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태어난 나폴레옹이 식탁 위에 남긴 가장 우아한 유산 [명욱 교수의 주류 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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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대표 그림.
유럽의 봉건 군주들은 나폴레옹을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습 영지와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해체할 '위험천만한 사상의 유포자'로 보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1세가 법과 과학으로 와인의 토대를 다졌다면,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에 이르러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 와인 시장의 가장 위대한 마케팅 혁신이 완성되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근대적 산업 성과와 국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파리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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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현대화를 이끌다

<나폴레옹의 대표 그림.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그림으로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고개(Grand Saint-Bernard)를 넘었던 실제 원정이 배경이다. 다만 실제로는 노새를 타고 안내인의 도움을 받으며 조용히 넘었다고 전해진다>
매년 8월 15일은 '광복절'이자 국가 경축일이다. 그런데 이 날은 세계사적으로도 남다른 상징성을 가진다. 바로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섬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코르시카는 프랑스 본토가 아닌 이탈리아에 가까운 변방으로, 그의 부친 카를로 보나파르트 역시 프랑스에 맞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이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포성이 울린 지 정확히 10년 뒤인 1799년, 30세의 청년 장군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통령정부의 '제1통령'으로 정권을 잡았고, 이후 국민투표를 거쳐 1804년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혁명이라는 지독한 혼돈 속에 프랑스 국민은 강력한 정권이라는 안정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수많은 왕가와 기득권층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벌벌 떨었다. 이유는 단순히 그의 군사적 천재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작 무서운 것은 그의 대포보다 '그의 군대가 들고 온 혁명 사상과 제도'였다.
나폴레옹은 정복하는 영토마다 봉건적 신분제를 깨부수고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와 근대적 법치주의를 이식했다. 유럽의 봉건 군주들은 나폴레옹을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습 영지와 기득권을 근본적으로 해체할 '위험천만한 사상의 유포자'로 보았던 것이다.

나폴레옹 법전이 수백 년의 봉건제를 뒤흔든 이유
유럽 왕가들의 공포를 현실로 만든 정점이 바로 1804년 제정된 '나폴레옹 법전(Civil Code)'이었다.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 스스로 "40번의 전투 승리보다 영원히 남을 나의 진짜 영광"이라 말했다고 전해지는 이 법전이 인류사에 특별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360여 개로 찢어져 있던 관습법의 통일이다. 혁명 이전 프랑스는 남부의 로마법, 북부의 관습법, 영주와 교회의 특권 칙령 등 전국에 360여 개의 법률이 난립하여 "말을 타고 영지를 옮길 때마다 법이 바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나폴레옹은 이를 단 하나의 명확한 성문법으로 통일했다.
둘째, 신분제 폐지와 '법 앞의 평등'의 법제화다. 귀족과 성직자가 누리던 면세 특권과 봉건적 계급 특권을 완전히 해체했다. 신분, 출생, 재산과 상관없이 모든 남성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종교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는 프랑스 대혁명의 핵심 가치를 단단한 법률 문장으로 고착화했다.
셋째, 사적 소유권의 절대적 보장과 국가 세속화의 계승이다. "법률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 한, 소유자는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는 원칙을 통해 부르주아와 농민층의 사유재산권을 완벽히 보호했다.
혁명 기간 교회가 몰수당한 토지를 사들인 농민들의 법적 권리도 완전히 인정되었다. 이미 1792년 혁명 입법의회가 시행한 것이었으나, 나폴레옹 법전은 이 혁명의 성과를 폐기하지 않고 명문화된 성문법으로 단단히 계승했다. 흔들릴 수 있었던 시민 사회의 세속화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물론 그가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민주주의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언론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한 것은 사실이었고, 심지어 1802년에는 혁명정부가 폐지했던 식민지 노예제를 법령으로 부활시켜 생도맹그(현 아이티)에 이를 지키려는 원정군까지 보냈다. 자유·평등·박애의 이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중세를 이어온 구체계가 멸망하고 현대의 민주주의로 이어진 가교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다.
부르고뉴 '도멘(Domaine)'과 세계 최고가 와인의 탄생
와인 산업의 역사에서 나폴레옹 법전이 가져온 가장 근본적이고 특별한 변화는 바로 '장남 독점 상속제(Primogeniture) 폐지'와 '균등 상속제 도입'이었다. 중세 귀족 가문의 부를 소수에게 집중시켜 주던 장남 독점 상속을 법으로 금지하고, 부모의 재산을 모든 자녀에게 평등하게 나누어 주도록 의무화했다. 이 제도는 부의 소수 집중을 막고 두터운 자영 농민층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때 수도원과 귀족에게 몰수되어 농민들에게 매각된 포도밭들은 이 균등 상속제에 따라 세대를 거치며 자녀들에게 잘게 분할되어 승계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부르고뉴 지역을 대표하는 소규모 자영농 중심의 포도밭 체제, 즉 '도멘(Domaine)' 구조가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법적 계기 중 하나였다.
이처럼 소규모 농가 단위로 잘게 쪼개진 포도밭 구조는 역설적으로 포도밭마다 한해 수확되는 와인의 생산량을 극도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렇게 수량이 엄격히 한정된 소량 생산 와인은 독보적인 희소성을 갖게 되었으며, 오늘날 전 세계 와인 컬렉터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세계 최고가 와인 산지 부르고뉴'를 만들어낸 핵심적 토대가 되었다.

