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잠수함?…오역이 부른 ‘가짜뉴스’가 신화를 쌓았다[이기환의 사래자(思來者)]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가? 혹은 세계 최초의 철갑 잠수정 혹은 잠수함인가?’ 최근 거북선과 관련해서 두 가지 뉴스가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나는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7월14일 울산 조선소를 방문한 영국의 앤 공주에게 HD현대와 영국의 오랜 인연을 언급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즉 1971년 조선소 건립을 위한 차관 도입에 나선 정주영 창업회장이 영국의 조선 기술 회사인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과 만나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이렇게 설득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6세기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나라입니다.”
앉아 노 젓기
이보다 보름 정도 앞선 6월30일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펴낸 ‘거북선 학술복원 보고서’도 필자의 눈길에 걸렸다. 이 보고서는 1795년(정조 19)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복원한 것이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의 명으로 이순신(1545~1598)의 일기·장계·행적 등을 집대성한 편찬물이다. 이 중 통제영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도설(圖說·판화 도면과 700자 설명문)이 담겨 있다. 이를 토대로 이번에 복원·재현된 두 거북선의 주요 특징을 일별해보자. 먼저 ‘통제영 거북선’은 의장 및 전투용으로 쓸 수 있는 구조임을 확인했다.

반면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돛대 없이 노’ 중심의 구조로 전투용으로 설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존에 출입구로 추정되던 개판(지붕) 양 옆면의 반육각형 구조물은 바깥쪽 관측과 전투 지휘를 위한 ‘관측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 구조인 두 척 모두 자체 무게 약 140.4t, 전체 길이 35.27m(113척)에 달하는 대형 전투선으로 추정됐다.
이번 복원·재현에서는 격군(노꾼·노 젓는 인원)이 ‘앉아서 노를 저었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거북선의 거대한 규모와 전투 때 폐쇄성을 고려할 때 기존의 정설인 ‘입식(서서 젓기)’ 방식은 구조적 제약이 컸을 것으로 분석됐다. 흔들리는 선체에서 격군의 안전과 전투 효율을 높이기 위해 ‘앉아 노 젓기’ 가능성이 제기된 것이다. 연구소 측은 1/30 크기의 통제영·전라좌수영 거북선 축소 모형을 제작했다.(홍순재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

거북선=철갑선인가, 장수함인가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이번에 복원·재현된 거북선 모형을 자세히 보라. 정주영 회장이 언급한 ‘거북선=철갑선’의 모습이 아니다. 물론 이번에 복원·재현된 거북선도 임진왜란 때 실전·배치된 거북선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 도설’도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유래되었으니 약간의 치수 가감이 없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거북선=철갑선’이라는 증거는 어떤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거북선=철갑선’인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거북선=세계 최초의 잠수함(정)’이라는 이야기가 꽤 오랫동안 사실처럼 퍼졌다. 이제부터 거북선 신화를 둘러싼 가짜뉴스의 향연을 이야기해보자.

거북선 발명자는 이순신이 아니다
우선 ‘거북선의 발명·제작자=이순신’이라는 말은 허구라 할 수 있다. 실록에 거북선이 등장한 것은 조선 초였기 때문이다. “1413년(태종13) 2월5일 태종(1400~1418)이 임진도에서 거북선과 왜선의 전투를 구경했다”(<태종실록>)는 것이다. 그 때도 거북선의 위력은 대단했다. 1415년(태종 15) 7월16일 좌대언 탁신(1367~1422)은 “적선이 거북선과 충돌하면 견뎌내지 못한다”면서 “거북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무적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태종실록>)고 보고했다.
그런데 이후 200년 가까이 태평성대를 이룬 조선에서 거북선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임진왜란(1592년) 즈음에 재등장한다. 이때 새롭게 개조·창안한 거북선으로 조선을 구한 이는 이순신이었다. <난중일기>를 보자. “거북선에 쓸 돛베(帆布) 29필을 받았다.”(1592년 2월8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3월27일), “비로소 베(布)로 돛을 만들었다”(4월11일), “거북선에서 지자·현자포를 쏘아보았다”(4월12일)는 따위의 일기가 보인다. 이순신이 전쟁 직전 거북선을 완성하고 시험 운용했다는 얘기다.

