기 전의 시대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도 배우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는 "처음 다가갈 때 조심스럽고 예민했던 건 사실"이라고 했다. 동시에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이 작품의 메인 시대가 1974년도예요. 제가 태어나기 직전의 시대죠. 개인적으로 그 공간과 시대가 궁금했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 호기심을 현실로 만들어준 것은 촬영 현장이었다. 허진호 감독은 당시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세트보다 실제 공간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특히 1970년대 신문사를 구현한 공간은 박해일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기자들의 공간, 신문사에 딱 들어서는 순간 정말 마법 같았어요. 소품 하나하나가 대단하더라고요."

1974년 신문사에 들어선 순간, "마법 같았다"
그 공간에서 박해일은 재환을 만들어갔다. 사건 현장에 직접 있지는 않았지만 신문사의 생중계를 통해 저격 사건을 접하고, 기자의 직감으로 의문을 감지해 하나씩 질문하고 취재하는 인물이다. 허진호 감독은 처음부터 재환을 "논리적이고 생각이 많은 인물"로 그렸고, 그 얼굴로 박해일을 떠올렸다.
박해일에게도 10년 만에 다시 자신을 찾은 감독의 제안은 각별했다.
"<덕혜옹주> 이후 10년 만에 저라는 배우를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했어요. 쉽지 않은 캐릭터지만 진실을 향해 단단하고 노련미 있게 밀고 가는 인물을 연기해주면 좋겠다고 짧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믿어주신 건 감사했지만 그만큼 부담도 됐습니다."
유해진과의 재회에는 더 긴 시간이 놓여 있다. <이끼>(2010) 이후 16년 만이다. 박해일은 유해진을 두고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고 했다.
"선배님의 매력이 그렇잖아요. 조선시대면 조선시대, 70년대면 70년대에 정말 있을 법해요. 리얼리티를 완성하는 배우죠. 저와 이민호 씨가 뭘 하든 다 열어놔 주셨어요. 저는 너무 편했고, 얻어간 것이 많았습니다."
유해진이 바라본 박해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이끼>를 함께 찍을 당시부터 박해일의 눈이 부러웠다며 "이번에 같이하면서 더 깊어진 눈빛을 느꼈다. 해일 씨 눈에는 뚝심이 있다. 에너지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박해일은 특유의 멋쩍은 표정으로 "뱀 눈인데 왜"라고 받아쳐 현장을 웃게 했다.
후배 이민호가 기억하는 박해일은 또 다른 모습이다. 박해일은 자신의 촬영이 없는 날에도 이민호의 첫 촬영 현장을 찾아 카메라 밖에서 직접 상대 대사를 해줬다. 이민호는 박해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긴장이 풀리고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자신의 장면이 아닌 순간에도 현장에 남아 후배의 연기를 받아주는 배우. 허진호 감독이 전한 이 일화는 박해일이 카메라 밖에서 어떤 배우인지를 보여준다.
박해일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중요한 순간을 여러 차례 통과했다. 4년 만에 돌아온 그는 1974년의 신문사에 앉아 진실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기자가 됐다. 수많은 얼굴을 거쳤지만, 아직도 박해일에게는 보지 못한 얼굴이 남아 있다. 이번에는 <암살자(들)>이다.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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