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부모의 마지막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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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이삿짐을 다 옮긴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 집 안에 머물렀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자식의 삶을 도와주는 일이 어느새 부모의 습관이 된다. 아이는 자랐는데도 부모의 마음은 좀처럼 그 크기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많이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늘 좋은 부모의 조건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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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이삿짐을 다 옮긴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 집 안에 머물렀다. 냉장고에 반찬을 넣고, 욕실에 필요한 물건을 채워 놓고, 창문이 잘 닫혔는지 다시 확인했다. 이미 충분히 정리된 공간인데도 손이 멈추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면서도 '혹시 더 해줄 일이 없을까?' 하는 마음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떠나지 못하는 것은 딸이 아니라 나였다.
부모는 오랫동안 자식의 앞일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자식의 삶을 도와주는 일이 어느새 부모의 습관이 된다. 아이는 자랐는데도 부모의 마음은 좀처럼 그 크기를 인정하지 못한다.
오늘의 부모들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정보도 많고 경제적 지원의 방식도 다양하다. 자녀가 실수하지 않도록 미리 알려주고 길을 닦아주려 한다. 그러나 많이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늘 좋은 부모의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해줄 수 있는데도 참고 기다리는 일이 더 어려운 사랑일 때가 있다.
부모가 대신 해결해준 문제는 당장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 문제를 통해 자식이 배울 기회도 함께 줄어든다. 혼자 장을 보고, 밥을 차리고, 작은 실수의 결과를 감당해보는 시간은 사소해 보여도 한 사람의 생활을 단단하게 만든다. 거친 길을 걸어본 발만이 단단해진다. 자립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그런 작은 일들을 스스로 해내는 경험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딸에게 더 해주고 싶었던 마음속에는 사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걱정도 있었고, 허전함도 있었고, 아직은 내가 필요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잡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내 불안을 달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사랑도 그늘이 된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무엇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늘은 볕을 막아주지만, 너무 깊으면 스스로 빛을 향해 뻗어갈 기회마저 가려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의 연락처를 화면에 띄웠다. "밥은 먹었니?"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지금 딸에게 필요한 것은 내 걱정을 확인하는 전화가 아니라 혼자 밥을 차리고 자신의 하루를 살아내는 시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마지막 공부는 언제 손을 놓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일이다. 너무 일찍 놓으면 상처가 되고, 너무 오래 붙잡으면 그늘이 된다. 기다림 또한 사랑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이다. 가장 깊은 사랑은 끝까지 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스스로 햇빛을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서는 일인지 모른다.
[박상태 전 관세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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