거북선은 돌격선
전쟁 발발 후에도 거북선을 실제 운용한 기록이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본영의 전선과 함께 거북선이 입항했다.”(1594년 2월4일), “거북선 2척이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해 출동했다”(2월25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당포파왜병장·1592년 6월)는 거북선의 구조적인 특징과 전술적인 운용방식을 보여준다. 이 장계는 조선 수군이 사천(5월29일)-당포(6월2일)-당항포(5~6일)-율포(7일)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내용을 담았다. 이 장계에서 이순신은 “신이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려고 특별히 ‘거북선(龜船)’을 만들었다”고 시작한다. 그러면서…. “앞에 설치한 용머리의 입으로 대포를 쏘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다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적선 수백 척이 둘러싸더라도 그 속으로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계는 “거북선을 처음 실전에서 쓴 것은 사천 전투(5월29일)였다”면서 “거북선이 적선 속으로 돌진…적의 배를 쳐부수고 군사를 몰살시켰다”고 전했다. 거북선은 당포해전(6월2일)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왜선 중…한 큰 배의 2층 다락 위에 적장이…앉아 있었습니다. 먼저 거북선이 곧장 돌격한 후…(각종 화포와 화살을 쏜 뒤) 들이받아 그 배를 깨뜨렸으며…적선을 모두 불살랐다.”
1751년(영조 27) 2월21일 영남 균세사 박문수(1691~1756)의 보고서를 봐도 거북선의 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 박문수는 “원래 거북선은 윗부분을 두꺼운 판자로 덮어 화살과 탄환을 피하는 구조로 제작됐다”(<영조실록>)고 보고했다. 또 이번 재현·복원의 근거가 된 <이충무공 전서>(1795)의 ‘거북선 도설’은 “벽체의 좌우에서 각각 11장의 널판을 고기의 비늘처럼 겹쳐서 올려 덮었다”고 설명했다. 즉 태종~임진왜란을 거쳐 영·정조 때까지 ‘거북선=철갑선’이라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나무로 덮은 구조 위에 쇠 송곳을 박아 왜적의 승선을 막았다는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철갑을 두른 거북선이 아니라는 얘기다.

서양인이 쏘아 올린 ‘철갑 거북선’설
그렇다면 왜 ‘거북선=철갑선’이라는 얘기가 나오는가. 도노오카 진자에몬(外岡甚左衛門)의 <고려선전기>(1592)를 보자. “큰 배 중 3척은 ‘철로 요해(要害·방어)하여’ 다양한 화기로 번갈아 아군(일본군)을 쏘아대어…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바로 이 ‘철로 요해’라는 구절 때문에 ‘거북선=철갑선’이라는 견해가 나왔다. 그러나 나무 판재로 위를 덮고 그 위에 쇠송곳을 고슴도치처럼 꽂아 외부에서 승선할 수 없는 전투함이라는 뜻도 된다.
<고려선전기> 구절만으로 ‘거북선=철갑선’이라는 증거가 되기 어렵다. 만약 ‘철갑선이었다면 왜 <실록>이나 <난중일기>, 장계(‘당포파왜병장’) 등에 묘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거북선=철갑선’ 신화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서양인들이었다.

미국인 선교사였던 조지 허버 존스(1867~1919)는 거북선을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모니터호(철갑선)의 전형으로 간주하고 “이 거북선으로 한반도 연안 해역에서 일본 전선을 쓸어버렸다”(<코리아 리포지터리> 1892년 7월호)고 서술했다.
또 선교사이자 한국학자인 호머 헐버트(1863~1949)는 1899년 ‘하퍼스 뉴 먼슬리 매거진’에 ‘거북선=한국의 5대 발명품’으로 소개하면서 ‘철판으로 감싼 거북배’로 표현했다. 헐버트는 “거북선의 등은 쇠로 된 갑판이었으며 이 갑판이 불화살에 손상되지 않게 선체를 보호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영국 해군의 조지 밸러드 중장(1862~1948)은 1921년 “이순신은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1758~1805) 제독과 여러 면에서 닮은 위대한 제독이지만 거북선을 발명한 능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더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이 덕분일까. 1929년 영국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 전함(first ironed war vessel)’으로 소개했다.

