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집 고쳐 살고, 좁은 집 쪼개 쓰고… 직장과의 거리는 포기
끊겨가는 주거 사다리
자구책 찾는 사람들

직장인 A씨는 최근 서울 북부의 20년 된 24평 구축 아파트를 샀다. 내 집 마련의 기쁨도 잠시, 낡은 공간을 고쳐 쓰기 위해 A씨는 퇴근 후와 주말을 쪼개가며 직접 인테리어 작업에 나섰다. 누런 벽지를 떼어낸 다음 새로 도배하고 방문과 창틀, 몰딩 등에 상아색·흰색 페인트칠을 했다. 장판도 뜯어내고 새 걸로 깔았다. 문 손잡이와 조명, 욕실 샤워기 역시 직접 사서 갈았다.
사무직 회사원인 A씨가 유튜브 관련 영상을 뒤져가며 한 달 가까이 인테리어에 매달린 이유는 하나였다. 집 사는 데 그동안 남편과 모은 돈을 다 쏟아붓고 빚까지 진 상황에서 인테리어를 전문 업체에 맡길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신축 아파트는 꿈도 못 꾸는 형편이고, 값이 더 치솟기 전에 집을 사려면 어쩔 수 없었다”며 “이렇게 해서라도 집이 생겼으니 감지덕지해야 하지만, 인테리어하는 게 생각보다 힘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분양가는 치솟고 청약 경쟁은 고공 행진, 설상가상 대출까지 막히면서 집을 구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오래된 집을 사 직접 고쳐 살고, 좁은 집을 손봐 필요한 공간을 만들어 쓴다. 직주근접(職住近接·직장과 사는 집이 가까운 것)도 포기한다. 외곽에서 장거리 출퇴근을 감수한다. 집을 사기 위해 삶의 다른 조건을 하나씩 포기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주거비 부담이 삶의 질을 갉아먹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완셀·반셀… 늘어가는 셀프족
A씨 같은 ‘셀프 인테리어족(族)’은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지난 1년 내 인테리어 시공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 10명 중 7명(66.1%)이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고 밝혔다. 신조어도 생겼다. 혼자 모든 작업을 하면 ‘완셀(완전 셀프)’, 싱크대 교체나 화장실 타일 시공 등 어려운 시공만 업체 도움을 받으면 ‘반셀(반 셀프)’이라고 부른다.
셀프 인테리어 정보를 공유하는 회원 수 99만명의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조언을 구하는 게시물이 올라온다. 한 신혼부부는 이달 초 “서울 32평 19년 구축 아파트를 샀는데 셀프 인테리어를 하고 싶다”고 썼다. “33년 구축 올 수리 금액이 1억이라기에 혼자 시도하기로 결심했다”거나 “도배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비용 절감을 위해 직접 장판을 뜯어내는 중” 같은 절절한 사연도 여러 건이다. 한 직장인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직접 해결해 업체 견적을 3200만원에서 절반 이상 줄였다”고 했다.
노후 아파트 셀프 인테리어 비용과 과정을 공개한다는 유튜브 영상들은 수십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한다. 관련 컨설팅 업체도 등장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업체에 맡기는 방식 대신 각 공정 기술자를 직접 섭외하고 자재도 직접 준비하는 ‘반셀프’ 방식으로 시공비를 30~40% 아끼는 법을 알려준다”는 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디자인이나 취향이 우선이었다면 지금은 ‘얼마나 아낄 수 있느냐’를 가장 먼저 묻는다”며 “공정 일부만 맡기고 나머지는 직접 하겠다는 문의가 적지 않다”고 했다.

◇집 사는 데 모은 돈 다 썼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원하는 지역의 신축 아파트 가격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정부는 주택 시장 과열을 잡겠다며 수도권 규제 지역을 중심으로 대출 규제를 강화하는 부동산 대책을 작년 6월 내놨다. 가뜩이나 공급이 부족한데 값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주택 담보대출 한도마저 줄자 실수요자가 원하는 지역의 신축 아파트를 마련하기가 한층 어려워졌다. 상대적으로 가격 부담이 적은 구축 아파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됐다.