와인의 과학화와 역사상 최고의 '인플루언서'
나폴레옹은 와인의 기술적 표준화와 글로벌 브랜딩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내무부 장관이자 화학자였던 장앙투안 찹탈(Jean-Antoine Chaptal)을 적극 후원하여 가당 기술을 이론화하고 전국적으로 장려했다. 가당법, 즉 '샹탈리자시옹(Chaptalization)'은 아무 때나 무분별하게 설탕을 넣는 기술이 아니다.
일조량이 부족하거나 비가 자주 내려 포도가 제대로 익지 못한 서늘하고 불리한 해(Cool Vintage)에 한해, 발효 전 포도즙에 적정량의 설탕을 더해 부패를 막고 최소한의 품질과 보존성을 구제하는 과학적 조치였다. 날씨 변동에 취약했던 프랑스 북부 와인은 이 가당법 덕분에 악천후 속에서도 버려지지 않고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며 세계로 수출될 수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와 EU가 이 가당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알코올 도수 상승폭을 지역별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조치가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과학적 규범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나폴레옹은 역사상 최고의 와인 '인플루언서'였다. 그는 매 식사 때마다 부르고뉴 쥐브레 마을(현 쥐브레-샴베르탱)의 최고 그랑 크뤼 포도밭 와인인 '샴베르탱(Chambertin)'을 마셨으며, 전장으로 떠날 때도 샴베르탱 수송대를 대동했다. 또한 전쟁터를 누빌 때마다 샹파뉴 에페르네의 장레미 모에(Moët)를 찾아 휴식을 취하고 샴페인을 보급받았다. 이것은 현재의 모에 샹동으로 이어진다. 황제가 전장에서 보여준 와인 사랑은 "승리의 와인", "황제의 와인"이라는 강렬한 상징성을 부여하며 프랑스 와인과 샴페인을 유럽 최고의 사치재로 부상시켰다.

나폴레옹 3세와 보르도 등급제: 와인에 불멸의 계급을 부여하다
나폴레옹 1세가 법과 과학으로 와인의 토대를 다졌다면,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에 이르러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 와인 시장의 가장 위대한 마케팅 혁신이 완성되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근대적 산업 성과와 국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파리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를 개최했다. 황제는 박람회를 찾는 전 세계 방문객들이 프랑스 와인의 우수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명확한 품질 지표를 만들라고 보르도 상공회의소에 지시했다.
상공회의소의 위임을 받은 와인 중개인 조합은 주관적인 시음 대신, 지난 40년간(1815~1855년) 시장에서 실제 거래된 평균 가격 데이터를 바탕으로 평가를 진행했다.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와인이 최고 품질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였다.
이로 인해 보르도 메독(Médoc) 지방의 레드 와인 샤토들을 1등급부터 5등급까지 재편한 '1855년 보르도 그랑 크뤼 등급제(Grands Crus Classés)'가 세상에 등장했다. 샤토 라피트, 라투르, 마고, 오브리옹 등이 최고 1등급에 이름을 올린 이 등급 체계는 1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고급 와인 시장에서 절대적인 가격과 가치 판단을 지배하며, 와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구사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
코냑 '나폴레옹' 등급의 진실과 추억의 술
세계적인 브랜디인 코냑(Cognac) 라벨을 보면 가끔 'Napoléon'이라는 등급 명칭이 새겨져 있다. 흔히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떠날 때 코냑 오크통을 배에 싣고 갔고, 이에 감탄한 영국 장교들이 "나폴레옹의 코냑"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브랜드가 만든 흥미로운 '도시전설'에 가깝다.
실제로 코냑을 궁중의 공식 술로 채택하고 산업을 진흥시킨 진정한 주역 역시 나폴레옹 1세가 아닌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였다. 나폴레옹 3세는 1869년 코냑 하우스 쿠르보아지에(Courvoisier)에 황실 공식 공급 자격을 부여하며 코냑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훗날 프랑스 코냑통제국(BNIC)은 이를 기려 최소 6년 이상(Compte 6) 숙성된 고급 코냑에 공식적으로 'Napoléon' 등급을 부여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하다는 점이다. 과거 80~90년대, 해태에서 프랑스산 코냑 원액을 일부 믹스하여 제조했던 양주 '나폴레옹'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추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당대 서민들의 고급 술자리를 채워주며 한국인들에게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술의 대명사로 각인시킨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8월의 역사 속에서 되새기는 또 하나의 유산
7월의 대혁명이 구체제를 깨부수고 와인을 민중의 품으로 돌려준 '민주화'였다면, 나폴레옹 가문은 법과 과학, 그리고 등급제라는 제도를 통해 와인과 코냑을 세계 최고 반열에 올린 '현대화'의 완성자였다.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한 뜻깊은 날이다. 동시에 봉건적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법 체제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광복절 자체의 의미도 되새겨보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그 세 단어를 한 번 더 곱씹어보면 어떨까? 결국 자유롭게 식탁 위에 올리는 한 잔의 술도, 어떻게 보면 누군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그 가치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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