거북선만 있었으면
사실 거북선의 신격화는 어쩌면 당연했다.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필살의 전함’이 아니던가. 특히 19세기 말 이양선이 출몰하자 불안감에 휩싸인 조선인들은 예의 거북선의 신화를 떠올렸다.
매천 황현(1855~1910)은 “…돌아간 충무공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새로운 지혜로 거북선(龜船) 만들어 승리하듯 한다면 왜놈들은 목숨 빌고 서양인들은 사라지련만….”(<매천집> 권1 ‘이충무공 귀선가’)하고 안타까워했다. 그 가운데 세상은 확확 바뀌고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철갑선 따위는 ‘기본 사양’이 되었다.
공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전쟁 중 군사 분야에서 빛을 발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최첨단 신무기 개발에 혈안이 되었다. 그중 은밀하게 수중 공격하고 유유히 사라지는 독일 잠수정(잠항정·대형은 잠수함)은 매혹적인 첨단무기였다.

오역에서 비롯된 ‘거북선=잠수함’ 신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년 뒤인 1919년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는 그해 9월 편찬한 <한일관계사료집>(이하 사료집)에 거북선과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을 담아놓았다. <사료집> 제2편 ‘한민족의 문화 능력’에서 “해군제독 이순신이 철갑 잠항정을 제조하여 일본 해군을 멸했다”고 기술했다. 드디어 ‘거북선=잠항정(잠수함)’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이 내용은 1921년 임시정부 국무원 보고서에도 인용된다.)
<사료집>은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9)가 쓴 <한국개신교수용사(The call of Korea)>(1908)의 영어 원문까지 붙여넣는다. 그런데 문제의 ‘철갑 잠항정’ 구절의 영어 원문은 ‘Korea‘s one little iron clad’이다. 즉 ‘한국의 작은 철갑함 한 척’이다. 그렇다면 이 번역은 명백한 오역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의도한 오역일 수 있다. 번역 및 편찬 과정에서 ‘철갑선’ 구절에 슬쩍 ‘잠항’이라는 말을 첨했을 가능성이 짙다. 소제목인 ‘한민족의 문화능력’을 강조하려고….

가짜 뉴스의 국내 유포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오역’에서 비롯된 ‘거북선 잠수함론’은 2년 만인 1921년 상해에서 국내로 슬며시 전파된다. 즉 동아일보 1921년 9월25일자는 “남해에서 이순신 사당의 중수공사를 시작했다”면서 “이순신은 조선 역사상 유명한 잠항정의 원조”라고 평가했다. 이후 1923년 간행된 박은식의 <이순신전>도 ‘거북선-잠수함론’을 실었다. “철갑거북선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철함이라는 것은 영국 해군이 기록한바…. 철갑거북선은 지금의 잠항정이니….”(‘서언’) 또 조선일보 1923년 7월8일자는 ‘조선고금인물-이순신’편에서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 수중 잠행으로 적선을 격파했다”고 썼다. 1920년대 중반부터 ‘거북선=잠수함’론이 민족적인 신화로 진화한다.
1925년 소년 잡지인 <어린이>(2권2호)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쓰면서 기막힌 스토리텔링에 나섰다. 즉 “남모르게 물속을 살살 돌아다니며 적의 군함을 달칵달칵 엎어 놓고 때려 부-수는 거북배! 물속으로 다니는 잠수정을…가장 먼저 발명했다“고 꾸몄다. 성인 대중잡지인 <삼천리>는 한술 더떴다. 1930년 11월호에서 “서양의 철갑 군함은 66년 전 미국의 남북전쟁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거북선이 270년 전이나 앞서 충무공이 발명했다”고 자랑했다.

발명 천재 이순신
이 무렵부터 동화나 위인전의 저자들은 더욱 자극적인 서사를 만들어 ‘거북선=잠수함’ 신화를 발전시켰다. 이순신은 어릴 적부터 타고난 과학영웅이자 발명천재로 묘사됐다. <어린이>(1930년 1월·8권 1호)는 ‘어린 시절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거북선을 발명한 이순신’을 소개했다. “어린 시절…연못 속 조그만 벌레가…물속을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데 몸에 물이 묻지 않고 번개같이 빨라서 아무리 큰 고기라도 따르지 못하고 작은 벌레를 자유자재로 잡아먹는 것을 보고…연구를 거듭하여 거북선을 발명….” 끓는 주전자를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했다는 제임스 와트(1736~1819)나 떨어지는 사과에 맞는 순간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아이작 뉴턴(1642~1727)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어떻든 근거 없는 이순신의 ‘과학영웅’ 이야기는 어릴 적 한반도 어린이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1930년 중앙인서관 출판사가 펴낸 <공든탑>은 에디슨·스티븐슨·풀턴·콜럼버스·모르스 등을 소개하면서 이순신을 ‘세계 최초의 잠항정 거북선 발명가’로 꼽았다. 또 동아일보는 1936년 1월1일자 신년특집에서 거북선을 조선의 3대 발명품으로 꼽았다. “거북선은 바닷속을 자유로 출입하게 되어 지금의 잠항정과 같이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동작…이순신은 발명의 왕이 되었고, 초인이요, 사람의 꽃(華이요, 땅의 영(靈)이다….”