문제는 노후화된 집을 살 경우 상당한 액수의 추가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오래된 배관과 욕실·바닥재·벽지 등을 손봐야 하는 경우가 많고, 사실상 리모델링이 필수인 곳도 많다. 자재 값과 인건비 상승으로 인테리어 비용까지 올라가면서, 최소한으로 손을 대려 해도 업체에 맡기면 수천만원 이상의 견적서를 받아 들기 일쑤다. 30대 신혼부부 김모씨는 “집을 사는 데 자금을 모조리 쏟아부은 입장에서는 직접 도배를 하고 페인트칠을 하며 공사비를 줄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했다.
실수요자 사이에서는 “낡은 집이라도 살 수만 있으면 다행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그나마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은 직접 고쳐 쓰며 주거 환경을 개선할 수 있지만, 세입자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 세입자는 “언젠가는 나가야 하는데 비싼 돈을 들여 업체를 쓰기는 부담스럽고, 사고나 하자로 이어질까 봐 셀프 인테리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난 3일 정부의 부동산 세제 개편안 발표 이후 불안감을 호소하는 세입자가 늘고 있다. 비거주 1주택자에 대한 보유세 부담이 커지게 되자 임대차 계약이 끝나면 집에 들어오겠다는 집주인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 커지며 이사? 꿈도 못 꿔
생애 주기에 맞춰 더 나은 환경으로 단계적 이동을 하는 ‘주거 사다리’가 끊기다시피 하면서 소형 아파트에 가벽을 세우거나 수납장을 벽처럼 활용해 필요한 방을 하나 더 만드는 ‘공간 쪼개기’도 늘고 있다. 통상 가족이 늘거나 생활 공간이 부족해지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이른바 ‘평수 갈아타기’가 어려워지면서 기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이다. 거실을 두 공간으로 쪼개 아이 놀이방을 만들고, 안방 일부를 서재로 바꾼다. 공간 확보를 위해 붙박이장 대신 이동식 수납장을 들이고 식탁을 접이식으로 바꾸기도 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서울에서 거래된 전용 면적 21~40㎡ 초소형 아파트 매매 거래량은 310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055건)보다 51% 늘었다. 2021년(2450건) 이후 5년 만에 가장 많다. 집값 상승과 대출 규제 등으로 원하는 평수를 포기하고 상대적으로 가격 부담이 적은 초소형 아파트를 선택하는 실수요자가 늘어난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40대 장모씨는 “아이가 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대출이 막히면서 결국 공간을 최대한 늘려 살고 있다”고 했다.
낡거나 좁은 집을 피하려면 직장과의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직장이 서울 도심 한복판인데도 외곽이나 수도권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장거리 출퇴근은 어느새 일상이 됐다. 과거에는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직장 접근성이 중요한 선택 기준이었지만 집값 상승과 대출 규제 강화가 누적되면서 대출 한도와 감당할 수 있는 집값에 맞춰 거주지를 정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람들이 집을 고쳐 쓰거나 외곽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단순한 소비 트렌드가 아니라 실수요자의 구매력 저하가 만든 구조적 변화로 본다. 과거 셀프 인테리어나 공간 재구성이 취미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비용을 줄이기 위한 생존 전략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상영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주거비를 줄이는 대신 입지에서 이익을 얻거나, 입지를 포기하는 대신 더 넓은 공간을 얻는 식의 선택이 이뤄지고 있다”며 “주거비와 생활의 질 사이에서 끊임없이 교환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대한부동산학회장을 지낸 서진형 광운대 부동산법무학과 교수는 “집값은 계속 오르는데 근로소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이런 추세면 집을 새로 사기보다 기존 집을 자신의 형편과 취향에 맞게 고쳐 쓰는 흐름이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360] 일본 니가타의 다랑이논
- [정수윤의 길을 걸으며] [49] 앤 카슨의 ‘녹스’ 읽는 밤
- 대형마트에서 파는 새우… 거슬러 올라가니 악취가 진동했다
- 공소청, ‘주가 14배 뻥튀기’ 영풍제지 주가조작 1심에 항소... “추징금 가벼워”
- 상어 ‘부캉이’ 다음은 수달 ‘온처니’?… 도시가 아쿠아리움된 부산
- [만물상] 車 없는 잠수교
- 나주서 부부 살해 50대 구속… 경찰, 신상공개 검토
- 5년 내리 꼴찌였던 삼성, 10년 만에 프로농구 개막 2연승
- JYP 신사옥 건립 ‘기습 철회’… 서울시 “SH만의 잘못 아냐, 유감”
- 트럼프가 바란 노벨평화상에 전쟁범죄 처벌 앞선 나비 필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