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육수와 서늘한 메밀면의 묵직한 리듬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2026. 8. 1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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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평양냉면
서울 강남구 ‘민성옥’의 평양냉면.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아버지는 서울 사람이었다. 부산에 내려와서도 젓갈이 든 김치를 보면 인상이 구겨졌다. 영도 산복도로의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을지로식으로 황태포와 골뱅이를 간장 양념에 무쳤다. 아버지는 서울 소주 맛을 그리워하며 OB 야구단을 응원했다.

할머니는 황해도 분이었다. 일흔이 넘어서도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하셨다. 젊었을 때는 돼지고기 한 근을 혼자 먹었다는 이야기를 동생과 나에게 해주었다. 아버지는 동생과 나를 데리고 초량, 남포동, 자갈치, 온천장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사 먹였다. 정작 아버지는 어릴 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월급을 스스로 써 버리며 밖으로 나돌았고 할머니는 홀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남의 집 창고에서 살던 시절도 있었다는 사실은 후에 알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외식으로 평양냉면에 불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들어보지 못했다.

서울에 올라와 아버지와 처음 평양냉면을 먹었을 때 아버지는 “맛이 참 특이하다”고 말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냉면을 먹었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평생 아버지 입맛의 한 부분은 20대 시절 을지로 호프집에서 서성일 뿐, 오래전부터 가족 외식의 대명사였던 냉면과 불고기에는 끝내 발을 걸치지 못했다.

평양냉면은 그 사이 여러 변곡점을 지났다. ‘면스플레인’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응당 미식가라면 평양냉면을 먹어야 하고, 그 먹는 법이란 따로 정해져 있다는 묘한 선민의식도 있었다. 남북 관계에 따라서 건설회사 주식이 오르고 냉면집에 인파가 몰리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권위와 꼭 먹어야 한다는 당위가 사라지고 개인의 취향과 선호만 남은 듯하다. 취향이 면발과 국물 사이에 찍히는 점 하나라면, 선호에는 거리와 친절, 가격 같은 현실적인 조건도 끼어든다. 민성옥에서 나는 그 둘이 겹치는 지점을 어렴풋이 보았다.

언주역을 나와 강남의 파도처럼 굽이치는 언덕을 오르내렸다. 이마에 땀이 흐를 때쯤 대로변에 문을 낸 가게가 보였다. 가게의 천장은 높고 실내는 트여 있었다. 종업원들은 유니폼을 차려입고 격자로 놓인 테이블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먼저 제주 흑돼지 냉제육이 나왔다.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 부챗살처럼 가지런히 둘러놓은 모양에서 주인장의 성격이 엿보였다. 차갑게 식힌 돼지고기는 이에 씹힐 때마다 서걱서걱 부서졌다. 따라나온 민물새우장을 곁들이니 맛이 좀 더 입체적으로 변했다. 냉제육을 씹으며 돼지고기 한 근을 혼자 먹었다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산나물 만두는 고사리 같은 산나물에 들기름 등을 넣어 소를 만들었다. 코로 숨을 들이쉬면 야트막한 언덕에 온 것 같기도 했고 숨을 내쉬면 시골 어두운 부엌에서 조물조물 무쳐 나오던 산나물이 눈앞에 있는 듯했다.

취나물, 고사리 장아찌에 간장과 들기름을 넣은 냉면은 혀에 닿는 맛보다 코에 다가오는 향이 더 컸다. 갓 짰다는 들기름은 꽃과 씨앗 사이 그 어디에 있는 향기를 냈다. 간장을 좀 더 뿌려 간을 맞추니 그 향에 맞서는 맛이 면 사이에 들었다.

평양냉면이 마지막이었다. 하얀 자기에 담아 나온 냉면은 그 덕분에 맑은 육수가 더 도드라졌다. 육수를 먼저 마셨다. 애매하게 뱅뱅 도는 맛이 아니었다. 짠맛과 감칠맛의 자리가 각각 정해져 있었고 그 사이로 고기 냄새가 곧장 올라왔다. 면은 고집 센 선비처럼 가부좌를 단단히 틀었지만 젓가락으로 휘휘 달래자 조용히 몸을 풀었다.

젓가락으로 면을 한 움큼 들었다. 찰나에 삶고 물기를 알뜰하게 털었는지 면발은 산뜻하게 끊어지며 후두둑 입안을 돌아다녔다. 욕심을 부렸다. 바닷물을 삼키는 고래처럼 육수와 면을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찬 육수와 서늘한 메밀면이 한데 엉키며 점잖던 맛에 묵직한 리듬이 깃들었다.

육수 한 모금까지 다 마시고 자기의 맨바닥만 보였을 때 감당하기 힘든 포만감보다 오래 걸어 올라온 뒤의 상쾌함이 더 컸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이 맛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 이번에도 “맛이 참 특이하네”라고, 그리고 매번 그랬듯 “같이 먹어서 좋았다”고 했을 것 같다.

#민성옥: 평양냉면 1만6000원, 산나물 들기름 냉면 1만6000원, 산나물만두 1만5000원, 제주 흑돼지 냉제육 1만8000원. (02)552-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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