난처한 답변
그렇다면 그 당시 지식인들은 ‘거북선=잠수함’ 신화를 믿었을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고문헌과 역사 연구자들은 당연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북선=잠수함’ 신화를 묵인하거나 애써 회피했다. 동아일보 1931년 2월1일자가 눈길을 끈다. 동아일보는 당시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Q&A’와 비슷한 ‘응접실’란을 운영했다. 그런데 그 날짜에 ‘대전 무성자’라는 독자가 “‘거북선=세계 최초의 잠수함’임을 입증할 출처를 알려달라”고 묻는 편지를 보냈다. “일본인이 문제를 제기했는데, 대답이 궁했다”는 것이다. 이에 동아일보 측은 1930년 ’성웅 이순신전‘을 연재한 국어학자 이윤재(1888~1943)에게 답변을 맡겼다.

이에 이윤재는 “거북선은 세계 철갑선의 시초”라고 전제했다. 그렇지만 곧 얼버무린다. “각종 문헌에 따르면 이순신이 ‘창의로 발명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태종실록>(1413)에 거북선 기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예전부터 거북선 제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이렇게 문헌에 분명하게 적힌 것을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로 충분한 답변이 되었겠죠.” 필시 이윤재는 당연히 거북선이 잠수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화로 굳어진 ‘거북선=잠수함’ 설에 대해 차마 사실을 언급할 수 없었음이 틀림없다.

신화가 된 가짜뉴스
해방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거북선은 여전히 ‘잠수함의 할아버지뻘’(동아일보 1946년 2월27일)이고, ‘현대 잠수함의 효시’(경향신문 1958년 3월23일) 혹은 ‘세계 최초의 잠수함’(동아일보 1977년 4월28일)으로 소개됐다. 그 사이 연구자들의 학술논문이 이어졌지만 한번 가공된 신화는 끈질기에 이어졌다.
그러다 동아일보 1986년 8월11일자에 흥미로운 ‘TV 프로그램 소개’가 실린다. 당시 유명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던 ‘호랑이 선생님’의 방송 내용을 요약하면서 “어린이들이 거북선이 잠수함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다툰다”고 했다. 신화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6년 뒤인 1992년 8월21일 동아일보는 “충무공과 거북선 관련 신화는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기 일쑤”라면서 “거북선이 세계 최고의 철갑선이요 잠수함이라는 풍설이 그것”이라고 매조졌다.

1921년 9월21일 국내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거북선=잠수함’설을 제기한 신문이 71년 만에 ‘거북선=잠수함’설은 풍설이라고 바로잡은 것이다. 정리하자면 처음엔 굉장히 사소한 과장이 갈수록 확신에 찬 민족주의적 감성과 결합하면서 거대한 환상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 속에 식민지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었을 터이니 지식인들이 애써 부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은 ‘거북선=철갑선’ 신화로 세계 굴지의 조선소를 차렸다. 또 축구선수 이강인이 얼마 전 스페인 명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성하자 한 스페인 기자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한국에 거북선(barco tortuga)이라고 있지 않나. 이강인이라는 거북선에 타는 기분”이라며 반겼다. 어떠한가. 최초의 잠수함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북선은 한국의 역사를 대표하는 발명품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기사를 위해 홍순재 국립해양유산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도움말을 제공했습니다. ‘거북선=잠수함’론 관련해서는 이기훈·유현재의 논문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참고자료>
국립해양유산연구소, <거북선 학술 복원 보고서(본문편)(문헌편>(전통 선박 조선 기술 Ⅷ), 2026
이기훈·유현재, ‘거북선 인식의 변화에 대한 연구-잠항정론의 확산을 중심으로’, <해양역사문화> 6권, 해사 해양연구소, 2019
김주식, ‘거북선의 철갑론에 대한 검토’, <Strategy 21> 제10권 제1호(통권 제19호), 한국해양전력연구소, 2007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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