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자로만 알았던 할아버지의 과거... 손녀가 복원한 독립운동가의 삶

최다원 2026. 8. 15. 04:3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비행기 구경도 쉽지 않던 196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한 이민자 가족. 아버지 이은설은 대학에서 통계학을 가르치고, 장녀 마거릿 주혜 리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한 모범생으로 성장한다.

아들은 1993년 아버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이후에도 더 많은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건강이 악화되면서 딸에게 가족의 뿌리를 찾는 일의 배턴을 넘겨준다.

"아버지 없는 삶을 굉장한 낙인처럼 여기셨다. 설령 자신의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는 기록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그저 알고 싶었던 거다. 또 종손이어서 더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이 가족의 역사를 찾지 않으면 이대로 끝날 수 있다는 걱정. 그게 강력한 동기가 아니었을까."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비밀의 들판' 쓴 마거릿 주혜 리 인터뷰]
이철하, 학생 항일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
4년 옥고 후유증으로 27세 나이에 사망
아내 민금순, 남편 일 함구하며 가족 지켜
1990년대 아들 이은설이 부친 흔적 조사
사망 60년 만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배턴 이어 받은 손녀가 추가 조사 이어가
1933년 촬영된 이철하(왼쪽 사진)와 1960년 촬영된 민금순. 마거릿 주혜 리 제공

비행기 구경도 쉽지 않던 196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한 이민자 가족. 아버지 이은설은 대학에서 통계학을 가르치고, 장녀 마거릿 주혜 리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한 모범생으로 성장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할머니 민금순은 이따금 아들 부부의 집을 찾아 손주들에게 한국말을 들려준다.

단란해 보이지만, 이들의 이야기엔 언제나 할아버지 이철하의 존재가 누락돼 있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유 외에도 그를 가족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은 건 아내 민금순의 의지였다. 전과자이자 빨갱이였던 남편을 기억에서 도려냄으로써 가족을 지켜내겠다는 의지.

짧은 생애 이철하는 수감 생활 중 앓은 결핵을 어린 아들에게 옮기고 만다. 이로 인해 병역의무를 마치지 못하며 당시 한국 남성의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된 이은설은 미국 유학길을 택한다. 그곳엔 '애비 없는 자식'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이도, 가족의 아픔을 아는 이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시들지 않았다. 1992년 안식년을 맞아 부친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어머니는 여전히 말이 없다. 6·25 전쟁 피란길에 어머니가 태워버린 아버지의 책과 수감기록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서울의 동료에게 사정을 털어놓자, 뜻밖의 답이 돌아온다. "대단한 분이야!"

일제에 맞서 학생운동을 이끌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지사 이철하의 역사는 그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아들은 1993년 아버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이후에도 더 많은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건강이 악화되면서 딸에게 가족의 뿌리를 찾는 일의 배턴을 넘겨준다.

이달 한국에 소개된 '비밀의 들판'은 리 작가가 그 20여 년간의 여정을 담은 책이다. 재미교포 2세의 렌즈로 바라본 20세기 질곡의 한국사가 낯선 울림을 준다.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그를 1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나 집필 과정과 출간 의의, 소감 등을 물었다.

'비밀의 들판' 저자 마거릿 주혜 리가 1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인터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다빈 기자

-책은 시기와 장소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특히 이철하가 겪은 일의 진상은 말미에야 드러나는데.

"역사가 선형적으로 전개될지언정, 사건 발생 순서대로 발견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과거에 대한 우리의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그 점을 반영하고 싶었다. 또 나는 이 책을 일종의 미스터리 소설로 생각했다. 독자들이 결말을 찾아 끝까지 책을 읽어 나가길 바랐다."

-내밀한 가족사를 공개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조사를 시작할 무렵 기존 일에 회의를 느끼고 뉴욕대 저널리즘스쿨에 다니고 있었다. 수업을 들으며 우리 집안의 역사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과 교차점이 있고, 알릴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이후 진보성향 잡지 '더 네이션'에서 일하며 학문적 호기심이 이어졌다."

-부친은 이철하의 묘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이장하는 순간에도 그의 수감 사실을 감추려고 했다.

"아버지가 두려워한 건 부친이 공산주의자라는 게 드러나는 거였다. 자신 역시 진보주의자이고, 부친이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간 게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한국에서 가장 반공 교육이 심한 시기 성장했기 때문에 '책에는 할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는 내용을 쓰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계속 부친의 과거를 알고 싶어 했던 건가.

"아버지 없는 삶을 굉장한 낙인처럼 여기셨다. 설령 자신의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는 기록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그저 알고 싶었던 거다. 또 종손이어서 더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이 가족의 역사를 찾지 않으면 이대로 끝날 수 있다는 걱정. 그게 강력한 동기가 아니었을까."

-자료를 찾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정부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자료는 없었나.

"거의 없었다. 많은 자료가 6·25 전쟁 때 소실됐다고 했다. 식민시대 연구자들을 통해 수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동지였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조직원들에 대한 일제의 수사 및 수감기록을 갖고 있는 출판업자를 알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창고에 방치돼 있었다더라."

1995년 이철하의 국립대전현충원 이장식에 참여한 마거릿 주혜 리의 가족 및 친인척들. 마거릿 주혜 리 제공

-독립운동가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에 실망하진 않았나.

"그들에 대한 기록을 아카이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한 실망을 한 건 사실이다. 아마 한국이 빠른 경제성장을 이뤄 나가면서 과거를 돌이켜 볼 여력이 없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또 과거란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지 않나. 굳이 들춰내지 않으려고 했던 부분도 있지 않았을까."

-책의 핵심은 할머니와의 인터뷰다. 평생 남편을 원망했지만, 남편 옆에 묻히기로 마음을 바꿨다.

"20대에 남편을 잃고 가족을 지켜낸 할머니가 진정한 영웅이다. 물론 할머니 또한 일본에 반감을 갖고 계셨지만, 생전 (항일운동을 하다 일찍 세상을 뜬) 남편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은 적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현충원에 묻히길 결정하신 것도, 아들을 위한 결정이었을 걸로 보인다."

-만약 할아버지 이철하를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가.

"내 눈으로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왜 고등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는지, 왜 학생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등 묻고 싶은 것이 정말 많다. 할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할아버지도 직접 인터뷰하고 싶다."

-한국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깊은 나라다. 독자들이 이철하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길 원하나.

"알아줬으면 하는 점은,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가 반제국주의였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시대에 공산주의자였다는 것과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다. 또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고정돼 있는 게 아니란 점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앞으로 가족사를 주제로 한 연구를 더 할 계획이 있는가.

"어머니 생애 마지막 10여 년간 치매를 겪었던 경험을 중심으로 책 집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울 인사동에서 자란 그는 미국에서 50년 넘게 살았음에도 치매가 진행되자 다시 한국어로만 말하고 쓰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갔는지 관심이 있다."

독립운동가 이철하는
1909년 12월 11일 충남 공주군에서 태어났다. 1927년 공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일왕 추도식에서 검은 완장 대신 조선식 상복을 입은 일로 구타 당했다. 이 일로 일본인 교장에게 "제국주의적 태도를 반성하라"고 항의해 퇴학 당한 뒤 충남 공주 최초의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공산주의를 접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일제의 교육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격문을 살포하고 동맹휴학을 조직하는 일에 가담하다가 일제에 체포됐다. 1930년 4월 징역 4년을 선고 받고 만기 출소했지만 고문 후유증 등으로 1936년 9월 6일 사망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